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앵카레가 묻고 페렐만이 답하다 - 푸앵카레상을 향한 100년의 도전과 기이한 천재 수학자 이야기
조지 G. 슈피로 지음, 전대호 옮김, 김인강 감수 / 도솔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접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책도 읽어보자 해서 과감히 선택한 책.
<푸앵카레상을 향한 100년의 도전과 기이한 천재 수학자 이야기>라는 컨셉에 맞게 처음엔 흥미진진하다.
오스카 상을 둘러싼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재미있고 정말 기인처럼 여겨지는 페렐만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런데, 오 마이 거쉬, 딱 거기까지다.
나는 정말로 이 책이 '수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수학자'에 관한 책이라 철썩같이 믿었건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학을 알아야 이해되는 책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 문장에만도 모르는 수학용어들이 줄줄.

"위치의 분석의 관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베티 수들은 닫힌곡면을 특정짓기에 충분할까?"
"k번째 베티 수는 n차원 대상의 k차원 연결성을 나타낸다."
"쌍대성 정리에 따르면, 닫힌 다양체에서 k번째 베티 수와 (n-k)번째 베티 수는 동일하다."

.. 
.....
....... 
털썩.... ㅠㅠ 차라리 아랍어를 해석하라고 하세요.
수열과 집합, 그리고 가까스로 미적분만을 깨우친 나에게 이 책은 문장 자체가 버겁고 난해하다.
그래서 이 문장을 머리를 쥐어짜서 이해하고 넘겨야 하는지,
아니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마음으로 그냥 가볍게 건너뀌어야 하는지 도무지 판단이 안 되는데
한 문단의 대부분이 저런 문장인 경우도 많으니 정말 어째야 할지를 모르겠다.

게다가 상상력만으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부분까지 나와 버린다.
뫼비우스의 띠와 비슷하다는 클라인 병...? 클라인 병이 도대체 뭥미? 
책에서도 나처럼 이해 못하는 수학 젬병인들이 있을까봐 친절히 별표를 달아 설명을 해주긴 했다.

"뫼비우스의 띠아 같이 바깥쪽과 안쪽을 구별할 수 없는 단측곡면의 한 예.
이 병의 양끝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닫혀 있는데도 사실은 열려 있다."


아... 무슨 말이세요. 정말 모르겠어... 하다가 구글 이미지 검색해 보고서야 가까스로 이해.
클라인 병은 이런 거였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진작 그림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잖아 하고 나 혼자 버럭.
하지만 사실 저자는, 클라인 병 따위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테니 뭐 그냥 나 혼자 검색해 보고 맙시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상식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지적 폭력이다.

결국, 2주가 넘게 씨름하다가 절반을 조금 더 읽은 상태에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더 이상 읽는다는 건 시간 잡아먹는 고집이란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지 G. 슈피로 씨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이가 없어서 책읽기를 중단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는데 어려워서 중단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그런데 화학을 전공한 Ryu에겐 이 책이 꽤나 재미있는 모양이다.
해외출장간다며 내 책장에서 서너 권 꺼내가다 카펫 위에 있는 이 책도 발견하곤 냅다 빌려갔는데
그 출장에서 다 못 읽었는지 다음 출장 때도 또 빌려달란다.
괜히 부아가 나서, 나 2010년 되기 전에 이 책 다 읽어야 한다며 안 빌려줘 버렸다.
그러다 Ryu가 읽다 접어둔 페이지를 펴봤는데, 흥, 그럼 그렇지, 거기까지는 나도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 다음부터 완전 사람 잡아먹거든요.
시험삼아 또 한 번 빌려줘봐야겠다. 

참, 알라딘에는 "이 책을 구입한 분들은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라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 보니 정말로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100년의 난제, 푸앵카레 추측은 어떻게 풀렸을까?>, <미지수, 상상의 역사>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오일러 상수, 감마>, <화이트헤드의 수학이란 무엇인가> 등등을 사서 읽으셨다.
내가 살아가는 것과 별개로,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세상도 분명 존재하는구나ㅡ 라는 당연한 진리를 또다시 깨우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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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리더의 치명적 착각
크레이그 히크만 지음, 이주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제일 빈번하게 등장하는 문구는?
"지난 20년간 <포춘>이 선정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XX번이나 이름을 올린 000 는...."

빈 칸에 들어가는 기업의 이름들이 누구나 귀에 박히도록 들어봤음직한 거물들이라
그렇다면, 올해의 가장 존경받는 기업은 어디였었는지 포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찾아봤다.

그랬더니...


1. Apple
2. Berksire Hathaway
3. Toyota Motor
4. Google
5. Johnson & Johnson
6. Procter & Gamble
7. Fedex
7. Southwest Airlines
9. General Electric
10. Microsoft


화려하구나, 화려해!
한국인이라면 슬쩍 궁금해할 삼성의 순위는 50위.
그래서 이 책에 삼성이 인용된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어찌 됐든, 이 책에서 인용한 기업들의 면면이 워낙 화려하고 글로벌한지라
외국인이 쓴 가지계발서이지만 별 위화감 없이 읽힌다. 

그러나 뼛속까지 프리랜서인 나는, 사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
"어디, 나와는 별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책 좀 한 번 읽어볼까" 하는 관망자적 입장이었음을 고백한다.
읽긴 읽겠지만, 리더와는 몇 억 광년쯤 떨어져 있는 나를 설득할 수는 없을 거다- 라는 철벽을 쌓아놓고 있었던 것.

하지만 읽다 보면 생각이 바뀐다.
제목은 <똑똑한 리더의 치명적 착각>이지만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의 치명적 착각>으로 바꿔읽어도 좋을 법하다.
이 말은 곧, 소수의 기업 리더뿐만이 아닌, 일개 평범한 직장인이나,
심지어는 나같은 1인 프리랜서에게도 책의 효용은 충분하다는 것.
리더의 기술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기술과 타인을 설득하는 기술까지 알려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포맷이 너무 단순해 쉬이 지루해진다는 것 정도.
시트콤처럼 외국의 어느 한 회사에서 있을 법한 상황을 보여준 다음,
이같은 상황이 매일매일 벌어지는 "경영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서 리더가 하고 있는 "치명적 착각"이 뭔지 깨우쳐 준 다음,
"성공기업의 시크릿"과 "경영불패의 법칙"을 알려준다.
이렇게 똑같은 포맷이 총 스물다섯 번 반복되니, 나중엔 어느 게 어느 현실이고 어느 게 어느 착각인지
그리고 어느 게 비법인지 이 말이 이 말 같고 그 말이 그 말 같다.

이런 아리송함을 피하려면, 25일에 걸쳐 나눠 읽는 것이 해결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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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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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고 없는 작가의 작품을 전부 읽겠다는 전작주의 다짐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다.
조급한 마음에 몰아서 다 읽어버리면, 그 후 남게 될 텅 빈 시간을 메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6년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의 책도, 그래서 읽기가 더 망설여졌는데...
<미식견문록>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 <문화편력기>도 그렇고, 신간은 계속 쏟아져나오는구나-
물론 그간에 다른 매체에 기고했을 글들을 묶어서 편집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일단 마리 여사의 책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다.

역시나 내용은, 유쾌한 지식여행자인 마리 여사답게 신랄하면서도 따뜻하고 유머가 숨어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언어에 능통한 만큼, 그 둘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몰랐던 문화에 대해 '이게 이런 거란다' 하고 풀어서 말해주는 솜씨도 여전하다(?).
아는 걸 쥐어짜내서 말해준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몸으로 습득한 것들을 조근조근 말해주는 타입이어서
듣는 이도 '잘난 척 하시네'라는 콧방귀 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이런 지식인의 글쓰기 기법, 우리나라 문인 중에도 있던 것 같은데
제일 처음 생각난 건 전혜린.
하지만 그녀가 낸 책은 달랑 에세이 두 권이니 요네하라 마리의 다작과는 조금 다른 것 같고 
그렇다면 이윤기?
그리스신화 쪽으로는 이만한 이야기꾼이 없고, 서구 문화에도 정통하니 얼추 비슷한 느낌이다.
게다가 요네하라 마리와 이윤기 둘 다, 아는 게 너무 흘러넘쳐 어쩌지 못해 책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혜린과 이윤기 모두 번역자라는 점도 공통분모인데...
하지만 뭔가 미진한 구석이 있어 계속 곰곰 생각하다가 번뜩 머리에 들어온 인물은 바로 홍승면!




1927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해 언론 쪽에서 일하면서 미국 스탠퍼드 대학으로 유학도 갔다온 그 시대의 엘리트.
일단 엘리트라는 점에서 교집합 하나 생기고.
명칼럼니스트라는 면에서 그야말로 찰떡같이 착착!

홍승면이 지은 책으로는 <프라하의 가을>, <백미백상>, <잃어버린 혁명> 등이 있는데
내가 가진 건 백미백상 시리즈인 <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와 <꿈을 끼운 샌드위치>.
감히 말하건대, 외국물 조금 먹은 어린 아가씨들이 요즘 너도 나도 내놓는 음식 관련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마리 여사와 마찬가지로, 잘난 체 하는 기색 없이 이런 저런 먹을거리들에 대해 얘기해 주는데
정약전의 자산어보부터 그 시절에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을 미지의 음식까지-
인터넷도 없었을 텐데 이런 방대한 정보는 도대체 어디에서 얻었을까 하는 경이로움마저 드는 책이다.
우리언니가 우체국쇼핑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라디오방송에 매주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 책에서 꽤 많은 정보를 인용해서 원고를 쓰곤 했었다. 인터넷보다 가히 한 수 위라는 얘기.
마리 여사와 홍승면 씨가 만나서 입심 대결, 아니, 필력 대결이라도 한 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둘 다 이 세상에 없으니 나 혼자 상상으로만 할 수 있는 한판승부.

다시 마리 여사 책 얘기로 돌아와서, 이번 신간이 5% 정도 아쉬운 점 하나.
읽으면서 계속 "이런 얘기는 미식견문록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혹은, "이런 얘기는 미녀냐 추녀냐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10번쯤 들었다.
심지어 맨 뒤에는 <프라하 소비에트 소녀들, 그 인생의 궤적>이라는 대담까지 들어가 있으니
<미식견문록>과 <미녀냐 추녀냐>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은 독자에게 상으로 주는 별책부록의 스멜까지....!
다른 책을 다 엮고 난 뒤 자투리로 남는 글들을 모아서 편집했으니 출판하는 쪽에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음식 얘기도 들어있고 통역 얘기도 들어 있고 프라하 얘기도 들어있어서
제목을 <문화편력기>라고 애매하고도 모호하게 지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마리 여사에게 원고를 다시 부탁할 수도 없으니 출판사나 독자나 아쉬운 건 마찬가지. 

이렇게 말해놓고도 나는 마리 여사의 신간이 나오면 또 승냥이처럼 돌변해서 읽을 날만 고대하겠지요.
아껴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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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웨슬리
스테이시 오브라이언 지음, 김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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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면 올빼미지 가면올빼미는 또 뭐야.
오리너구리 같은 건가, 하고 구글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옴마야! 책 표지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역시나 상상과 현실간의 간극은 너무나도 큰 법.

 

하지만 이 가면올빼미에게서 메이플 시럽 향 같기도 하고 버터스카치 향 같기도 한 황홀한 냄새가 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자는 후각에 약하니까.
그래서 아이리스에서 김소연은 이병헌이 타준 버터커피에 껌뻑 넘어갔는지도 모를 일.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스테이시 또한 이 활홀한 체취에 매료되어 쥐가 주식인 동물을 키울 수 있었으리라.
하루에도 몇 마리씩 냉동된 쥐를 꺼내서 전자렌지에 해동해서 휙- 던져주면
통째로 삼키고선 나중에 고양이가 헤어볼을 뱉듯 쥐의 잔해만 동그랗게 뱉어내던 웨슬리.
먹는 게 그 사람을 만든다는데 어떻게 쥐를 먹는 올빼미의 냄새가 황홀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돼지한테도 누린내 나지 말라고 녹차 먹여 키우는 거 아니었나? (웬 삼천포.)
생물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전혀 그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웨슬리는 스테이시가 주는 쥐를 받아먹고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

이 책을 북크로싱해주신 카이님은 마지막 부분에 웨슬리가 스테이시의 품 안에서 고개를 떨구며 죽어가는 장면이 너무나 감동적이라며
손수 책  페이지까지 접어서 주셨는데, 나는 그 전에 나온 둘의 포옹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외로운 스테이시를 위로해 주듯, 침대에 함께 누워 날개로 감싸 안아주던 웨슬리.
과학적으로 보자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웨슬리는 자기 몸도 아프면서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뇌종양 때문에 아픈 스테이시를 살아있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 위로해 준 뒤에야 그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다.
웨슬리가 얼마나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단지 살아있음으로 위로해 주려고 했었는지는
수의사가 사망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간단한 테스트를 한 후에야 밝혀지게 된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 수 있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요. 살아 있는 세포조직이 하나도 없어요. 전신에 암이에요. 모조리요.
당신은 인간으로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암에 대해서는 당신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리고 웨슬리의 죽음 후.
스테이시는 마치 잭 케루악에게 빙의라도 된 듯 3주 만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게 된다.
잭 케루악이 36미터짜리 종이 위에 <On the Road>를 3주 만에 쉴 새 없이 타이핑한 것처럼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역시 폭풍처럼 쓴 글은 폭풍처럼 읽히는구나.
웨슬리 냄새가 맡고 싶어 스카치 캔디라도 사먹으며 외로움을 달래보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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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 단편선 범우 사르비아 총서 637
기 드 D. 모파상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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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큐의 정우성 기자 덕분에 더 좋아져버린 범우사 문고본.
마침 용산뿌리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김에 몇 권 들고 왔다.

편의점에서 생수 사 마시듯 부담없이 사서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게 범우사 문고본의 최대 장점.
양장본은 지하철에서 들고 읽을 때 손목이 너무 아프단 말이지요.

이쯤 되면 테니스 선수에겐 테니스엘보가 오고, 주부에겐 팬엘보가 오듯, 독서가들에겐 북엘보가 올지도 모를 일.
범우사 문고본으로 미리미리 대비하세요.

들뜬 마음으로 책을 뒤적이다 머릿말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큰놈이 온다.
모파상 曰,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단 하나의 낱말밖에 없고,
그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단 하나의 동사밖에 없으며, 그것을 수식하는 데는 단 하나의 형용사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마침내 단 하나의 그 낱말, 그 동사, 그 형용사를 발견할 때까지 찾아내야 한다..."

쿵...! 마음에 울림과 함께 죄책감이 피어오른다.
나는 이제껏 "바로 그 낱말"이 생각나지 않아 얼마나 다른 '쉬운 단어'로 대체하며 살아왔으며
심지어 맞춤법이 순간적으로 애매모호할 경우에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다른 '아는 단어'를 갖다 썼는가.
외국어일 경우엔 더 심했다. 더 좋은 바로 그 낱말을 찾지 못해 중학생용 단어로 연명해 온 나의 십수년.
시간절약을 핑계로 아무 낱말, 아무 동사, 아무 형용사나 홀랑홀랑 가져다 쓰다니...
나는 좀 더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한다.

아쉬운 건, 모파상이 선택한 '바로 그 낱말'들이 원래는 프랑스어라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번역자 뿐이라는 사실.
못 배운 게 한이다.

모파상의 단편선에는 누벨(nouvelle)과 꽁트(conte)가 있는데
"이런 게 진짜 꽁트였지" 라며 무릎을 탁 칠만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 이외수>라는 되도않는 꽁트집은 모파상이 겨울에 글 쓸 때 난로 땔감용으나 주면 큰 영광일 듯.

단편선 중 특히 대단했던 건 데뷔작인 <비계 덩어리>다.
1880년에 선배인 에밀 졸라가 주관하는 소설집 <메당의 저녁>에 발표하면서
모파상을 일약 문단의 스타로 만들어 줬던 작품인데, 그의 스승인 플로베르도 감탄했을 정도.

이야기는 전쟁이 한창이던 겨울, 한 합승마차에서 시작된다.
모두 열 사람이 탄 마차에서 단연 시선을 끄는 건 '매춘부'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여자 '불 드 쉬프'.
직역하자면 '비계 덩어리'란 뜻인데 이 별명이 너무나도 걸맞게 몸집은 작고 모든 것이 동글동글하며
살찐 손가락은 마치 짤막한 소시지를 염주에 꿰어놓은 듯한 여자다.
그러나 44 사이즈라야 환영받는 2009년 대한민국은 아니었던지라
이 여자의 터질 듯한 싱싱함은 남자들에게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던 모양.
윤기 흐르는 피부에 빨간 사과 같은 얼굴, 큰 가슴, 멋진 속눈썹을 가진 불 드 쉬프를 질투하던 여자들은
눈빛만으로 내통해서 불 드 쉬프를 은따시기기에 이른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차는 너무나도 느려터져서 목적지까지 갈 길은 멀었고 전쟁 때문에 겁먹은 장삿꾼들은 식당 문도 열지 않아서
마차에 탄 모두가 배고픔 때문에 체면까지 잃을락말락하던 바로 그 때! 비계덩어리 불 드 쉬프가 혼자서 식사 바구니를 꺼낸다.
흰 수건으로 덮인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건 젤리에 절인 두 마리의 영계와 빵, 종달새 파이, 퐁레베크 산 치즈, 포도주 등등등..
혼자 먹기 미안한 불 드 쉬프는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하고 모두들 마지못한 듯 음식을 받아먹으며 말을 섞게 된다.
그러다가 불 드 쉬프의 여장부같은 기질을 칭찬하기까지 하며 그야말로 화기가 애애하더라...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가까스로 당도한 여인숙에서 사건은 터지고야 만다.
먼저 묵고 있던 프러시아 장교가 '불 드 쉬프'가 자기랑 잠을 자주지 않으면 출발 허가증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
당연히 우리의 귀여운 비계덩어리 불 드 쉬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노발대발하고 사람들도 이에 동조해 주지만
며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창녀 주제에 잠 한 번 자 주는 게 뭐가 어때서" 라며 은근히 그녀를 종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그' 밤이 지난 후 다음 날 아침. 마차에 다시 오르는 불 드 쉬프는 모두에게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며칠 전만 해도 그녀의 식사바구니 덕분에 은혜를 입었던 이들이 이제는 마치 그녀에게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양 못 본 체 해 버리는 거다.
심지어는 밥도 자기들기리만 먹고. 아,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온몸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울음을 참던 우리의 비계덩어리 불 드 쉬프 양은 어린애처럼 울음을 삼키고 마차는 여전히 덜컹덜컹.
이런 그녀를 보고도 마차 안의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우는 거예요" 따위의 말들이나 주고받고.
필요악이 되어버린 비계덩어리는 울고 울고 또 울고.
생각이 많아지는 짧은 이야기.

이 단편 말고도 <목걸이>는 너무나도 유명하니까 일단 차치하고라도,
한 남자를 일생 동안 사랑하는 <의자 고치는 여인>,
무섭도록 호방하게 아들의 복수를 행하는 <야성의 어머니>,
웃을 수만은 없는 <걸인>,
사랑이 크냐 보석이 크냐를 생각하게 되는 <보석>까지
주옥같다. 역시 모파상이다.

하지만 역시나 모닥불에 얼굴 묻은 심정으로 고백하자면
"역시 모파상"이라고 엄지 세워놓고, 장편은 읽어본 적조차 없다.
하나 위안이 되는 사실이라면, 모파상의 문학적 진가는 장편보다는 단편이라는 것 정도?
 

장편 <여자의 일생>도 읽어야겠다.
단어 하나, 형용사 하나, 동사 하나, 허투루 읽지 않고 꼼꼼하게. 

 

참. 내가 가진 <모파상 단편선>은 93년 초판 6쇄본인데, 안에 남아 있는 흔적이 흥미롭다.

96년도에 명동에 있는 계성여고를 다니던 송숙현 양의 여름 보충수업비는 1만 5백원.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

이 책 놓아두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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