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임신한 친구들이 가끔 너희도 빨리 결혼하고 임신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이야기해도 잘 모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의 속도가 비슷하면 만났을 때 공감대도 더욱 커지고 같이 나눌 얘기도 많다고 합니다. 분명 그렇긴 할 겁니다. 아마 여자의 결혼과 남자의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다를 거고, 엄마가 되어본 여자와 엄마가 되지 않았거나 되지 않을 여자가 또 다를 겁니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가슴이 이렇게 철렁한 것은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영화 연출자가 여자라는 점, 그리고 아빠보다는 엄마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 그리고 관객인 나 역시 여자이고 잠재적인 엄마라는 점은 과연 이 영화를 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너도 빨리 결혼하고 임신해서 자기랑 같이 얘기하자고 했던 친구의 말이. 분명 지금 이 영화를 보는 것과 혹시라도 나중에 엄마가 된 후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다른 일이겠지 싶습니다, 친구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친구의 말 속에는 너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경험해본 사람만큼은 잘 모를 거라는 뜻이 포함돼 있는 거니까요.
영화는 스페인 토마토축제 현장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시뻘건 으깬 토마토들 사이에 자유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에바가 그 틈에 있습니다. 이미 으깨어져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린 시뻘건 토마토들은 감독의 명백한 의도대로 마치 사방에 흐르는 피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에바가 만끽하는 명백한 자유가 명백하게 불길한 기운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후 엄마인 에바가 무기력하게 누워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에바의 집과 차를 누가 시뻘건 페인트로 어지럽게 칠해놓은 것에서 시작하고, 길 가다 난데없이 뺨이 시뻘게지도록 따귀를 맞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과거의 생기 넘치던 에바는 이제 누구보다 시든 파같은 몰골로 직장을 구하고 장을 보고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정한 남편과 애교 넘치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소파에도 혼자 누워있고 모습도 엉망이고 집과 차에 칠해진 페인트도 혼자 치우고 있고 그 누구도 곁에 없습니다. 그나마 에바에게 관심을 갖고 일도 도와주며 호의를 보여주던 직장동료마저 겨우 춤 한 번 거절당했다고 에바에게 참 나쁜 말을 속삭입니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를 볼수록 불길해집니다. 이쯤되면 <케빈에 대하여>는 최고의 스릴러 영화입니다. 난데없이 에바와 프랭클린 사이에 생긴 아이는 보통의 아이와 좀 다릅니다. 엄마를 싫어하고 엄마한테만 못되게 굽니다. 함께 사는 남편도, 전문가인 의사도, 케빈은 사랑스러운 보통의 아이라고 말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에바에게는 유독 사납게 굽니다.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사람들이 에바만을 이토록 비난하고 심지어 저주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케빈이 보통의 아이와 좀 다르게 된 것보다 에바가 보통의 엄마와 좀 달랐던 것이 먼저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릅니다. 린 램지 감독은 실제로 "내 아이가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 때문에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감독은 케빈이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난 것은 그리고 더 안 좋은 아이로 자란 것은 보통의 엄마와 달랐던 에바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듭니다.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유랑하던 에바에게 임신은 프랭클린에게처럼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아기를 가졌을 때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러웠을 사람이 실제로도 적진 않겠지만 일단 낳기로 하면 대개는 모성애에 의해 자연스럽게 아기를 사랑하게 됩니다만, 에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에바는 조금도 기쁘거나 반가워보이지 않았습니다. 육마의 과정마저 험난합니다. 에바도 모두가 당연하게 기대하듯 모성애 넘치는 엄마가 아니지만, 케빈도 여느 아기처럼 사랑스럽기만 한 아기가 아닙니다. 가끔 엄마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엄마가 아끼는 것들만 골라 망쳐놓는 케빈의 눈빛과 마주칠 때는 섬뜩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케빈이 커갈수록, 그 섬뜩한 눈빛은 조금씩 나쁜 짓들로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영화가 주는 긴장감이 극도에 달해가면서 실제로 사건도 더는 나쁠 수 없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을 때, 에바가 왜 혼자 그 길고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지를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은 끔찍하게도, 만약 나에게 저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일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일어났으니까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세상에 그 어떤 극악무도한 놈에게도 엄마는 있으니까요. 그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요. 아이에게 다른 엄마들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사랑을 주지 못했던 엄마라면 또 어떤 마음일까요. 많은 사람이 그 아들의 잘못이 엄마탓이라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무엇보다 그 자신 스스로가 가장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주체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그녀가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오로지 케빈에게 "왜 그랬냐"고, 너무나 묻기 어려웠고 대답을 듣기도 두려운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저 수없이 많은 질문이 온 몸에 소름처럼 돋아나지만 차마 '나라면'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마련할 수 없고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다 보고 나서도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결국 에바는, 이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케빈을 가장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드디어 눈을 제대로 맞추고 질문을 던졌을 때 한 번도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았던 아들은 가장 솔직한 대답을 줍니다. "그 때는 아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과 이즈라 밀러의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틸다 스윈튼은 에바로, 케빈의 엄마로, 이즈라 밀러는 케빈으로, 에바의 아들로 영원히 제 가슴에 박제되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모 과장은 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누가 꺼냈다는 겁니다. 이상하다는 이유가,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이 핸드폰 메인화면에 자기 아이들을 넣어두는데, 그 여자과장은 자신의 셀카를 넣어놨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성적으로는 엄마는 무조건 아이들 사진을 핸드폰 메인에 넣어놔야 하는 거냐고, 아빠가 아이들 사진을 안 넣어놨어도 그렇게 말했겠냐고, 엄마가 되면 자기 자신은 없어지는 거냐고 발끈했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면 과연 그랬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 단순한 일화가, 지금에 와서 무척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겨우 핸드폰 메인화면에 아이들을 넣어두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갖고도 그녀의 모성애를 판단하고 또 많은 경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감히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모성애'란 단어에 이토록 진지하고 무서운 질문을 던진 원작의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 린 램지와 틸다 스윈튼, 그리고 이즈라 밀러가 정말 굉장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