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패신저 + 스텔라 마리스 - 전2권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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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응급 가방에서 꺼낸 회색 구조용 담요로 몸을 감싸고 앉아 뜨거운 차를 마셨다. 주위에서 거무스름한 바다가 찰싹였다.

백 야드 떨어진 곳에 멈춘 해안 경비대 보트가 항해등을 켠 채 큰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너머 북쪽으로 십 마일 떨어진 곳에는 둑길을 따라 움직이는 트럭의 불빛이 보였다.]

-코맥 매카시의 <패신저> 중에서


1980년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 출신 인양 잠수부로 살아가는 서른 일곱 살 보비 웨스턴

그는 돈만 받으면 바닷 속으로 뛰어들어 '무엇이든'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어느 새벽 , 멕시코만 수중에 추락한 비행기를 탐색해 달라는 급한 의뢰를 받은 ‘인양 잠수부’ 보비 웨스턴은 친구 오일리와 함께 수색하는 작업에 뛰어든다.


[웨스턴은 장갑을 꼈다. 조사등의 하얀 빛줄기가 물 위를 내달리다 돌아오더니 이윽고 깜깜해졌다. 그는 벨트를 두르고 고리를 걸고 나서 조절기를 입에 넣고 마스크를 내린 다음 물로 걸어 들어갔다.

밑에서 이따금 확 타오르는 토치 불빛을 향해 어둠을 뚫고 천천히 내려갔다.

묵주 같은 리벳들, 토치가 다시 불을 밝혔다. 동체의 형태는 터널처럼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졌다. 그는 발 장구를 쳐 터보팬 엔진들을 담고 있는 거대한 엔진실들을 지난 다음 동체 옆면을 따라 내려가 빛의 웅덩이 안으로 들어섰다.]


인양 잠수부 웨스턴은 부서진 비행기 운전석에서 여전히 좌석에 벨트를 맨 채 거대한 꼭두각시처럼 사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머리 위 천장에 등을 붙인 채 심해 속을 둥둥 유영하고 있는 부조종사와 조종사 시신을 발견한다.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걸 확인한 웨스턴은 탑승객 일곱 명의 시신을 차례 차례 물 밖으로 끌어 올리고 마지막 수색작업을 펼치던 중 비행기 내부엔 수상하게도 조종사의 운항 가방과 블랙박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사히 인양 작업을 마친 웨스턴과 친구 오일리는 뉴스 어디에서도 비행기 추락 사고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고 그 날 밤 비행기가 바닷 속으로 추락했던 시기에 어부 몇 명을 제외하고 물 밖에서 목격한 이들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색 당일 저녁. 보비 웨스턴 집에 선교사 같은 정장을 입은 형사 두 명이 찾아와 그에게 블랙박스 행방과 승객 한 명의 실종에 대해 캐묻지만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보비는 모호한 답변으로 이들의 심문을 넘어간다.

보비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몇 주에 걸쳐 집안 곳곳에 누군가가 몰래 침입해서 수색한 사실을 알고 부터 그는 이 비행기 추락 사건에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걸 직감한다.

며칠 뒤 함께 비행기를 수색 작업을 했던 친구 오일러가 베네수엘라로 일하러 갔다가 의문의 사망을 하면서 사건에 대한 의혹은 커져 만 간다.

그리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순간을 봤다는 그 어부들의 행방도 묘연 해지고 시신을 찾는 가족도 없고,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던 승객 아홉 명(조종사 부조종사를 포함해서)들은 이미 사망했었던 것일까?

실체 없는 죽음을 목격한 웨스턴은 인양 잠수부 일을 사뭇 주저 하면서도 어둠의 바닷 속, 심연 깊숙이 자리 잡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비 웨스턴, 한 때는 전도 유망한 물리학도였던 그에겐 조현병을 앓다 10년 전 스무 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여동생 얼리샤가 있었다.

여동생 얼리샤는 십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가 스무살에 시카고 대학원에 입학한 천재로 웨스턴 남매의 아버지는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원자폭탄 개발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학자로 핵심 멤버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다.

종전 후 남매의 아버지는 수소폭탄 개발을 주도한 텔러와 함께 숱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고 원폭으로 희생된 무고한 생명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회와 격리된 삶을 살다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곳은 그녀 삶의 마지막 해 겨울의 시카고일 것이다.

일주일 뒤면 그녀는 스텔라 마리스로 돌아가

거기에서 정처 없이 걷다가 황량한 위스콘신 숲으로 들어간다.


10대 때부터 편집성 조현병을 앓아온 얼리샤는 증세가 심각해 질 무렵부터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키드’라 불리는 난쟁이와 쉼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키드'는 콧구멍의 털과 귓구멍 안 생김새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생생한 모습이지만 세상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허상의 존재다.

명망 있는 화학자 였던 할아버지, 원자 폭탄 개발에 참여 해서 2차 대전 종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한 수학자 아버지를 두었던 얼리샤에게 이 세상은 인간이 의식하고 있는 것들 모든 것이 실재 하지 않는다.

열 두 살 때부터 환각을 경험한 얼리샤를 진단한 담당의사는조현병이라 진단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난쟁이 '키드'에게 오빠 보비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연작 형식의 소설 1권 ‘패신저’는 현 시점의 보비 웨스턴의 어제와 오늘의 시간이 서술 되어 있고 2권 ‘스텔라 마리스’는 자살하기 전 여동생 얼리샤의 어제와 오늘의 시간 동안 담당 의사와 면담 형식을 기록한 보고서로 구성되어 있다.


1권 <패신저>의 주인공 보비 웨스턴은 마치 사방으로 충돌하는 원자의 입자처럼, 카페에서, 모텔 카운터에서, 연고 없는 마을의 작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다 만난 사람들과 묻고 답하며 과거의 시간을 회상한다.

이 작품을 처음 읽게 되면 1권 패신저의 추락한 비행기와 그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 속에서 웨스턴 남매의 지나가 버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하지만 두 번째로 1권과 2권의 책을 나란히 펼쳐 놓고 번갈아 읽는 동안 이들이 선문답 처럼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신과 종교.인간, 죽음, 우주의 시간이 20세기 현대 역사와 촘촘하게 맞물려 진행 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의 시간은 선형적이게 흘러가지 않고 점진적이게 중추적인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1972년 위스콘신주의 정신과 치료시설 '스텔라 마리스'를 제 발로 찾아간 얼리샤가 정신과 의사 닥터 코언과 7차례 나눈 상담 녹취록으로 구성된 제 2권 <스텔라 마리스>에서 얼리샤는 오빠 보비와 외부인들에게 절대로 들켜서는 안되는 금지된 사랑을 털어 놓는다.

오빠 보비는 여동생과의 사랑에서 벗어나려고 심해 잠수부 인양 작업을 하며 포물러 원 경주 선수로 살다 자동차 사고 이후 혼수 상태에 빠져 뇌사 판정을 받았다.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오빠 보비의 숨을 거둘 권한은 여동생 얼리샤에게 있다.

한편, ‘스텔라 마리스’ 병원에 있는 얼리샤는 “오빠 없이 살아 있는 것보다 오빠와 함께 죽는 게 낫다”는 말을 하지만 보비의 뇌사판정이 얼리샤의 환각 증세로 인한 망상인지 작가 코맥 매카시는 소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다만,오빠와 금지된 사랑의 중압감에 시달렸던 얼리샤가 겨울 숲을 홀로 찾아가 스스로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건 수식으로 전개되는 서사를 사랑하며 일찌감치 방정식들이 생명이 유지되는 어떤 형식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눈앞에 실재하고 있다는 걸 이해 했기 때문이다.

정신적 문제를 겪으면서 세상의 절대적 진리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수학에서 구원을 얻고자 했던 얼리샤가 어떤 방정식으로도 진리에 결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고 만다.


“하나의 공허 뒤에 또 하나의 공허이고 그게 본질이야.

 그냥 하나가 아니야. 좋은 책에서 말하는 것 하고는 달라. 

너는 공허가 그냥 공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계속돼.”


얼리샤의 환각 증세를 분석하는 담당의사 코언은 환자 얼리샤에게 절대적이였던 것이었다가 절망을 안겨준 수학과 사랑하는 친오빠 보비 그리고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는 핵폭탄 개발에 참여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서 마침내 그녀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떠나려는 오빠 보비를 발견하게 된다.


“슬픔은 삶의 재료야. 슬픔이 없는 삶은 아예 삶이 아니지. 하지만 후회는 감옥이야. 네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너의 일부가 더는 찾을 수도 그렇다고 절대 잊을 수도 없는 어떤 교차로에 영원히 꽂혀 있는 거야.”

미국 현대소설의 거장 코맥 매카시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 작품에 대해 뉴욕 타임즈의 한 서평 기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향후 150년간 전도서처럼 작가들이 훔쳐 자기 책의 서문으로 쓸, 웃기고 이상하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2022년 나는 이 두 작품이 한 번에 출간 되자마자 읽었다.


1권 '패신저'를 꾸역 꾸역 읽고 나서 2권 '스텔라 마리스'를 완독하고 다시 1권으로 돌아 갔다.

1권에서 주인공 보비가 여러 인물들과 주고 받는 대화들의 주요 핵심 단어들을 체크 하고 나서 성경 책을 꺼내 놓고 오펜하이머 자서전,오펜하이머 연설문집, 편지 모음집, 기타 맨해튼 원자 폭탄 프로그램에 참여 했던 핵심 맴버들에 관한 책과 그들의 삶을 다룬 자서전과 미국 현대사(1960년대 이후/케네디 형제의 죽음을 다룬 책과 다큐멘터리/케네디 형제를 살해한 배우 세력에 관한 책들 ) 전부 찾아 읽었다.


1년의 시간 동안 곁 가지로 뻗어나간 책과 지식을 쌓고 나서 2023년 12월, 마침내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 책을 처음 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물 위에 둥둥 뜬 코르크, 유릿 조각, 유목,

작은 곶 너머로 대리석 조각 같은 돌들이 해변을 따라 달그락 거리고

파도가 길게 부글 거리며 물러나고 있다.

오랜 세월 지칠 줄 모르고 해협 건너 간신히 보이는 베드라의 바위 요새,

빗속에 시커먼 돌, 첨탑들..



1933년생인 코맥 매카시는 89세로 생을 마감하기 2년 전에 유작처럼 출간한 이 두 작품을 지난 15년의 시간에 걸쳐서 완성했다.

미국에서 현존하는 작가들 중에서 단 3명의 작가의 작품만 편집자들의 수정이나 조언을 거치지 않는다.

돈 드릴로, 폴 오스터 그리고 코맥 매카시 이 세 명의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원고를 넘겨주는 즉시,오탈자만 검열하고 편집 작업에 들어간다.

코맥 매카시의 마지막 출판을 담당했던 편집자들은 그가 몇 달에 걸쳐서 원고 뭉치를 건네며 반드시 비밀을 유지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말을 했다.

코맥은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원자 폭탄 개발이 이루워 졌던 뉴멕시코 주의 로스 앨러모스에 장기간 거주 하며 미국 현대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역사적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철저한 자료 조사를 했다.

케네디 가문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잊혀진 첫째 달 로즈 마리 케네디가 입원했던 <스텔라 마리스> 병원까지 조사했던 코맥 매카시는 대학에서 잠시 물리학과 공학을 공부했던 물리학도이자 공학도로 작가의 길을 가겠다는 걸 격렬하게 반대했던 아버지를 벗어나 무일푼으로 미국 전역을 떠돌며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매카시는 실제로 잠수부 인양 작업부일도 했었고 석유 시추 회사에 고용되어 조사원으로도 일 했었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일도 하며 극빈의 삶까지 경험했다.

성공한 변호사를 둔 부유한 집안이였음에도 미래가 전혀 보장 되지 않는 글쟁이 길을 갔던 코맥 매카시에게 글쓰기란 영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인간의 심연 속 그 무엇을 문장으로 끌어 올려 내는 것이였다.

따라서 그의 일련의 작품은 메시아적인 시점으로 선문선답을 주고 받는 대화체들이 마치 누군가의 녹취를 풀어 놓듯 선형적인 구조로 층층이 쌓여져 있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에 나오는 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인 주유소 직원도, 사장도, 술집 종업원도, 모델과 배우 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오펜하이머, 케네디 형제, 재클린 오나시스 그리고 저격수 오스월드, 수 십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FBI국장 에드거 후버 그리고 여러 명의 범죄자들 모두 세상의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원자 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졌을 때 2차 대전의 전쟁은 종전이라는 서류에 도장을 찍었지만 뒤이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연이어 중동의 화약고가 폭발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류는 일초 즉발의 핵 위기까지 인류 문명의 눈부신 기술과 과학 혁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어떤 평화와 전쟁, 폭력을 가져다 주었는지 90년의 세월을 살다간 코맥 매카시는 모든 것이었다가 절망을 안겨준 문명의 혜택이 갈급한 욕망에 사로 잡혀 결국엔 우리 모두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고 만다는 것을 마지막 두 권의 유작을 통해 펼쳐 보인다.

세계 최초로 핵폭탄을 만드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레오 실라르드는 훗날 개발 당시에 자신이 느꼈던 심정을 이렇게 토로 했다.


“1943년과 1944년의 몇 달 동안 우리의 가장 큰 염려는 연합군이 유럽으로 진격하기 전에 독일이 원자폭탄을 완성 하지 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독일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염려가 사라진 1945년에는 우리는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들에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6일, 아인슈타인과 프랑크, 실라르드, 라비노비치는 원자폭탄 사용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어쨌든 8월 15일 나가사키에 폭탄이 떨어졌고 한국은 해방이 되었다.

만일 일본 , 독일이 먼저 핵 개발에 성공 했다면 20세기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을 것이다.

1945년 8월 12일 일본은 이미 한국 동해안의 작은 섬에서 소형 원자폭탄을 실험했다.

미국이 7월 16일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것보다 불과 3주 뒤로 이 핵실험 성공을 미국측이 알고 있었는지 현재까지 어디에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1942년 4월 18일 미국이 일본 본토에 첫 공습을 시작하고 1944년부터 전략 폭격으로 확대해 나가자 일본은 원폭 프로그램을 한국의 흥남으로 옮겨 버렸고, 흥남지역에서 일본군이 원자탄 연구를 계속 수행 하는 동안 소련 잠수함이 흥남항 주변까지 내려 왔다.

만일 1945년 8월 15일 나가사키에 B-29 폭격이 아니었다면, 일본이 먼저 미국 본토에 핵폭탄을 떨어뜨려서 미국을 평화협상에 강제로 끌어 당겨 놓고 영원히 한반도와 동아사이 전체를 집어 삼켰을 것이다.

핵폭탄 성공 후 익명의 플루토늄 폭탄 개발 관계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더 ‘나은’ 이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나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길 바랐고, 그것이 초래할 파괴를 생각하며 몸서리쳤습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종류의 폭탄 역시 예상한 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 복잡한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몹시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은 끔찍한 생각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소련 간첩 혐의를 의심 받은 과학자들은 정식 재판에 회부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정부로 부터 밀착 감시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조국을 배신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아버지가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의 자식들은 이웃들로부터 불신과 기피 대상이 되었고 학계에 유배 되거나 학계에서 밀려난 채 거의 추방 선고 형을 받은 삶을 살았다.

자살하거나 병들거나 아니면 침묵을 지켜야만 했던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고 온 비극이였지만 극단의 폭력으로 동아시아는 물론 인류 전체를 전쟁의 광풍으로 휩쓸어 넣어 버렸던 일본의 폭주를 멈추게 할 수 밖에 없는 건 원자 폭탄 뿐 이였다.

일본에 몇 몇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마침내 전범 국가에게 짓밟혔던 국가의 국민들이 겪었던 끔찍하고 참담했던  고통은 끝이 나버렸지만 원자 물리학의 모순적인 테이터 통계로도  극단의 상황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이 세상은 마음만 먹으면 핵을 가진 국가는 버튼을 누를 수 있고 그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가 존재 했던 세상은 무너져 버린다.

20세기 중반 현대 물리학이 바꾸어 놓은 세상의 질서가 모든 인류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 넣었다.


보비 웨스턴은 10년 전 세상을 떠난 동생이 문득 생각 나서 그녀의 사진을 찾지만 찾지 못한다.

아니 도저히 먼지가 쌓인 앨범에 있는 앳된 모습의 여동생 얼리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다.

어둠에 쌓여 있는 바닷 속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보비 웨스턴

마침내 자신의 두 손을 오므려서 마지막 순간을 밝혀주는 불을 스스로 꺼버린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며 옷과 먹을 것을 주는 건 사람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인간 뿐 이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이 여러 명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이들 중 누군가는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고 있을 것이고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이들도 있다.

집단적 슬픔, 집단적 폭력, 집단적 적개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고 '우리'라는 집단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전쟁과 폭력 앞에서는 '영원한 화해'도 '영원한 용서'도 없다.

20세기 초에 이르자 마침내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모든 것을 수학으로 계산 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단지 우주가 완전한 어둠과 정적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진화 하는 동안 진행된 방식이 인류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소리 없이 폭발하는 별들, 혜성들, 지나가는 유성들 모두 인간의 문명으로 설명하고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우주라는 공간은 끝도 없이 펼쳐지며 어떤 생명체가 목격하거나 실재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했다.

작가 코맥 매카시도 마지막 두 권의 책에서 불확실한 세상을 문학적 언어로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했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자의 명령을 믿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하나요?


1962년 4월 케네디 대통령은 오펜하이머를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하는 백악관 만찬 행사에 초청에 비공식 청문회로 실추된 그의 명예와 자존심을 세워 주고 다음 해 봄 공직에서 국가에게 공헌한 이들에게 주는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여 하고 5만 달러의 상금을 준다.(1963년 11월 22일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에서 퍼레이드를 행사를 하던 중 오후 12시 30분, 딜리 플라자를 지나던 케네디 대통령의 차량에 보관 창고 건물 6층에서 리 하비 오스월드가 총 3발이 케네디 대통령의 목을 관통하였고 목을 잡고 고통을 호소하다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보는 앞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해서 당시 부통령이였던 린든이 대통령직에 올라가자마자 오펜하이머에게 상을 수여했다. 몇 주 후 재클린 케네디가 개인 면담을 통해 생전 남편이 오펜하이머를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걸 무척 자랑스러워했다는 말을 전달했다.)

오펜하이머는 당시 이 시상식 자리에서 이런 연설을 남겼다.


“과학을 하는 사람과 예술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항상 불가사의에 둘러싸인 채 그 가장자리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의 척도로서, 항상 새로운 것을 익숙한 것과 조화 시키고, 새로운 것과 종합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전체적인 혼란 속에서 부분적인 질서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과 인생에서 스스로를 돕고, 서로를 돕고,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술과 과학의 마을들을 서로와 전체 세계와 연결하는 길을 만들어 진정한 세계적인 공동체의 많고 다양하고 소중한 유대들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쉬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열려 있고 심오한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미적 감각과 그것을 만드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가끔 멀고 이상하고 낯선 장소에서 그것을 보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거대하고 열려 있으며 바람이 세게 몰아치는 세계에서 이것들이 번창하도록 유지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



맨해튼 원자 폭탄 개발에 참여 했던 모든 과학자들도 세상을 떠났고 오펜하이머의 명예를 살려주며 상을 수여한 케네디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고 미국 현대 문학의 거대한 산맥의 봉우리였던 작가 코맥 매카시도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책 패신저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면 노란 장화 한 짝이 벗겨진 상태로 눈 밭에 서있는 엘리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패신저의 마지막 문단에 다다르면 어둠 속에서 죽은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짚자리에 누워 자그만한 소리로 오빠 보비 웨스턴이 미지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작가 코맥 매카시는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범 우주적인 세계관 속에 현실과 환각의 세상을 교차 시키며 삶과 죽음에 관해 자신의 언어로  지상에 마지막 두 권의 이야기를 남겼다.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 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 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

                                                                                -코맥 매카시(193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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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1-08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님. 와♡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원서로 나오자 마자 읽으시고 배후 지식까지 1년간 쌓으신 후 다시 독파하시다니@_@;;; 번역본도 자신이 없어서 아직 주문 못 하고 있는데@_@; 부끄럽고 존경합니다^^

scott 2024-01-08 14:25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을 만한 (시간을 두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폴 오스터의 4321
코맥 매카시의 <패신저>는 21세기 현대 문학 명작에 반열에 올라가 있습니다.
꼭 읽어 보세요 ^^

망고 2024-01-08 14: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오펜하이머 자서전 번역서 벽돌 두께에 기가질려서 언제나 읽게될까 하고 있는데 스콧님은 무려 원서로ㅜㅜ 이 소설을 제대로 잘 읽으려고 곁가지로 저렇게나 많은 방대한 자료들을 함께 읽으셨군요👏👏👏저는 근데 이때까지 이 작가님 소설이 취향인적이 없는데 오펜하이머 자서전 다 읽으면 도전해 봐도 좋을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2024-01-08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장판 2024-01-08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오스터의 4321 은 어떤 삶이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헷갈렸는데
이책 스텔라마리스는 대화형식이라 읽혔지만
와 패신저는 당췌 헤상에 침몰한 배에 들어간 인양부에서 뭐가 일이 일어나나 싶으면 이상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번역이 문제인지
제 이해력이 날이 갈수록 딸리는건가 다시 읽어 보려던 차에 리뷰 글에 이해가 가네요
그놈의 오 하느님에 ㅜ 머리 쥐어 뜯을뻔 했다니까요 ㅋ

2024-01-11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4-01-09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한번 실망했던 코맥 매카시인데 스콧님 리뷰 읽어보니 이 책들 두권 완전 흥미진진하네요~!! 다음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명작이라니 안읽을수가 없겠네요~!!

scott 2024-01-11 11:58   좋아요 1 | URL
실망은 아니고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읽어서
현대사와 과학 철학을 학습 하고 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명작 중에 명작입니다

유명인들이 추천을 안한 이유가
두꺼워서 일지도 ㅋㅋㅋ

demianee 2024-01-10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오랜만이에요! 기억에 남을만한 인용구가 있는 글이네요! 잘읽었습니다 :)

scott 2024-01-11 11:59   좋아요 0 | URL
장문의 댓글이 짧아졌어요 ㅋㅋㅋ

저는 매일 투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데미님 시험은 잘 보셨겠죠(너무 오래전 이지만)
건강하게 행복한 새해, 갑진년 한해 행운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희선 2024-01-12 0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맥 매카시 책 한번도 못 봤군요 이름만 아는 작가... 이 책이 나왔을 때 원서로 보시고 다른 책을 죽 찾아서 보시다니 대단합니다 그런 걸 보고 다시 봤을 때 더 잘 알았을 것 같네요 과학자가 연구하는 걸, 제대로 쓰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것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희선

2024-01-12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