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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
김기찬 지음 / 중학당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책이 아니다. 사진집이다. 사진집도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 출판된 것이니 왜 책이 아니냐 하겠지만 책이라고 하기에는 편집상의 문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다. 한마당 화랑 개관 17주년 기념으로 열린 '개가있는 따뜻한 골목' 김기찬 사진전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책 앞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칼럼으로 널리 알려진 '명 칼럼니스트'가 쓴 축하의 글과 책 뒷부분의 작가의 말과 약력을 빼고는 모두 다 사진으로 채워진 사진집이다. 영문을 제외하고 한글이라고는 달랑 6페이지 정도 되는데 이 여섯 페이지가 거의 저자의 원고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너무 엉터리여서 '아, 이렇게 하고도 책이 나오는구나', 하고 기가 막혀 했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아마도 자비출판이 아닐까, 하는 엄한 생각도 잠깐 스쳐간다. 무엇보다도 오류의 핵은 제목일 듯하다. <개가있는 따뜻한 골목>이라 표지에 찍혀 있는데 이 '개가있는'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확실한 오류인지 한참 동안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속표지에는 버젓이 '개가 있는'으로 제대로 띄어쓰기가 되어 인쇄되어 있으므로.
책다운 부분에서는 거의 낙제점 이하를 주고 싶지만 그 엉터리 글자들 사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사진들은 보고 있는 새 충분한 만족감을 던져 준다. 잘 넘겨지지도 않는 두터운 종이에 콘트라스트 높은 가을날 오후의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는 사진들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선을 머물게 한다.
사진들은 모두 개가 있는 골목의 풍경들이다. 개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있다. 언제 어디선지 모르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갔을 법한 얼굴의 사람들, 또는 나 자신.. 거창하게 무슨 종이네,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잡견들과 뒤섞여 돌사진을 찍는 찡그린 얼굴의 아이도 있고 상가집 앞에 걸려 있는 등도 있다. 웃통을 벗어제끼고 데모대들이 깨서 시위 때 쓴다 하여 이제는 사라진 널찍한 네모 블럭이 깔린 울퉁불퉁한 골목을 잡견을 앞에 세우고 가는 사내아이도 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강아지를 웃옷 속에 품고 친구에게 자랑하는 사내아이도 있다. 10마리도 족히 넘는 동네의 온갖 개들 앞에 여왕처럼 먹이통을 들고 군림하고 있는 갈래머리 소녀도 나온다. 조각난 햇빛 아래 볕을 쬐고 있는 개가 있는가 하면 늙고 병든 노인의 옆에 놀랍도록 노인과 똑같은 포즈로 앉은 비쩍마르고 애처롭게 생긴 개도 등장한다.
어릴 때 잠깐 개를 키워 본 경험밖에 없고 그다지 개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사진집은 거창하고 요란스럽게 개를 대하지 않는다. 또한 '명 칼럼니스트'의 축하글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물질적 풍요나 빈곤, 절망 등을 '아이들과 개들이 뛰는 풍경 속에서 무엇이 빈곤인지 묻고' 있지도 않다. 작가는 그저 조용히 자연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골목 안의 사람과 개에게 흑백의 필름을 담은 카메라를 골목 안 풍경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이밀었을 뿐이다.
'명칼럼니스트'가 본 골목 안 풍경 사진은 잡견이 아닌 혈통 있는 개만 고집하는 애견가가 갖고 있는 시선이며, 골목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이다. 해서 이 사진에 다소 왜곡된 의미를 갖다 붙인, 띄어쓰기도 제대로 안 된 축하글은 심하게 못마땅하다. 마치 도시 사람이 시골을 전원주택의 풍경을 기본으로 깔고 한가로운 장면만을 떠올리듯이, 이 칼럼니스트는 골목 안 사람들이 이기적이지도, 풍요의 때가 끼지도 않은 유기농야채쯤으로 이미지를 마음대로 만든다. 하지만 실제 골목 안은 어떤가. 좀도둑이 다 쓰러져가는 엉성한 담을 넘고 있고, 매일밤 끊이지 않고 어느 집에선가 부부싸움으로 냄비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넘쳐나며 아이들의 악다구니로 하루가 열린다. 혹은 소위 잘사는, 많이 배운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것없이 하루 세끼를 먹고 마찬가지로 키우는 개를 이뻐하며 쓰다듬고 먹이를 준다.
작가 김기찬은 이런 사람사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