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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하나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평점 :
가끔 어떤 책을 읽을 때 사실적인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멋대로 판단할 때가 있다. 그런 잘못된 판단으로 만들어진 생각들은 이내 실재하는 사실적 정보들과는 상관 없이 생명을 얻어, 머릿속 기억장치 속에 통조림처럼 유효기간이 찍혀 버젓하게 들어앉아 작은 공간을 차지한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이 책 <내 나이 서른하나>를 읽으며 나는 이렇게 '근본'을 알 수 없는 사생아 같은 생각을 만들어냈다. 서른한 개의 짧은 글들을 읽어나갈 때 그 생각은 글자들을 영양분삼아 제멋대로 덩치가 커져갔고 뿌리는 다부지게 뻗어나갔다. 그 사생아 같은 판단은 항상 그리 대단치도 않은 것들이고 대개는 잘못된 판단일 확률이 50%는 가뿐히 넘지만(가끔 족보도 못 외우는 얼뜨기가 화투판을 휩쓸듯이 족집게처럼 맞춰내기도 하지만) 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다행히 항시 어떤 책을 읽을 때마다 반복하는 것도 아니니 다행일 뿐이다. 하지만 우연하게, 혹은 어떠한 계기로 그 태생적으로 '근본'을 알 수 없이 만들어진 생각이 오류였음을 깨달았을 때도 수정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오류들은 그때, 그 책을 읽을 당시를 충분히, 오롯하게 반영하고 있어, 쉽사리 수정하고 싶은 맘이 생기질 않는다. 그저 그때의 내 감정에 꼬리표를 달아 봉인하고 싶다.
아마도 야마모토 후미오의 이 책에 대한 생각도 대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류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만든 생각은 이랬다. 작가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날이 서 있을 때, 변태할 외피는 벗었으나 아직 새 외피는 얻지 못한 상태로, 투명한 속살이 그대로 소금기를 지닌 바닷물에 드러나 눈물나도록 쓰라려 하고 있는 상태에서 발악적으로, 미열에 들떠, 혹은 공허한 시선으로 방 한구석을 응시하며 이 글들을 쓴 게 아닐까, 하는. 한 발 더 나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작가, 일시적으로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졌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순전히 그 근본을 알 수 없이 만들어진 오류를 바탕에 깔고서 하는 말들이다.
숨차게 사방으로, 위아래로 뛰어봤자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삶을 살다 어느날 맞는 서른이라는 나이. 나이 앞에 낯설게 들러붙은 3이라는 숫자가 준 충격에서 벗어날 즈음 다시 찾아온 그 충격에 조금은 심드렁해질 수 있는 나이, 서른하나. 어쩌면 길기도 짧기도 할 수 있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지났을 수도 있는, 아직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황금기를 기대하며 허허로이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는 나이, 서른하나. 여기 이야기 속에서 제각각의 서른하나를 넘기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 한구석이 삐걱거린다. 직장에서 주위가 시끄럽다고 귀를 틀어막고 일을 하질 않나, 월급을 털어 산 외제차에서 생활하며 스포츠클럽의 샤워실을 제집 화장실로 사용하질 않나, 자신이 명기를 타고 났다며 동생에게 고백했다 구박을 맞질 않나. 맘에 쏙드는 기호품에 집착하듯 1년에 단 한번 해외에서 외도를 하질 않나. 하나 같이 뭔가 덜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난 끈질기게 살아남겠다고 밤마다 다짐하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알 바 없이 난 내 멋대로 갈길을 가겠다고 외치는 철부지들 같기도 하다.
이야기가 이제 슬슬 진행되려나 싶을 때 '아.. 더 쓰기 싫어, 끝내버릴래!'하고 변덕부리듯 미련없이 끝나버리는 글을 한 편 한 편 읽다보니 작가의 속내를 알 듯도 싶다. 작가는 헤어진 남편의 주정뱅이 시아버지의 품에 기대 잠들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던 게 아닐까. 혹은 실제로 알코올의 힘을 빌어 하루를 견뎌야 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을까. 세상에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여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게 못내 억울하고 속이 상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옆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도 싶고 뒤통수를 타닥,치고 싶기도 하고, 공들여 한 그녀들의 화장한 얼굴을 망쳐버리고 싶기도 했던 게 아닐까. 내 나이 서른하나는 이렇게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인데 네 나이 서른하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거야,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작가는 언제까지 귀를 틀어막고 자동차만큼 좁아터진 방구석에 박혀 있을 수만은 없잖아!하는 오기로 머리 위에 하나씩 저마다의 속도로 돌고 있는 우주를 달고 사는 그녀들에게서 그 우주를 멋대로 떼어내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되감기도 하고 재빨리 감아버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금기에 드러난 속살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플 때는 거칠게, 조금 살 만하다 싶으면 생색내듯 너그러이 말이다. 이야기 속 서른한살에는 그녀들에 대한 작가의 미움과 시샘과 절망이 함께 들어 있다.
그녀들을 향한 작가의 감정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튀어, 대개는 공허한 서른하나의 '그녀'들이 탄생하지만, 때때로 네 나이 서른하나도 나와 같구나..하는 체념과 동질감에 읽고 나면 알싸하면서도 가슴 따뜻함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 덕분에 외로워 울고 있는 것만 같은 야마모토 후미오의 생채기투성이의 얄궂은 맨살을 다 들여다본 나는 이 짧은 글들이 더 마음에 든다. 새살이 돋고 견고한 새 외피를 장만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세상을 살고 있는 여자들을 미워할 필요가 없어진 단단한 그녀의 글들보다는 이 글들에서 야마모토 후미오라는 사람의 맨얼굴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