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7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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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바람을 일으키는 36미터짜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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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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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서울 모임에 갔다가 북크로싱으로 받아온 책.
북크로싱은 순발력이 꽤나 중요한데, 덕분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 책이
핸드폰을 통해 100년 전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얘기인 줄 착각하고 손을 번쩍 들었던 거다.
바보. 그건 <미래를 걷는 소녀>인데...
어디서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거 흘끔 보고 얕은 지식만 생겨가지고 이런 실수를 범했고나.

하지만 소설적 재미는 나쁘지 않다.
물론 굉장한 문학성을 기대하고 본다면야 책을 집어던지고 말겠지만
킬링타임용으로 읽으면 쏜살같은 시간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에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악몽>, <The other world> 이렇게 세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에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마지막에 있는 <The other world>.
왠지 이런 일이 나한테도 생기면 신날 것 같아- 라는 중학생적 상상력을 갖고 읽으면 더 좋다.
내 경우엔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통해 평행세계에 대한 아주 짧은 지식을 갖고 있던 터라 상상력이 더 커졌을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내 지식은 뭐든 짧고 얕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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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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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잭 케루악의 <On the Road> 완역본이 출간됐다!
뉴욕 시의 서점에 가면, 종종 책장 선반보다는 계산대 뒤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이 책!
성경과 함께 가장 자주 도둑맞는 책 중 하나라는 바로 이 책!
피리 불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어디서 들은 낭설인지 모르지만 김연수가 번역하고 있다고 해서 완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번역자는 경원대학교 영문학과 이만식 교수님? 그래도 민음사판 <파리대왕>만큼 나쁜 번역은 아니다.
사실 내가 완역을 기다린 건 겨우 2년 남짓이지만 이제껏 50여년 간 완역된 적 없으니 평생 완역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맷 데이먼이 50주년 기념으로 녹음했다는 오디오북이라도 구해볼까 했지만
들어봤자 반토막도 못 알아먹을 텐데 그런 수고는 왜 해 하며 반쯤 포기하고 있던 눈물의 지난 날.
<The Great Gatsby> 오디오북도 챕터 1만 무한반복해서 듣고 있는 게 벌써 몇 년째냔 말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평소에는 책 받자마자 휙 휴지통에 던져버리거나 일회용 책갈피로나 쓰던 띠지마저
버리지 못하고 곱게 끼워놓았다. 
 

이처럼 <길 위에서>를 오매불망 고대하게 된 건 2007년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본 잭 케루악 특별 전시회 탓.



정확히 몇 월 며칠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아마도 하릴없이 근처를 방황하다가 들어갔을 게 뻔한데
여전히 분홍빛 사자 인내(Patience)와 불굴이(Fortitude)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들어가보니 잭 케루악이 생전에 썼던 물건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었던 것!
그냥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뿐인데 시간터널을 통과한 것처럼 그곳은 완연한 1950년대였다.

 


단상을 끄적거린 노트가 그 중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개중에는 이렇게 직접 그림까지 그린 수첩도 있었고.
 


그중에서도 마음에  바람을 일으켰던 건 그의 애장품 콜렉션.
파이프 담배와 하모니카, 주사위까지 그의 손때가 반질반질 묻은 물건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이걸 보면서 나는 함께 있던 M양에게, "혹시 모르니 내 애장품들은 고급으로 마련해둬야겠어" 라는 말도 안 되는 망발을 내뱉기도. 큼큼.


그중에서도 최고는 단연 이 회중시계!
몇 년째, 나만의 위시리스트 상위권을 랭크하고 있는데 세월을 탄 괜찮은 놈으로 갖고 싶어서 이제껏 소장을 미루고 있다.

 
 

1957년에 <길 위에서>를 발표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잭 케루악은
1951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3주간, 친구의 유품이었던 '통째로 이어진 종이'를 타자기에 끼워넣고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의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벤제드린에 취했고, 케루악 본인에 의하면 커피에 취해서! 소리치고 웃으면서!)
그렇게 해서 완성된 전체 종이 두루마리의 길이는 무려 120피트, 그러니까 36미터!!!
On the Road 라는 소설을 길처럼 이어진 종이 위에 쓰다니!!
결국 케루악이 쓰고 있을 당시는 '페이지'라는 개념조차 없이 정말 끊임없이 길 위를 걷듯이 썼다는 얘긴데,
소설 뿐 아니라 소설을 쓰는 방식까지도 눈물겹도록 신난다(?).
가만. 그럼 당연히 애장품 콜렉션에 타자기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최초의 두루마리 판본도 있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잭 케루악에 대한 애정도가 0에 가까웠던 나는 정작 중요한 사진을 놓치고 말았바보바보.
그렇다면 혹시, 케루악이 속도를 내서 타자를 치느라 땀에 흠뻑 젖었다던 티셔츠,
말리려고 아파트에 내걸었다는 승리의 깃발 같은 그 티셔츠는 전시품목에 있었을까?
50년 된 땀냄새라도 흠뻑 맡고 싶은데.

 

그러나. 이렇게 3주만에 경주마처럼 써내려가긴 했지만 구상은 꽤 오래 전부터 해온 소설이라고 한다.
48년에 쓴 일기에서는 이 소설에 대한 생각들이 스스로를 너무 사로잡고 있어서 감출 수가 없으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만 있는 술집에서조차 입 밖으로 흘러넘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면서 참을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 흥청흥청 소재를 토해내다니, 어머 귀여워라.
아차. 그럼 이 일기장도 전시목록에 있었나? 있었을 텐데 물론... ㅠㅠ

 

이 책은 샐 파라다이스가 망나니(?) 친구 딘 모리아티와 미국을 횡단한 이야기가 주요 축인데
실제로 종전 후에 잭 케루악이 대학을 자퇴하고 친구들과 미국 횡단 여행을 한 걸 토대로 썼다고 한다.
책에는 50주년 특별기념으로 샐과 딘 일당의 여행 루트를 표시해 놓은 지도까지 첨부돼 있으니
그들의 여행을 눈으로 좇으며 소설을 읽는 건 또다른 재미!
물론 나는 미국 지리엔 젬병이지만요.

사실, 이 책에 별다른 줄거리는 없다.
그냥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멕시코 시티로...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방탕하게 놀고 여자 꼬시고 세 번 결혼에 두 번 이혼하고 돈 벌자마자 술 사 먹고 진상 부리는 게 전부.
그런데도 이 소설이 당시 미국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소위 '비트세대'를 주도하게 된 건
아마도 '조르바'스러운 딘 모리아티 때문일테다.

묘하게도 읽는 내내 그리스인 조르바와 딘의 모습이 겹친다.
물론 두 캐릭터의 성격은 다른 점도 꽤 있지만
현재를 즐기며 몸으로 얻은 삶의 철학이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99% 일치하지 않을까.
게다가 두 소설 모두 주인공(=작가)이 이 망나니 친구 때문에 번쩍이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 경험은 삶을 지탱해 주는 문어다리 중 하나쯤은 차지하게 된다.
막 사는 것 같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철학의 크기는 무시할 게 못 되거든.
젊고 거친 이 말썽꾸러기들이 지닌 연약함은 또 얼마나 불꽃처럼 아름다운지!
그 손바닥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다.

특히나 내가 딘에게 완전 반하게 된 장면은 2권의 184쪽.


마지막 고원으로 이어지는 길에 다다랐다. 태양은 황금빛이고 공기는 선명한 파란색,
사막은 이따금 강이 보이는, 모래로 가득한 뜨거운 공간이었다. 성서에 나올 법한 나무 그늘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다.
딘은 자고 스탠이 운전했다. 최초에 입었던 것처럼 길게 흘러내리는 로브를 입은 양치기들이 보였다. 
여자들은 금색 아마 다발을, 남자들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사막의 커다란 나무 아래 양치기들이 모여 앉았고, 양들은 햇볕 속을 돌아다니며 흙먼지를 피웄다.
"이봐, 이봐." 나는 딘에게 외쳤다. "일어나, 양치기야.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 황금빛 세상이야. 눈 뜨고 좀 봐!"
그는 시트에서 고개를 들어 희미해지는 붉은 빛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눈에 담더니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좀 있다 눈을 떠서는 그 광경을 자세하게 묘사하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보라고 말해 줘서. 오, 주여,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디로 가는 겁니까?"
배를 문지르고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보는 그는 거의 울 것 같았다.


아. 딘 모리아티.
이런 남자에게 어떻게 안 반할 수가 있나요.
아마도 50년대의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은 딘에게 반해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대륙을 횡단했을 게다.
그게 인생을 사는 법이었겠지.

물론 2009년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한다면 범죄에 노출되는 건 식은죽 먹기겠지만.
그립다 옛날.
그립다 낭만을 알던 딘 모리아티. 



참. 이 책에서 한 가지 무서웠던 점.
저 사진에 보이는 게 2권인데 책 절반이 '해제'다.
<길 위에서>의 두루마리 원본 출간 기념 기고문이라는데 처음엔 물론 읽지 않고 덮어뒀다.
기고문이라지만 슬쩍 보니 거의 논문 수준이었기 때문.
그런데 총 분량 중 4분의 1을 읽지 않고 덮어두니
완독을 못했다는 자괴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며칠 후 읽고 말았는데
이런이런, 읽어보길 천만다행!
분량만큼의 재미는 장담한다.

그 중 정말 잭 케루악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길 위에서부터 절망까지>라는 기록영화에서
당시 하코트의 편집자 밥 지루가 인터뷰한 내용이다.


"1951년 전반기였어요. 하코트 브레이스 출판사의 책상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울렸어요. 잭이었죠.
그가 말했어요. '밥, 끝냈어!' 그래서 내가 말했죠. '오, 대단하군, 잭, 멋진 소식이야. 그가 말했어요. '그리 가고 싶어.'
'뭐, 지금?' '응 당신을 봐야 해. 당신에게 보여줘야 해.......' '좋아, 사무실로 와.' 46번가와 메디슨 가 모퉁이였죠.
그가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취한 것처럼 보였어요, 하자면...... 술에 취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는 왼쪽 팔 밑에 부엌에서 쓰는 종이 수건 같은 큰 종이 두루마리를 끼고 있었어요.
알다시피...... 이건 그에게 대단한 순간이었어요. 나는 그걸 이해했어요. 그는 두루마리의 한쪽 끝을 잡고,
결혼식에서 뿌리는 큰 색종이 조각처럼, 사무실을 가로질러서 그걸 펼쳤어요.
내 책상 위를 바로 가로질렀죠. 나는 생각했어요. '이상한 원고군. 이런 원고는 처음 봐.'
그리고 그가 나를 쳐다보며,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어요.
내가 말했어요. '잭, 알다시피 이건 잘라야 해. 편집해야 해.' 그러니까 그의 얼굴이 붉어졌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이 원고는 편집하지 않을 거야.' 내가 말했어요. '왜?'
그가 대답하더군요. '이 원고는 신성한 유령이 썼어.'


정말. 그리고 보니 유령이 쓴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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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단지와 잔을 끌어 당기며 - 이문열 중단편전집 6 (양장본)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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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터라 때아닌 이문열 전작주의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주변에서 요즘 어떤 책이 재미있냐 물어와서 <황제를 위하여>를 강력 추천해 주면
하나같이 "이문열은 싫어" 라는 답변이다.
아무리 편견을 없대고 '작가' 말고 '소설' 자체만 보라고 해도 막무가내.
그렇다면, 내가 더 많이 읽고 더 근거 있는 추천을 해주리라, 하던 차에 마침 용산 뿌리서점에서 발견한 거지요 이 책을.

총 6개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최고는 <김씨의 개인전>과 <하늘 길>.

<김씨의 개인전>은 유명 조각가 밑에서 조수 겸 잡역부로 일하던 환갑 다 된 김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자기 자신의 개인전을 준비한다는 내용인데, 이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이 허, 참.
결국 김씨가 데뷔전에서 선보인 것은.... ! (요 부분이 재미의 7할을 차지하니 비공개)

<하늘 길>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읽는 동화"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가난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너무나도 가난해서 일가족이 다 죽고 홀로 살아남은 한 청년이
왜 가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기 위해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주요 축이다.
걷고 걷고 또 걷다, 머리 둘 달린 괴물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던 아가씨를 구해 주고
50년 동안 책 속에서 하늘 길을 찾던 노인과
밤낮으로 취해 하늘을 땅으로 불러내린다는 착각 속에 사는 예술인 집단과
바위 위에 꿈쩍 않고 앉은 채로 마음만 하늘 문을 간신히 기웃거리는 도사와
여의주를 2개나 가지고 하늘로 치솟아보지만 매번 실패하는 이무기를 만나며
점차 하늘 길에 가까워지는데....!
뭐, 애초에 부제가 '동화'였으니 당연히 옥황상제를 만나서 궁금했던 거 다~ 물어보고
처음 만났던 아가씨랑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부자도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약간 뜬금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전이 나오는데, 이 때문에 100% 동화는 아닌 것이고.

하지만 위의 두 작품 외엔 쏘쏘.
나는 이문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편인데
저번에 읽은 장편 <선택>이나
이 중단편집에도 실린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같은 건 내 스타일 아니다.
이런 스타일 때문에 이문열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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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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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난 점은 최대한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난척 할 만한 일이 생기면 자랑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예를 들면, 수학 18점 맞은 건 입 꽁 다물고 가만히 있다가도 영어 96점 맞은 건 "어떡해, 아는 건데 하나 틀렸어."라고 울상짓기 같은 것.
남자친구가 반지를 사주면 일부러 입 탕탕 두드려가면서 하품하는 것. (이것도 20대 중반 이후론 뚝 끊긴 일... ㅠㅠ)
좋은 물건은 일부러 책상에 올려놓고 타인의 질문을 유도해 "이거 어디서 샀어?"라고 물으면 "뉴욕에서" 라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하기 같은 것.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똑똑하고(?) 예쁘고(??) 센스 있는 거(???) 몰라줄까 봐 안달이 나는 거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옷을 찢고 튀어나오듯이 잘난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두각을 나타내는 법이건만,
내가 가진 지식과 인성의 송곳은 너무나도 무디어서 내가 직접 꺼내서 휘둘러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나는 그르넬가 7번지의 고급 아파트에서 27년째 수위로 일하고 있는 쉰네 살의 르네 아주머니와는
인간 판형 자체가 다른 부류다. 아, 모닥불에 얼굴을 묻은 심정. 화끈화끈.

르네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위 아줌마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한다.
이를테면 "<전쟁과 평화>는 역사의 결정론적 관점을 소설화한 것이죠" 라고 말하는 대신에
"쓰레기 창고의 문 경첩에 기름을 치는 게 좋겠어요" 라고 말하는 훌륭한 위장술을 구사하는데,
덕분에 자신의 소중한 18평짜리 방에서 혼자만의 지적 유희를 즐길 자유를 얻는다.
그곳에서 르네는 비디오로 고전영화를 감상하고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다.
심지어 그녀의 고양이 이름은 레옹 톨스토이의 이름을 따서 '레옹'이다.
지식은 충만하고 취미는 고상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2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어느 누구도 르네의 우아함을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 이사 온 일본인 부호 오즈 씨와 참으로 안나 카레니나적인 운명의 만남을 갖는 르네!
그 집의 전주인에 대해 얘길하면서 르네가 화제를 돌리려 "아시다시피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죠"라고 중얼거리는데
오즈 씨가 곧바로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불행한 이유가 다양하지요."라고 맞받아치는 그 순간!
둘 사이에 전류가 찌르르 흐른다!!!
이 대화는 바로 <안나 카레니나>의 첫부분이었던 것! (아, 빨리 제대로 읽어봐야지.)
게다가 오즈의 고양이는 '키티'와 '레빈'!!!
이쯤 되면 '레옹'과 절친 되기는 식은죽 먹기!

그렇게 드디어 르네의 알 껍질이 벗겨지고 오즈와 르네는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우정을 나눴...... 으면 좋았으련만... 
아, 예측하지 못했던 결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비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러나 시간은 가도 사람은 남는 것.
르네의 우아함, 그러니까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정말 다행이다.
혼자서 조용히 생각할 공간을 찾기 위해 수위실로 찾아들었던 분홍안경테 소녀 팔로마,
호두를 먹을 땐 식탁보를 깔고, 아몬드를 넣은 튈과 마들렌, 튀김과자의 일종인 페드논을 귀부인스럽게 먹을 줄 알았던 파출부 마누엘라,
암으로 기력을 잃어가면서도 마지막 순간 르네와 함께 극장 데이트를 했던 소박한 낭만쟁이 남편뤼시앵,
르네와 쌍둥이인 양 취향을 공유하고, 그녀의 트라우마까지 감싸주었던 엣지있는(?) 일본신사 오즈,
그리고 마약으로 야위어가는 영혼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르네가 안뜰에 심어놓은 동백꽃 덕분에 기적처럼 살아난 장 아르텡스....

거 봐, 낭중지추라니깐.
숨길 수가 없는 우아함이란. 

 

+++
2009년에 읽은 책 중 베스트5 에 들어갈 정도로 훌륭하다.
별을 5개 밖에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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