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겨울 <퍼레이드>로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퍼레이드>는 이색적이었고, 경쾌하며 동시에 음침했으며 다섯의 주인공들은 각 장에서 화자가 바뀔 때마다 실제 주변의 특정 인물들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눈앞에 선명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잘 다듬어진 각본이 운좋게 섬세한 연출과 만나 감칠맛 나는 한 편의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듯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많은 정보가 없던 만큼 기대치가 적어서였을까, 요시다 슈이치는 우연찮게 알게 되어 적잖게 기대를 갖게 한 작가로 기억되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그의 다른 작품인 소설집 <파크 라이프>를 읽고는 <퍼레이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좋은 소설을 만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파크 라이프>에는 '파크 라이프'와 '플라워스'라는 두 편의 중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첫번째 작품 '파크 라이프'는 책 표지가 작품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과 단순한 색으로만 이루어진 그림,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공원. 한가운데 분수가 있으며 작은 연못이 있고 몇 종류의 새들이 있으며 빨간색의 항공촬영용 소형기구가 날고 있다. 뚝 잘려져 단층으로 보여지는 공원의 땅 속으로는 지하철이 다니고 해골도 묻혀 있으며 공원 옆으로는 도로, 그 위로 초록색 차가 달린다. 공원의 풍경에는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공원의 풍경은 샛노란 배경색을 갖고 있지만 영화의 정지 화면처럼 답답하다. 요시다 슈이치는 '파크 라이프'에서 대사를 아끼고 영상으로만 전달하려는 영화처럼, 그저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주인공 '나'의 움직임들만을 보여준다. 전작 <퍼레이드>가 1인칭 시점으로 건조하게 각자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극도로 감정의 묘사를 배제한 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파크 라이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읽는 내내 강한 감정을 뿜어낸다. 외롭다고 외치기도 하고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어 안도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의식이 흐르는 대로 이미지와 소리와 냄새가 뚜렷한 경험 속에서 개연성을 만들어 내며 이것은 바로 현대의 파크 라이프 자체이다.    
생동감 있는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힘은 '플라워스'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언뜻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한 사건들이 서로 뒤섞이고 엉켜서 선명한 영상을 통해 인물들의 호흡을 전달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의 동료 '간단'이 샤워실에서 벌거벗은 동료들에게 몰매를 맞는 상황과 주인공이 예전에 묘지에서 경험한 꽃의 이미지가 뒤섞이는 장면은 '플라워스'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몰매를 맞는 '간단'과 그를 쳐다보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메마르고 거친 감정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속도감 있고 선명한 영상을 만들어 낸다.
'마리코를 생각하면, 어쩔 땐 갑자기 힘이 빠진다. 그건 다른 누구와 같이 있어도 맛볼 수 없는 이상한 느낌으로, 궤도를 이탈한 인공위성의, 그 미련 없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마리코는 내게도 변화를 요구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뛰어올라 창공을 날아다니라고. 하지만, 나는 만약 그렇게 하면 심해에 피어 오르는 기포처럼 끝 모르고 떠다니다 결국엔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주인공은 '꽃에는 제 나름의 성정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꽃의 수만큼 사람에겐 감정이 있다.'고 말한 할머니의 말과, '궤도를 이탈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마리코, '심해에 피어 오르는 기포처럼 끝 모르고 떠다니다 결국엔 산산이 부서져버린' 간단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고 외줄을 탄다.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리고 싶은 바로 내 자신의 안쓰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줄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기포가 되어 부서져버리든, 궤도를 이탈하는 인공위성이든, 아니면 꽃의 성정이 잘 살아나도록 꽂힌 꽃꽂이 작품이든 결국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모습을 선택할지는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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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쾌하며 동시에 음침했다니 관심이 가는군요.^^

2004-09-02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9-0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님도 읽어보세요. 맘에 드실 것 같은데..^^
속삭인님, 님 날아가버린 긴 코멘 궁금해요.. 아, 이제 치과 갔다가 노란 약 타러 가야 해요..ㅠ.ㅜ 이 땡볕에 말이죠.. 으허~~

2004-09-02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