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언젠가부터 생기기 시작한 버릇은 이책 저책 집적거리는 것..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하고 궁금한 책들을 집어 표지를 넘기고 속지를 넘기다 중간쯤 배를 갈라놓고는
침대맡에 계속 쌓아두는 것.. 맘먹고 치워보지만 다시 반복되던 버릇..
그 질긴 버릇을 없애보려고 시간을 정해 읽기도 하고 한 권만을 고집하기도 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던..
허나, 이 책.. 어제 몇 시간과 오늘 하루를 꼬박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게 만든
압도적인 힘으로 웃게 만든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겉표지 날개를 차지하고 선한, 어찌보면 느끼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이 아저씨에게 홈빡 빠져들다..
처음 몇 장은 워밍업.. 뭐야, 뭐야 하며 읽다가 점차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고 주석들을 휙휙 넘겨보고..
쿡쿡.. 하다가 기어이 '금요일 - 승리의 그날까지'의 장에 다다르면 푸하하! 하고 통쾌한 웃음을 날리며,
함께 이 즐거움을 같이 할 사람이 당장 옆에 없음을 심히 안타깝게 만드는 책..
'일요일 - 사색의 시간'의 장을 지나 '묻는 사람은 없어도 나는 답한다' 장에 이르면 이 대머리 아저씨의 인생관에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호어스트는 금요일 펑펑 남는 오후에 자아가 분열되어 한번쯤 멀리 뛰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정신차려팀'의 창문을 닦으라는 말과, 뒹구는 신발을 구석으로 밀어놓는 일 정도에서 시작하자는 '맥빠져팀'의 말을 듣고는 소뇌경기장에서 시합을 벌인다. 결국.. 막강불패 '맥빠져팀'의 신화적인 승리로 다시 조용한 일상의 평화로움을 찾는다.. 이 단 하나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금요일 - 승리의 그날까지..
 
아..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금요일처럼 살 수는 있다.
맘만 먹는다면.. 조금만 욕심의 수위를 조절한다면.
친구가 좀 배신하면 어떤가. 나도 가볍게 배신해 주면 되지. 식당칸에서 시끄럽게 전화를 거는 승객이 있으면 어떤가. 가짜 전화를 걸어 멀리 산속으로 유배를 보내버리면 그만이지. 새벽 6시에 세탁기를 돌리다 이웃들에게 혼쭐이 나면 어떤가. 그 이웃들 무리에 섞여 옆집 문을 두드리면 그만이지..

그는 세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해 발끈거리며 분노하고 얼굴을 붉히는 우리들에게
뭐, 어때. 주말이 코앞이잖아, 화도 적당히 내라구.. 항상 금요일처럼 살자구?, 하며 어깨를 토닥거린다.
그 툭 튀어나온 눈의 어설픈 미소와 따뜻한 말들은
얼굴붉히던 분노를 사그라들게 하고 적잖은 위로를 준다.
지친 몸을 잠시라도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자신이 가려는 길 앞에 서서 갸우뚱거리고 있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아픈 생채기를 남겼다면,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에게서 그 사람 모르게 상처를 받았다면,
아, 삶은 왜이리 힘든거야.. 라고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싶다면
그저 반나절만이라도,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를 가는 동안만이라도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쿡쿠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지금 어깨를 짓누르는 것들에게 허허.. 하는 웃음을 지으며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리라.
어딘가에서 본 글귀처럼 어정쩡한 것이야 말로 살아있다는 증거!

마지막으로 본문에 절대 뒤지지 않는 찾아보기 몇 가지를 소개하면,
기프호른 - 니더작센 주의 도시, 정말 있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그 자의 인생도 언제나 금요일만은 아니었음
모던 토킹 - 팝 음악의 에드 우드
스페인 - 남프랑스로 가려던 사람이 여기까지 갔다면 너무 많이 달린 것. 그 경우만 아니라면 정말 아름다운 곳.
프라하 - 이곳의 봄은 세계적으로 유명함
아메리카 - 두 개의 대륙, 심지어 세 개라는 사람도 간혹 있음
미국 - 설명할 방법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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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7-0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석이 뒤에 붙을 것이 아니라, 해당 페이지 아래에 들어갔더라면 더욱 재미났을거란 생각을 했었어요.. ^^

superfrog 2004-07-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생각 많이 했더랍니다.. 그게 그렇게 제작상 힘든 작업인가 하고 말이죠..
헌데 그리 골치 아픈 주석이 아니라서 그냥 너그럽게.. 호어스트처럼 넘겼다죠..^^

hanicare 2004-07-09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어긋남에 너무 마음 삐끗하지 않기.사소한 마음 저울질에서 한눈팔기.사소한 분노에 전인격을 드러내지 말기.멋진 어른이 된다는 건 사랑스런 아이가 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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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크린톤 한 조각 쓰이지 않은, 굵은 선과 가는 펜선만으로, 먹색과 흰색만으로 이루어진 이 만화는 현실의 신체와 접촉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신체이거나 타인의 신체일 수도 있다. 기분좋은 접촉일 수도 있고, 부적절한 접촉이기도 하다. 연인과의 관계이며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이기도 하다. 정도와 영향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경험들, 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갖는 찜찜한 기분은 쉽게 털어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이 타인에 의해 공개돼 버린 듯한 당혹스러움,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들을 굳이 끄집어 내 조각을 맞춰 놓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이기보다는 좀더 본질에 가까이 가서 읽는 이가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은밀함은 관계 맺는 사람들 간의 진솔한 대화로 교류되어야 한다'고. 사실 '당신들이 그렇게 숨기려던 것, 사실은 별것 아닌 것들'이라고. 그래, 그런 것쯤 별것 아니다. 콘돔으로 풍선을 부는 아이가 큰 비밀을 알아버린 것도 아니고 살찐 누드모델은 중세에 가면 미인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며 인절미처럼 늘어진 뱃살을 기꺼이 정겨운 눈으로 봐주는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말로 형상화된 드러난 비밀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며 새로운 관계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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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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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숱한 호평들을 듣고 뒤늦게 접하는 영화는 다분히 실망스럽다. 다 보고 나서 영화관 문을 나서며 '뭐야, 별거 아니잖아!'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반면 아무런 평도 없이 또는 악평을 극복하고 본 영화는 의외의 만족스러움을 주기도 하는데 두 경우 모두 기대치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가 아닌가 한다. 상반기 만화계에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는 만화가 최규석의 등장이고 단행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의 발간일 것이다. 하지만 기대치가 너무 컸던 것일까. 호평들을 등에 업고 읽은 <공룡 둘리..>는 만족스러움보다는 실망이 더하다. 많은 제작비를 들였음이 분명한 질좋은 종이에 잘 인쇄된 책이건만 동인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편집상의 숱한 오류들은 책을 읽는 내내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고 '사랑은 단백질'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펜선과 컷분할, 연출력 등에서 아직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면죄부와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음악 전문 사이트 <가슴>에 한 인디밴드를 소개하는 글에서 '현재 한국의 사회적인 상황이나 우리들(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고, 그렇다면 노래에서도 사랑이나 자잘한 일상을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안에 내재된 끝 모를 분노와 절망감, 상실감을 표출하는 것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현재 우리의 갈망을 얘기하는 '살아 있는 음악'으로서 대중음악을 규정한다면 말이다.'라는 말과 함께 '그렇다고 모든 뮤지션들이 다 그런 노래를 만들라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뮤지션들이 이리도 한국에는 별로 없느냐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며 살아가는 곳은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라고 덧붙인다. 이 말은 만화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은 연애 문제 말고는 고민이 없는 중산층 집안의 여고생이 다가 아니며 죽고 죽이며 칼싸움을 해야 하는 무협시대도 아니다. 그럼에도 주독자층이라고 여겨지는 여학생의 기호에 맞춰 가로세로 몇 개의 선으로 배경을 처리해 버린 채 머쉬맬로 같은 달콤한 분위기만을 뚝뚝 떨어뜨리는 학원물과, 남학생의 기호에 맞는 허무맹랑한 무협물과 판타지가 대부분이다. 말그대로 한국의 사회는 불특정의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며 살아가는 곳이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규석은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처럼 '현재 우리의 갈망을 얘기하는 살아 있는' 만화를 그리려는 시선을 갖고 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왜곡되지 않았으며 보기 편한 곳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들여다보기 불편한 부분을 헤집고 드러내며 그속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사실 이전에도 메이저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한 동류인 작품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또한 훨씬 이전에 지면을 탔고 새롭게 김혜린의 단편집 <노래하는 돌>에 실린 '11월의 초상'과 '우리들의 성모님'은 같은 맥락을 걷고 있다. 단지 김혜린이 '순정만화 작가'라는 억울한 굴레로 인해 다양한 독자층을 얻지 못한 반면 <공룡 둘리..>는 그만의 색을 낼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끄러운 펜선이 아닌 거친 연필선의 뎃생이, 박광수의 여타 작들에서 볼 수 있는  곱디 고운 색이 아닌 채도 낮은 색들이 주를 이루는 최규석의 작품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 어쨌거나 주목을 받고 있고 책이 팔리고 있다는 점은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만든다.

이제 처음의 기대치를 털어버리고 맨눈으로 그의 작품을 대한 후 갖게 되는 새로운 기대는, 신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무딘 칼날의 비평에서 제대로 벗어나는 것이다. 풋풋한 딱지를 떼고 나서 맞게 되는 날선 칼날의 힘에도 단단하고 견고하게 버텨내기를 바란다. '막일로 단련된 근육질 마냥 투박하고 탄탄한' 그의 시선이 흐물거리는 시선이 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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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나는 접니다.

superfrog 2004-06-2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황송..^^

다연엉가 2004-06-2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노래하는 돌의 대여는 한 번도 되지 않을 만큼 한국 사회의 만화는 패*애* 처럼 소녀와 소년들의 야시꼴리한 엉덩이를 들추는 일본만화의 번역과 돈 벌이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다는 느낌이 금붕어님도 드는지요. 이제는 19세 대여불가의 의미가 없어질 만큼 치닫고 있는 만화시장에서......(궁시렁 궁시렁 뭔 말을 한는거지...)
나도 추천 한방 날리고 가오.^^^^

다연엉가 2004-06-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번에 리뷰선정은 공룡 둘리에 대한 오마주에서 뽑혔으면 싶는데 알리딘팀은 내 말을 듣고 있는감^^^^^(그러면 울 차력당이 떡을 돌리지 싶는데(헤헤헤)

superfrog 2004-06-20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타리님.. 있잖아요.. 저는요, 엉터리 우리나라 만화보다는 전문적인 부분을 치밀하게 다룬 완성도 높은 일본만화를 더 좋아해요..;; 그런 전문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프라가 우리나라 만화계에 없다는 점이 분명 안타까운 점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그런 열악함을 견뎌낸 작가들이 너무나 존경스럽지만, 대부분의 우리 작가들은 쉽게 편안한 길을 택하는 상황이 슬플 따름입니다..

다연엉가 2004-06-2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금붕어님 요즘 중학생이 읽는 일본만화가 들추기만 하면 놀래 자빠질 내용들이 난무한느지라...... 그런것들을 대부분 많이 빌려갈려고 하고 선호하지만 정말로 일본만화중에서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손도 안댈려고 해서 .... 지가 그냥 속이 팍 상합니다. 좋은 만화가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울 나라의 만화가 갈수록 볼 것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는 마당에 ..오 !!!!통재라입니다..
일요일 뭐하는교^^^^^

superfrog 2004-06-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쵸.. 그게 문제죠.. 손가락 발가락 끝만 간지럽히는 만화들만 쉽게 읽히고. 그저 완성도 높은 작품은 사서 소장하나보다,라고 믿어야죠..^^;; 죄송스럽지만 우리나라 좋은 작가들이 좀더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죠..^^

alpachino 2004-06-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에는 문외한이나 추천 꾹....
만화라면 유리가면이 최고의 명작인줄로만 알고 있는 내가 한 추천....

sayonara 2004-09-0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곱번째 추천은 접니다.
일본만화의 전문성과 내공은 정말 대단하죠.
'마스터 키튼'의 작가는 북유럽의 초콜렛 포장지까지 꼼꼼하게 고증할 정도였다는데, 그런 치열한 작가정신이 부럽습니다.

superfrog 2004-09-0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사요나라님,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완성도 높은 만화가 나와줘야 할 텐데 말이죠..ㅎㅎ

미완성 2005-10-2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흣, 이 리뷰에 내가 추천을 했던가? 싶어 눌러보니, 추천이 되네요! 뭐야뭐야 금붕어님 리뷰를 내가 못 봤을 리가 없다구 하고 보니; 서재질에 입문하기 전의 글이구만요. 새삼 추천. 이 리뷰를 읽고 나니 로드무비님께 받은 '나른한 오후'가 생각나네요. 너무 처절한 현실이라, 제겐 공포로 다가왔었죠. (마치 오늘 잠깐 본 '장밋빛 인생'에서의 물건 집어던지기, 접시 깨뜨리기, 신들린 듯 악쓰기를 한꺼번에 현란하게 보여준 최진실의 모습처럼;) 어렵네요. 음식에서나 책에서나..어디서나, 설탕에 너무 많이 중독되었나봐요.
 
여성의 몸 여성의 나이 또하나의 문화 16
또하나의문화 편집부 엮음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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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열면 맨 처음 다섯 개의 연작 사진을 볼 수 있다. 포즈가 조금씩 다른 벌거벗은 중년의 여성 얼굴 위에 순서대로 활짝 핀 노란 장미와 다리미, 반을 가른 사과, 커다란 물주전자, 그리고 약간 시든 노란 장미가 각각 포개져 있다. 여성의 몸은 유방과 배가 늘어져 있으며 팔과 다리에는 군살이 붙고 배에는 자글자글 주름도 있다.

'인간적 삶의 양식을 담은 대안적 문화를 만들고 실천하는'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펴낸 동인지 제 16호인 이 책은 여성의 몸과 여성의 나이, 여성의 성을 다룬 책이다. 얼마 전 티비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겪던 한 여성이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쫓겨나면서 버려둔 자식 셋을 칠십을 넘긴 지금에 와서 찾는 장면을 봤다. 처음에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환영받지 못하는 딸에서 출발하여 집사람으로, 며느리로, 아이의 엄마로 끊임없이 가족에 소속되어 원치 않는 특정한 임무와 희생을 부여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시대에 며느리는 시아버지에 있어 다 자란 아들의 성적인 대상이며 일손을 하나라도 더 낳아줄 암컷일 뿐이었다. 모든 분노와 노여움, 증오 등의 감정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손쉬운 대상이며 또한 쉽게 다른 암컷으로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 정도로 여겨졌다. 이제 야만적인 시대는 갔다고 해도 여전히 거개의 여성들은 결혼에 뒤따르는 주부와 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중압감, 오로지 아기엄마에게만 집중되는 육아의 의무, 생계의 책임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굴레를 짊어지고 신음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성의 몸 자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더불어 이처럼 연령에 따라 여성이 사회에서 갖는 역할을 구분짓고, 그 안에서 각자가 선택한 생활 방식에 따른 다른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여성 자신이 자신의 몸을 체험하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열등하거나 혹은 성의 대상으로만 다뤄지는 잘못된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을 드러내면서 남성 중심적 근대의 기획을 비판하고 몸의 체험을 언어화하는 것이 세상 바꾸기의 첫걸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십대와 이십대의 여성의 몸을 다룬 장 중 '몸과의 화해'는 사춘기 때의 경험으로 왜곡된 성의식을 지니게 된 여성이 성장하며 음란한 상상과 절대무감의 시간 등을 거치면서 자신의 성의식을 자리잡아 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필자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성찰하는 데 집착하다가 몸과의 화해를 통해 하나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한걸음 앞으로 나간다.

...물론 그 애가 "쾌락주의"라는 뜻은 아니다. 나른하게 밀려오는 잠에 솔솔 곯아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건강함이란 이런 것이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느낌을 과장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표현하는 것, 아무런 터부를 갖지 않는 것, 단 하나의 터부는 "폭력"과 "무배려"일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눈물나게 부러워하면서 내 경험의 한 국면을 건너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으며, 외부의 온갖 자극과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날것의 감정과 반응을 힘겹게 여과하며 견뎌내고, 소리 없이 변화해 가는, 하루하루 시간에 적응해 가는 육체로서의 내 몸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경이롭게 느껴진다. 힘겨워 하지 말라고, 가끔은 쉬어가도 된다고, 너는 훌륭하다고 내 몸에게 토닥이며 속삭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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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6-18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몸을 보고 제일 처음 감동했던 것이 <낮은 목소리>를 보고였어요.. 영화 마지막에서 할머니의 벗은 몸을 흑백(흑백이 맞았나.. 기억이 가물가물;;)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거보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자신의 몸에 대해 당당해지고 토닥거려줄지도 알아야하는데... 너무 막;; 굴리는 듯...

요즘은 가끔 스스로를 꼬옥 안아주려고 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여가면 되겠죠. 다리 좀 짧고 배 좀 나왔으면 어떻습니까... 님의 표현대로 "외부의 온갖 자극과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날것의 감정과 반응을 힘겹게 여과하며 견뎌내고, 소리 없이 변화해 가는, 하루하루 시간에 적응해 가는 육체로서의 내 몸"인데요. ^^

superfrog 2004-06-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특한 내 몸이니 맛난 것도 주고,
맛난 술도(^^;;) 먹이고,
달디단 잠도 재우고,
재밌는 만화도 읽게 하고,
즐거운 일도 많이 많이 시키렵니다..
가끔 날잡아 토닥여 주고 안아 줍시다..^^

참 어제 당산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딱 변영주 감독 덩치로 머리는 자연스럽게 헝클어지고 목과 소매끝이 해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봤는데-앞모습은 확인을 끝까지 못했어요;;-그냥 멋대로 변영주 감독이라 믿고 혼자 반가워했어요..^^;;

2004-06-18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6-1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근소근님, 행간의 의미를 잘 알겠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에요.. 슬며시 낯부끄럽습니다..

alpachino 2004-06-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문에서 나온 책은 나에게도 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주었었다.
예전 또문 책과는 다르게 표지조차 이쁘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반가웠던 책.
예전 책들은 편집자의 눈으로 보면 좀 보여짐이라는 부분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려웠었지.
 
러버스 키스 2 - 완결
요시다 아키미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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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시선처럼 가슴아픈 사랑은 없다. 한 남자와 여자가 있고 둘은 사랑한다. 그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고 그 남자를 바라보는 또다른 남자가 있다. 여자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를 바라보는 또다른 여자가 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은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을 알 수 없지만 그 둘을 쳐다보는 시선들은 다 어긋나 있다. 여섯 명의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엇갈린 사랑을 한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상대를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시에 그(녀) 자신도 누군가를 바라봐 주지 않는 대상이 된다. 요시다 아키미의 '러버스 키스'는 이런 어긋난 시선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긋난 사랑에 그다지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비록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지만 자신의 시선 끝에 그 사람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하고 자신의 사랑을, 상대의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전작 '바나나 피쉬'와 '야차'에서 보여준 영화 같은 스케일과 비현실적인 영웅과는 달리 요시다 아키미는 '러버스 키스'에서 성장하는 젊음의 감정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맹목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젊음, 현실을 재지 않고, 주변을 계산하지 않는 그 감정은 또한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져지고 견고해져서 한 사람의 강한 성인을 만드는 데 든든한 토대가 된다. 그리하여 세상과 사람과 감정에 온몸으로 이리저리 부딪쳤던 그때의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다볼 수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젊음이란 그런 거야. 젊음은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하지만 몸은 언제나 버텨 내."  

'러버스 키스'의 여섯 명의 젊음은 그들의 힘든 사랑을 훌륭하게 버텨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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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6-0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장 인물 모두가.. 참 예쁘죠. ^^

superfrog 2004-06-0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정신없이 봤다가 다시 보니 또다른 재미가 있더군요.. 님 말씀대로 때묻을까 조심조심..^^

nrim 2004-06-08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공사는 정말이지 책 표지 정책을 바꾸어야 해요... 이쁘고 느낌이 좋긴 하지만 보기에 불편하니 특히 여름에는 더욱더 조심을.. 에휴.. 빨리 비닐 씌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