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에 지인들이 왔다. 간단한 와인파티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집에 온다니 며칠 전부터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어제는 퇴근도 일찍 해서 꽃도 한다발 사서 화병에 꽂고 고기도 싱싱한 걸로 사오고.. 어쩌고 저쩌고. 어쨌거나 잘 끝났고 저녁에 잘 돌아가는 걸 보고 지친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음식물 쓰레기 정리하고 설겆이 하고 대충 닦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그냥 잘 순 없어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어 몇 페이지 읽다가 뻗었다. 오늘 아침 일어나보니 11시. 헉. 허리야. 늦게 일어났더니 하루가 무지하게 짧았다. ㅜㅜ

 

이야기들은 다양했다. 사는 얘기, 회사 얘기... 가족 얘기. 어쩌다 보니 가까와진 사람들이고 사실 고민을 토로하다가 (나말고 지인들이 주로) 친해진 터라 다시 그 얘기들이 나왔다. 한 명은 상황이 계속 좋아지질 않고 있고 한 명은 좋았다 나빴다 하고 있다. 내 인생도 무지하게 평탄하게 굴러가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인생에는 굴곡이 참 많다. 듣고 있노라면 뭐랄까. 답할 말을 찾게 된다고나 할까. 그냥 편하게 듣고 웃고 떠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게, 가끔 힘들다.

 

나이가 어릴 때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듣고 상담해주는 게 내심 뿌듯했다. 내게 위안을 삼고자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들에게 내가 어떤 선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좋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내게 상담을 구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었고 인생이 뭔지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주제에 뭐라뭐라 얘기하면서 위로랍시고 아니면 도움이랍시고 했던 내가 기억난다. 오지라퍼에 유치하긴.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던 나의 과거인데... 그래도 그 때는 뭔가 교감이라는 게 없지 않았노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 나이가 좀 드니 (이렇게 말할 때마다 할머니가 된 기분이다 ㅜ) 내 에너지가 충만해야 이런 것들도 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너지가 넘쳤던 젊은 시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들이 이제는 새삼 어려워지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류의 일이다. 불행을 들어주고 피드백을 주는 일. 내가 정말 좋은 상황이고 에너지가 한껏 들어차있을 때나 기분좋게 속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어제도, 사실 몸이 피곤했다기보다는 정신이 피곤했음을 고백한다. 듣고 있노라니 내 기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들을 원망하는 건 아니다. 그 외에 즐거운 시간들도 있었고 웃고 떠드는 시간들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라서 같이 있으면 좋다. 다만, 그냥 내가 이제 나에게 집중하기에도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 시기가 왔구나, 라는 자괴감이 생겼다, 뭐 이뜻이다.

 

**

 

 

 

 

 

 

 

 

 

 

 

 

 

 

 

 

사실 그 질문들은 칸트가 제기했던 세 가지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p35)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의 저자 메리언 울프가 이럴 때 이 구절을 기억하라고 인용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대목을 읽고 나서 줄곧 생각이 든다. 칸트의 질문. 계속 내게 되새김질하면 던지는 질문이 되고 있다, 요즘.

 

 

나는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낀다. ... 이례적인, 더욱이 신적이기까지 한 법칙(어쩌면 우리는 진리를 다른 누구로부터도 받을 수 없고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법칙)에 의해 그들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p69)

 

프루스트의 이 글처럼, 한동안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 속에 빠져 지내야겠다. (아. 독서를, 읽기를 이렇게 멋진 말로 묘사할 수 있는 프루스트라는 사람은...)  나와의 소통, 책과의 소통을 좀더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시간들이 내게 필요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01-18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님맞이 수고많으셨어요!! 하는 것 없는데도 할일이 진짜 많지요~~~!!! ㅎㅎㅎㅎㅎㅎ
힘든 집들이와 고민 상담과 에너지 분배의 고민 뒤에 책을 펼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 너무 근사해요. 저 이 책 읽었는데, 완전 새롭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님 읽으실 때 같이 읽어야할 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1-19 10:3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단발머리님, 저 이 책 중간쯤 읽었어요.
얼른 다시 합류 하세요 ㅋㅋㅋ ‘다시, 이 책으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