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환상의 책] 이후 폴 오스터에게 약간 거리를 두었었다. 초반의 흡입력 있는 전개에 비해 막바지로 갈수록 이야기는 늘어놓은 곁가지들을 수습하는 느낌이 강했던 때문이다. 물론 토막 읽기를 한 때문에 몰입이 안되었던 건지, 몰입할 수 없어서 토막 읽기를 한 것인지 어느 것이 애초의 원인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환상의 책]은 저윽이 실망스러웠고 [신탁의 밤]을 다시 집어들기에는 망설임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실망감보다는, 폴 오스터의 중독성을 지닌 질긴 인연으로 다시 [신탁의 밤]을 집어들었다.. 
열 페이지, 스무 페이지.. 읽을수록 손에서 책을 놓아버릴수가 없다.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고 있다. 결국 하루 만에 꼬박 읽고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휴, 한숨을 내쉰다. 미처 다 읽지 않고 페이퍼에서 투덜거렸던 내용들이 약간은 부끄럽다. 섣부른 판단을 했던 것에 대해 되돌리고 싶은 생각도 든다.
소설의 중반을 넘길 때까지 계보를 그려야 하나 싶기까지 했던 이야기들은 일순간 명확한 하나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압축되어 눈앞에 드러난다. 그래, 신탁의 밤이다. 이 책의 제목이 신탁의 밤이로구나.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 끼워질 때의 그 딱, 하는 손의 촉감처럼 지금까지의 인고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결국 시드가 집착을 보였던 포르투갈제 파란공책에 썼던 이야기는 미완이었지만 그 미완의 이야기 속에서 신탁은 완결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탁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때때로, 설령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그것을 알게 되지.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어느 순간에나 미래가 있네.'라고 말한 존 트로즈의 말처럼 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파란공책의 알 수없는 힘을 빌어 자신에게 신탁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신탁은 현실로부터 구분지어진 결계 속의 뜬금없는 우연이 아닌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현실의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운명적인 신탁이다.
 
언제나 우리들은 뒤늦게서야 깨닫고,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판튕기기를 하거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거나, 나 아닌 존재를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 과거에 자신의 움직임들이 파란공책 속에서 이야기가 되어 신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이야기가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자신에게 운명의 힘으로 덮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안다면 신탁은 더이상 신탁이 아니므로, 주위의 진동을 민감하게 알 수 있었던 '신탁의 밤'의 눈먼 주인공 르뮈엘 플래그가 자신을 칼로 찌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은 진짜이고 말도 진짜고, 인간적인 모든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았던 존 트로즈가 불운한 사랑을 했던 것처럼 신탁은 대개 행운보다는 액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 세상에서 신탁은 신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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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0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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