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기다리다 - 제134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를 읽을 때부터 이 작가, 심상치 않았다. 역자의 말을 빌자면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기교조차 부리지 않는 평범한 문장'을 슬렁슬렁 읽고 나면 '어, 끝났네?'하고 만다. '아, 끝났구나..'가 아닌, 약간의 끝이 치켜올라가는 이 느낌은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작은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고개를 15도 정도 갸웃거리며 한번 더 앞 장을 뒤적이게 하는 묘한 여운을 불러온다. '희한한 재주'를 가진 이 작가를 <바다에서 기다리다>라는 표제작과 <노동감사절>로 다시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희한한 재주를 가진 작가와, 세밀한 감각과 작가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가진 역자가 만나 싸하면서도 유쾌한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표제작 <바다에서 기다리다>는 직장 동기 오이가와와 후토짱의 이야기이다.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두툼한 손을 가진, 1년도 더 전에 발령난 인사이동을 특급비밀이랍시고 몰래 전화로 알려주는 동기 후토짱이 있다. 둘은 술을 마시다가 장난삼아 '먼저 죽는 사람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나중에 남은 사람이 부숴주기' 협약을 맺었는데 말을 꺼낸 후토짱이 덜컥 죽어버렸다. 그것도 후토짱 식으로, 우스꽝스럽게. 오이가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후토짱의 하드디스크를 부숴주러 후토짱의 집에 몰래 들어간다. 그리고 후토짱의 내밀한 기록들을 폐기시킨다.
가끔 슬프고 속상한데도 피싯 웃음이 새어 나올 때가 있다. 웃으면 안 되는데, 분명 슬픔의 한가운데 풍덩 빠져 있었는데 어느새 가장자리에 와 있었던 걸까, 순간적으로 팟, 떠오른 기억이나 꼬리를 물고 연상된 일 때문에 새어나오는 허탈한 웃음. 입사동기 후토짱의 죽음에는 그런 서글픔과 웃음이 뒤섞여 있다. 일로 만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한 '사람'과의 인연을 작가는 조근조근, 마치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동기 후토짱과 함께한 오이가와의 소소한 시간을 들려준다. 그 담담한 어조의 글을 읽다보면 눈물이 나면서도 웃게 된다. 웃으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단편소설에는 영 걸맞지 않아 보이는 제목을 단 <노동감사절>은 다 읽고 나면 입꼬리에 웃음이 걸린다. 어쩌다 의리상 맞선자리에 끌려나오게 된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의 속내를 유쾌하고도 쌉쌀하게 드러내보인다.
'찐빵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냅다 친 것 같은' 얼굴을 한 맞선 상대자 노베야마 씨는 회사를 아주 좋아하고 취미가 '물론' 일인 서른 여덟의 남자다. 두 사람의 맞선 장면을 한번 들여다볼까. 우선 노베야마 씨는 찐빵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냅다 친 것 같은 얼굴임을 기억해두자.
팥이 몰려서 부풀어 오른 부분에 물기 많은 눈과 팽창한 붉은 입술이 붙어서, 호호호, 축 처져 있다. 머리는 어중간하게 길어서 감았을지도 모르지만 지저분한 느낌이다. 그러나 사랑만 있으면 다소 못생긴 건 커버가 된다. 여기서는 예의로라도 사람 됨됨이를 보자. 어쩌면 면상은 저 모양이라도 아주 좋은 사람일지 모르잖아.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 교코는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뭘 물어봐야 좋을지. 맞선 따위 본 적이 없으니 도박은 안 하시죠, 라든가 변태 행위는 곤란해요, 라든가 하는 이야긴 중요하기는 해도 말로 할 수는 없고. 머릿속에서는 이 인간하고 그걸 할 수 있겠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으음. 난이도가 극히 높겠는걸. 그러나 노베야마 씨도 생각하는 건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그는 소리 내어 말했을 뿐이다. "신체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아뿔사) "88 - 66 - 92." 노베야마 씨는 한번 더 히죽 웃었다. 여기가 가축시장이냐? 좀 더 지켜볼까.
그건 그렇고 노베야마 씨는 투명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 목소리로 인도 철학이라도 이야기하면 어떡하지? 약간 불안해졌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직업은?" 그가 물었다. "무직인데요." 나는 대답했다. 도둑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고, 그저 일본에 삼백육십만 명이나 서식하는 정상적인 무직자 중 한 명이다. "저는 회사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랍니다." 무엇무엇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직 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회사라니, 덜떨어진 놈!
결국 교코는 맞선 주선자인 동네 아주머니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노베야마 씨에게 잘 놀다가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후배를 만나 술을 마시고 집을 향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던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에게는 다행히도 기분 안 좋은 날 애용하는 '자포자기삼미' 주점이 있다. 썰렁한 술집 카운터를 지키며 14인치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고 손님이 오면 되레 귀찮아 하는 주인장과 불경스런 얼굴로 건배를 외치고 문어 안주를 먹는다. 이 주인장, 손님도 별로 없는 술집에서 도라도 닦은걸까. 지옥같은 맞선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배회하는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 교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걱정해 봐야 손님은 안 와.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뿐이지. 그래서 안 되면 그때 가서." 교코는 이렇게 자포자기삼미 주점에서 '새까맣고 조용하고 좁은 밤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그날은 12월 23일 노동기념일, 새까맣고 조용하고 좁은 밤 한 조각은 이 힘겨운 노동기념일의 노동에 대한 보답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죽음에-대개의 죽음이 그렇지만-무방비하게 살고 있는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겨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발가벗겨질 농밀한 기록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후토짱 협약이라도 당장 맺고 싶다. 후토짱 같은 동기녀석, 사람 좋아 보이는 두툼한 손을 가진 동기녀석 하나가 있다면 인생 참 든든하겠다. 가끔 '자포자기삼미' 주점에서 문어를 안주삼아 건배를 해도 즐겁겠다. 단 어이없이 투신자살하는 사람에게 깔려죽지 않아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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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11-08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어제 신나게 장바구니에 책 담아 주문했는데, 오늘 이 리뷰를 보아버렸네요. 이거 보니 바로 구매하고 싶어지잖아요...흑.

깍두기 2006-11-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반가와요!!!!!!!
너무 반가워서 리뷰도 안 읽어보고 댓글 달려다 간신히 참고 읽었어요.
리뷰는 또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자주 좀 오시구려.(나도 뭐 할 말 없지만^^)

superfrog 2006-11-0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마음가는 대로 하세요.ㅎㅎ 제생각에는 치니님도 재밌게 읽으실 거 같은데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보셨나요? 그 작품도 좋아요.
깍두기님, 진즉부터 오신 거 알고 반갑게 깍두기님 방에 들락거리고 있어요. 해송이 방에도요..ㅎㅎ 넵, 자주 오겠습니다! 어느분 명이라고..^^

2006-11-08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1-0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그 표현 제격이에요. 어이없고 유쾌하고 쓸쓸한. 어수선한 시간에 어수선하게 읽혀버리게 하고 싶지 않은 책, 저는 요시다슈이치 작가가 그래요. 좋은 분이 선물해주셨는데 가만가만 표지만 한번 쓰다듬어줬지요. <바다에서 기다리다>도 그렇게 미뤄뒀던 건데 부담스런 양이 아니라서 욕조 속에 들어가서 다 읽어버렸지요. 그러고는 끼적거리고 싶어 근질근질해져서 한밤중에 저리 조각글을 남겼어요. 야마모토 후미오의 <플라나리아>를 한번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느긋하게 볼 수 있을 때' 말이죠.

2006-11-08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1-0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다슈이치!님, 이거 위험해요. 같은 시간, 공명수가 너무 일치해요. 이쯤해서 갈라놔야 해요.ㅎㅎ
(또 각을 잘못 잡아 '어이없고'로 썼네요. 불치의 지병을 근사한 해몽으로 메꿔주셔서 감사.^^)

날개 2006-11-08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리뷰의 대가다운 금붕어님......^^

superfrog 2006-11-09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헛, 대가요? ㅋㅋ 모모가 들으면 웃겠어요. 잘 지내시죠? 배드민턴은 이제 선수급?^^ 땡수투가 많이 줄지 않았나요? 요즘 좀 바빠서 만화 사재기도 못하고 있어요.

플레져 2006-11-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땡스투여요 ^^

superfrog 2006-11-1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님에게는 이토야마 아키코가 어떻게 읽힐지 무척 궁금해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도 그렇지만 이 책도 후토짱이 계속 기억에 남아요.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인데도 읽고 나서의 파장은 참 길어요. 땡스투, 땡스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