영화를 봤던가 안 봤던가. 아마 보긴 봤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보진 않았던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 이 이야기를 책으로 보고 싶다, 이 생각을 언제 했었지? 아뭏든 어느 순간부터 내 책장에 딱 꽂혀 있었다. 

 

남들 눈치 보느라, 남들 인생 일정에 맞추느라 급급하게 지내다가 어느 덧 중년이 되어버린 애벌린은, 자신감을 점점 잃어가는, 그저 먹는 것만 입에 달고 사는 그런 지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를 모신 로즈 테라스 요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쾌한 80대 스래드굿 부인에게서 오륙십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애벌린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한다. 그 시절,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그러나 용감하게 다른 사람의 편견에 저항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지와 루스. 그리고 십시와 빅조지와 온젤과 니니와 스텀프.. 등등의 사람들이 휘슬스톱 카페에 머물며 살아간 이야기.

 

엄마는 이지가 병이라도 날까 봐 걱정하셨지만, 아빠는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라고 하셨어요. 말할 것도 없이, 그 사건 이후로 이지는 예전과 전혀 딴판이 되었죠. 루스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그러다가 루스를 만나고부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나는 이지가 버디 문제를 진정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슬픔에 잠겨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옳은 일이 아닐 테니까요. 이지가 루스를 만난 것처럼,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쪽 문을 열어 두신답니다. 나는 그분이 그해 여름 우리에게 루스를 보내 머물게 하신 데에는 필시 어떤 까닭이 있다고 믿거든요... '주께서 우리를 바라보심을, 나 또한 지켜보심을 안다네.' - p56~57

 

신은 정말 그러실까. 한쪽 문은 열어 두실까. 닫힌 문 저편의 아픔이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래도 세상 살아갈 힘을 주는 다른 쪽 문을 예비하고 계실까. 그냥 그렇든 안 그렇든, 이 대목이 많이 위안이 된다. 내게도 예비된 문이 있겠지. 내내 슬퍼할 수만은 없을테니까. 그래서 달라질 수 있겠지. 이런 마음이 든다는.. 이지와 루스는 다른 사람의 편견어린 시선 따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변을 행복하게 했고. 아마 신은, 그런 것을 예비하신 것일게다.

 

 

애벌린은, 왜 욕설은 늘 성적일까 하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다른 남자에게 모멸감을 주고 싶을 때 보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 왔던가? 씹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흑인을 가리키는 욕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이 듣는 데서는. 이탈리아인들은 더이상 이태리 놈이나 더러운 이태리 놈이 아니었고, 반듯한 대화에서는 유태인 놈, 왜놈, 중국 놈, 남미 쓰레기 같은 말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들 자신들을 변호하거나 대항할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들은 여자를 욕의 소재로 쓴다. 왜? 우리를 변호할 단체는 어디 있지? 이건 공정하지 않잖아. - p314

 

여기서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 아닌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여자를 여성이라는 굴레에 다 몰아넣고 경멸의 대상으로 줄곧 삼고 자신의 수컷성에 대해서는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우쭐함을 가진다. 그러나 여자에겐 뿌리박고 대항할 준거집단이 없다. 저항 한번 못해보고 불공정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

 

 

여자들은 타자와 대결해서 싸울 수 있도록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 수단이 없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과거나 역사와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프롤레타리아처럼 노동과 이해의 연대성도 갖고 있지 않다. 여자들 상호간에는, 미국의 흑인이나 게토의 유대인이나 생드니의 르노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공유하는 어떤 장소의 집단성도 없다. 여자들은 주거, 노동,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고 아버지나 남편 같은 남자들의 사회적 신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들보다 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 사이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다. (p22)

 

일찌기 시몬 드 보부아르도 이렇게 말했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째서 가장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 중 하나가 성적 불평등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었었다. 연대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 그것은 호소할 목소리를 낼 주체가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산발적으로 '분산'되어 노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공정하지 않아.'

 

 

 

사실이 그랬다. 그 조그만 불알 두 쪽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쇄였다. 보다 앞서 가야 할 때,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때,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할 때 필요한 신용카드였다. 에드가 아들을 원했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다 또 다른 진실이 떠올랐다. 슬프고도 바꿀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녀에게는 불알이 없으며, 가질 방법도 없다는 것이었다. - p362

 

애벌린의 이런 자각 아닌 자각에 왠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는 건,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 이 책의 저자인 패니 플래그는 스스로가 레즈비언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남녀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 책 곳곳에도 그녀의 생각이 박혀 있다.

 

"그렇지. 게다가 네가 늘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게 또 있다. 이 땅에는 굉장히 멋진 것들이 있단다. 그것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지. 그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 말 알겠니?"

스텀프는 진지하게 이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잊지 않을게요." - p178~179

 

수많은 불합리 속에서도 주위 사람들을 포용하고 따뜻하게 하는 이지의 능력은 아마도 이런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나쁜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여성을 때리는 사람, 흑인을 업수이 여기는 사람 등등 사람의 탈을 쓰고 온갖 부조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도 사람이지만, 하지만, 굉장히 멋진 것들도 또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다닌다는 것. 세상을 선의로 바라보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하여 뭉클했다. 스텀프는, 비록 팔 하나가 없는 아이였지만, 이지와 루스의 이런 철학과 지지를 받으며 참 잘 자라나고 있었다.

 

내일 영화도 한번 다시 볼까 생각 중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위안을 받았다고나 할까. 어쩌면 나이들수록 비겁한 마음으로 쪼그라져 살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지와 루스의 삶,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의 삶은 문득문득 용기를 준다. 비록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지만, 애벌린이 옛이야기 속의 사람들을 통해 자아를 찾고 변화해나갔듯이, 나도 마치 실존인물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에 따스함이 번지는 며칠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영화를 보면 또 느낌이 다르겠지. 내일 챙겨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