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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국민학교 5-6학년 때 나는 여름방학을 대부분 두류도서관에서 보냈다. 5학년 때는 셜록홈즈 시리즈를, 6학년 때는 루팡 시리즈를 독파했고, 그 후 틈틈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었다.  

독파라고는 하지만 너무 일찍 읽어버린 탓에 지금 다시 읽어도 결말은 모른다. 하지만 '너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나무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새겨주고, 기암절벽에 자태도 당당하게 서 있는 멋진 '기암성'을 상상하게 하고, 비둘기 혹은 무궁화호밖에 타보지 못한 나로 하여금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로망을 갖게 한 것이 다 이런 추리소설 시리즈물이었다. 

이후로도 틈틈이 추리소설을 읽고, 스릴러 영화를 보긴 했지만 그 시절 여름방학 때만큼 열정을 쏟은 쪽은 소설보다는 '미드', TV 시리즈물이었다.  

소설 대신 미드를 보기 시작하면서 음산하면서도 우아한 저택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들과 신비로운 공기를 상상할 수 있는 특권은 빼았겼지만, 더욱 생생하고 과학적이며 무엇보다 빠른 해결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학생 때보다 훨씬 바빠진 나로서는 꽤 괜찮은 대안이었달까. 

그러다 얼마 전 다시 열중해서 읽은 토니 힐 시리즈물의 첫번째 책 [인어의 노래]는 어릴 때 읽은 추리소설의 고전들보다는, 최근에 본 미드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영상으로 보고 있지 않은 점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잔인해졌고, 범인의 내면은 더욱 복잡하고 뒤틀려져 있고, 그래서 해결하는 방식 역시 좀 더 과학적이고 복잡하게 바뀌어 있었던 것. 

예를 들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보헤미아 스캔들'은 이런 식이다. 복면을 한 방문객이 유럽의 위기 운운하며 겨우 한 장의 사진을 찾아달라는 사건을 의뢰하고, 홈즈는 역시나 특유의 치밀한 관찰력과 변장술과 통찰력으로 해결 직전에 이르지만, 너무나 아름답고도 현명한 여인이 오히려 홈즈의 생각을 앞서 사건 해결이 실패하는가 싶더니, 결국 여차저차하여 모든 오해는 풀리고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물론 예를 든 '보헤미아 스캔들'의 경우 홈즈 시리즈 중에서도 몸풀기에 가까운 짧고 가벼운 이야기지만, 과거 고전적인 추리소설들 속의 사건은 전반적으로 요즘의 추리물들에 비해 훨씬 사건이 다양했다. 살인이 일어나지 않고는 이야기되지 않는 현대의 추리물들과는 달리, 살인이 전부가 아니었고 필연도 아니었다.  

살인과 관련돼 있다고 해도 죽고 나서 사건을 해결하기보다는 죽기 전에 갈등의 요소를 제거해버리는 식이었다. 그렇다보니 사건에 접근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도 훨씬 다채로웠다. 이미 일어난 일의 범인을 찾아내기 위한 단서 중심의 이야기이기보다는 관련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사연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추리물에서는 아름다운 결말이래봐야 범인의 자백과 반성 정도지만, 과거의 추리물들 속에는 결국 최악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고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진정한 '아름다운 결말'도 적지 않았다.  

정말 조마조마하면서도 짜릿한 재미를 안겨줬던 루팡과 홈즈의 대결에서조차도 -작가가 모리스 르 블랑인 탓에 승자는 대체로 루팡이었지만- 결국은 두 탐정의 화해모드로 잘 마무리되곤 하지 않았던가.  

자, 이제 다시 [인어의 노래]로 돌아와보자. 사건은 말할 수 없이 잔혹하고, 범인은 더욱 뒤틀려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이 작품은 현대 추리물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보다는 범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범인의 마음 속으로 접근해 사건 해결을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또 고전 추리물 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고전 추리물 쪽에 더 가까이 있다고 여겨진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해 내면을 파고드는 일이니까. 

그래서일까. 사건과 단서 중심이기보다 사연 중심인 이 작품은 여성성이 무척 강하다. 작가가 여성이고,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캐롤 조던이 여성이고, 밝힐 수 없는 여성성이 작품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사건해결의 중심에 서 있는 토니 힐 역시 똑똑하고 매력적인 남성이지만 오히려 여성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발기불능'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설정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거세불안'이라는 전형적인 여성적 불안요소로 볼 수 있으며, 프로파일링이라는 일 자체도 여성성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타인과의 공감'을 필요로하는 매우 여성적인 작업이다.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는 힘 역시 보통의 경찰이나, 보통의 남성 심리학자와는 다른 토니 힐의 여성성에서 비롯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류사회에서 배제돼있다는 점 역시 슬프게도 일종의 (사회화된) 여성성이라고 볼 수 있다. 캐롤 조던은 실제로 여성이라서 경찰 조직 내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토니 힐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범죄수사라는 영역에서는 낯선 '프로파일링'이라는 남다른 접근 방식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바로 이런 점이 토니 힐과 캐롤 조던의 '환상의 쿵짝'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인어의 노래]의 가장 큰 특징이 여성성이라면,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시성(詩性)'이다. 게이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건의 범인을, 언론을 비롯한 대중사회는 '퀴어 킬러'라고 이름짓지만 토니 박사는 '핸디 앤디'라고 이름 붙인다. '시(詩)'라는 것이 모두와 기존의 관점을 걷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벌거벗은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토니 박사가 범인을 조우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다.

'퀴어 킬러'와 '핸디 앤디'라는 이름짓기는 아주 명확하고도 큰 차이를 갖고 있다. '퀴어 킬러'는 '퀴어'라는 '거대한 이단적 집단' 전체를 일컫고 있으며 '킬러'라는 말 역시 두루뭉술한 범주를 형성한다. 하지만 '핸디 앤디'라는 이름은 지극히 범위가 좁혀져 일그러진 내면을 가진 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군다나 '퀴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일종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안겨준다. 따라서 '퀴어'라는 말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발 뒤로 물러서게 한다면, '핸디 앤디'라는 이름은 한 발 더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범인을 '퀴어 킬러'로 부르느냐, '핸디 앤디'로 부르느냐는, 그러므로 사건을 해결하고 못하고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온다고 해도 과언을 아니다. 

[인어의 노래]는 무려 5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지나친 선정성으로 대중과 범인, 수사대 모두에게 뭐 하나 보탬이 안 되는 언론의 행태나 경찰 내부의 관행과 구태의연한 수사기법, 사회소수자들에 대한 일반대중의 시선 등 곳곳에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들도 꼼꼼하게 숨겨져 있다.   

또한, 범죄스릴러라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될 요소인 반전도 훌륭하다. 사실 나는 범인이 직접 쓴 5번째 '사랑' 파일에서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보고 그 반전을 이미 짐작했었다(이건 자랑이다 :). 하지만 남겨진 또 하나의 반전이 더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토니 힐 박사의 혼잣말로 끝나는 결말 역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인어의 노래]는 충격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모두 만족시킬 만한 세련되고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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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좋은 책을 어서 소개하고 싶어서 출판사는 마음이 급했던 걸까. 책에 오자나 비문이 꽤 많았다. 표시해놓은 것들만 몇 개 지적을 하자면:

"메릭은 자신이 겁먹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기도했다." (p.168) => "메릭은 자신이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기도했다."

"네가 널 원한다는 걸 보여줘." (p.233) => "네가 날 원한다는 걸 보여줘."

"좋아, 앤디, 이제 쇼를 할 시간이야." (p.238) => 첫문장임에도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안젤리야" (p.425) => "안젤리카"  

이런 부분들이 좀 실망스러웠고, 속도감 있게 책을 읽어나가는 데도 방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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