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보다도 이 소설 때문에 나처럼 괴로웠을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건넨다. '내가 쓰는 소설의 의미'와 '식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이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선인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 글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 일부다. 

지독한 작가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게 느꼈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이 생각을 곱씹었다. 정말 지독한 작가다. 

[환영]은 정말 소위 '남편 있는 여자'가 쓰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소설인데 그녀는 썼고, 이렇게 출간해냈기 때문이다.

한때 싸이월드 BGM으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라는 곡을 깔아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남편' 아닌 '남친'이 있었고, 남친은 배경음악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자기가 옆에 있는데도 이런 곡을 걸어놓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랬는데,

'여친'도 아니고 '아내'가 이런 글을 쓴다면 남편으로서는 지켜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이설 작가가 창작의 고통을 겪는 본인만큼 남편도 괴로웠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각별한 감사'와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환영]은 정말 지독한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팔자를 관장하는 사나운 신이 사나운 곳에 버려놓은 것 같은 삶을 산다. 

오랫동안 왕백숙집을 들락거려 서로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었다. p.23 

그 삶은 서로의 '사정'을 아는 사람끼리 모인 왕백숙집으로 여자를 밀어넣는다. 그녀를 고시원이라는 좁은 곳에 가둔 것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남편을 만난 건 고시원이었다. 저녁 한 끼 해결하던 고시원 주방에서 곧잘 마주치던 남자였다. 조심스럽게 비켜서다가, 목례를 하게 되고, 김치를 나눠 먹고, 계란 프라이를 두 개씩 하게 되었다. 고개를 맞대고 한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그 국물에 찬밥도 같이 말아 먹었다. p.28

그래도 그녀는 자기의 인생만큼이나 갑갑한 공간인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남편을 만나 그곳을 일단 벗어나긴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후에 여자는 '남편과 살게 된 일'이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던 인생에 '유일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p. 116)'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남편과의 만남도 이렇게 별 감정 없이, 수식 없이, 간결하게 써내려갈 만큼 삶이 그저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사람이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살아보려고, 한번쯤 행복해보려고 여자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는데, 하필 그곳은 '물가'다. 가뜩이나 힘든 그녀를 물에 젖은 솜처럼 더 무겁고 지치게 만드는 물가. 

계절이 바뀌는 걸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건, 공기나 나뭇잎의 색깔, 왕백숙집의 손님 수가 아니었다. 계절에 가장 민감한 건 물이었다. 물가의 냄새와 빛깔은 하루하루 달랐다. 날이 더워지면 물비린내가 짙어지고 색깔도 탁해졌다. 겨울로 갈수록 물은 고요해지고 맑아졌다. 근래 들어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p.105 

치워도 치워도 끝도 없이 떨어져 방바닥을 더럽히는 머리카락은 그래도 방바닥에 얌전히 떨어져 있는 동안은 그렇게까지 더럽진 않다. 하지만 욕실에 떨어져 물에 젖고 습기에 불어 엉킨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래도 아직은 그냥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같았던 여자는 물가로 가서 욕실에 떨어져 물에 젖고 습기에 불어 엉킨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된다. 물가에서, 닭국물을 떠먹고, 소주를 따르면서 그녀의 인생은 물기를 머금고 조금씩 젖고 눅눅해지고 너덜너덜해진다.

엄마, 아빠, 여동생, 남동생, 그 어떤 이름도 그녀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는 가족의 범주는 그렇게 남편, 딸로 넓어져가며 여자를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가족과는 하고 싶은 말들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점점 더 쌓아간다.

엄마와 나는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모녀 사이인데, 할 말이 참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p.170 

가족들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더 쌓여가는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상상해본다. 아마 [환영] 속 여자의 삶 같으리라고, 소설을 읽은 덕분에 어설프게 짐작해보지만 사실은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여자가 잠깐 희망을 볼 때 나도 그 희미하고 짧은 순간의 그녀 희망을 잽싸게 낚아챘다. 희미한 빛이 점점 선명해져 그녀 안의 물기를 말려줄 수 있게 되기랄 바랐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이설은 지독한 작가다. 그래서 책을 덮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주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무리 속도를 내려고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을 켜고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깊이 안도했다.


물에 젖은 채로 오래 방치돼 물때까지 머금은 욕실 배수구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눈 돌리지 않고 이마 찌푸리지 않고 맨손으로 용감하게 끄집어내는 김이설 작가의 용기가 놀랍다. 그리고 소설이 더 길게 쓰여지지 않아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