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딱지떼기 - 달콤 살벌한 처녀들의 유쾌한 버진 다이어리
유희선 지음 / 형설라이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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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글은 일단 눈길을 끌었음을 인정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반대꼴인 7명의 여자들이 나오는 한국형 칙릿이라고 '얼핏' 오해하기 딱 좋은데
한 챕터를 채 읽기도 전에 '헐' 이라는 복잡미묘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주인공은 7명의 생물학적 '숫처녀'와 그 여자들을 베이스로 소설을 쓰려는 한 남자.
남자는 인터넷에 <처녀딱지 떼기>라는 카페를 개설하고 30대 숫처녀들을 불러모은 다음 그녀들의 경험을 듣는데...

예쁜 외모 때문에 눈만 한없이 높은 35세 쇼핑호스트,
직업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은 흉내를 낸다는 33세 방송작가,
일 때문에 남자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36세 카피라이터,
술이 워낙 세서 남자를 먼저 보내버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처녀를 지키고 있는 33세 스튜어디스,
80kg이 넘는 육덕진 몸매 때문에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37세 항공사 과장,
15년 동안 한 남자만 짝사랑하다 이도 저도 못해먹은 33세 시인,
그리고, '섹스는 오로지 남자하고만!' 을 외치는 바이섹슈얼 여자를 사랑한 탓에 성경험이 전무한 32세 헬스트레이너.


뭐, 이런 정도의 여자 7명인데 작가는 이들을 통틀어 '골드미스'라 칭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글쎄올시다, 이 중에 허울좋은 비정규직도 꽤 섞여 있는데?
어쨌든 이 7명이 자신이 왜 처녀일 수 밖에 없었는지를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여기에 댓글 퍼레이드를 펼친 다음,
마지막으로 카페 주인장인 남자가 비밀 게시판에 그 느낌을 적는 게 7번 반복된다.
아.. 그런데, 이 사람들 인물소개를 보면 각자의 개성이 말도 못 하게 뚜렷한데
소설에서는 그게 단 1%도 발휘되지 못한다.
다들 똑같은 성격에 똑같은 말투를 쓰는 통에 이름만 손가락으로 슬쩍 가리면 이게 그 사람 같고 그게 이 사람 같다.  
게다가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는 댓글이라는 게 인신공격도 꽤나 섞여 있고 안하무인에 비논리적이다.
교양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것도 전부 똑같다. 무교양 천지다.
소설가를 지망한다는 남자가 비밀 게시판에 쓰는 글 또한, 인터넷에서 팬픽을 쓰는 여중생만도 못하다.
적어도 이 남자가 쓰는 글은, 소설적 완성도를 갖춰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자임을 들키는 대목도 긴장감 제로다.
어디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이라던데, 읽고 보니 정말로 딱 그 수준이다.   

실제로 생물학적 숫처녀를 유지하고 있는 30대 여성들이 많은 건 숨겨진 진실임을 인정하지만
재미있는 건 상황설정 뿐. 스토리는 유치하고, '통통 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문체는 쉬이 질린다.
책을 펼지자마자 나오는 수준 이하의 섹스 성향 테스트에서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런 소재의 소설이 출판되고 회자될 수 있다는 데서는 '세월이 역시 약'임을 실감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지하철에서 <공산당 선언>을 읽어도 괜찮은 시대.
참 좋은 201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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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몸값 2 오늘의 일본문학 9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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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다, 오쿠다 히데오!
내가 가진 그의 책은 <공중그네>, <면장선거>, <인더풀>, <남쪽으로 튀어> 뿐이지만
그가 창조한 명캐릭터 '이라부' 덕분에 이미 나는 그의 노예.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 책엔 '이라부'만큼이나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다.
먼저, 책중 좋아하는 인물 설문조사를 하면 당당히 1위를 꿰찰 것 같은 시마자키 구니오.
잘생기고 어딘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뿜으며 아이큐도 높고 그래서 당연하겠지만 도쿄대에 다니는 이 청년은
친형(아버지는 다르다)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죽자, 똑같은 곳에 가서 형과 똑같은 강도의 노동을 시작한다.
처음엔 도쿄대생 샌님이 왠일이냐며 홀대하던 공사장 인부들과도 친해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시마자키는 사회의 불균형과 불합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니 어쩔 수 있어? 사회를 이렇게 만든 올림픽의 몸값이라도 받아내는 수밖에.
여리여리한 줄만 알았는데, 시마자키, 결단력도 있구나! 대담하기도 하고!

그 외에도 부잣집 도련님이자 방송국 PD인 다다시도 어쩐지 '엣지'있게 생겼을 거 같은데
근데 그 시절의 PD는 거의 연예인 '따까리'였나 보네. 왠지 쌤통이다 요것들 ㅋㅋ
열혈형사 오치하이 마사오는 일도 열심히 하는데다 가정적이기까지 해서 신랑감으로 꽤 괜찮을 거 같기도 하다가
잠복근무 때문에 외박이 잦을 거야 하고 앞서 생각하고선 순위를 조금 뒤로 뺐다.
조무래기 소매치기 무라타 아저씨는 왠지 짠하지만 키가 작으니까 이 역시 뒤로 빼고.
공안부의 야노는 좀 마음에 든다. 나는 언제나 엘리트에 끌리는 타입이니까.

결국, 나의 사심과 흑심을 한껏 포함한 설문조사 결과는,

1위: 시마자키.
2위: 야노.
공동 3위: 그 외의 모든 등장인물.
  

그러니까 한마디로 오쿠다 히데오가 참 잘 썼다는 얘기.
누구 하나 미워할 수 없고 짠한 애정까지 갖게 캐릭터를 창조하다니!
사심 가득한 나는 시마자키가 올림픽의 몸값을 받아내는 데 성공해서 북한으로 도망치길 바랬지만
그래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뒤가 궁금해서 입안에 침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였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내가 원하는 해피엔딩을 써주진 않았다.
아니, 일본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쪽이 당연히 해피엔딩이겠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시마자키의 매력에 퐁당 빠졌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이 소설, 읽다 보면 단순히 '재미'만을 표방한 소설은 또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88올림픽 때 환경을 정화한다는 이유로 힘없는 이들을 내몰았던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이전에 1964년 이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구나.
과연 누구를 위한 국제행사인지, 올림픽 기간엔 내국인과 외국인 중 누가 더 중요한지
그걸 결정하는 건 국민이 아니라 권력층이었다.
그래서 재개발을 이유로 빈민층을 몰아내도 아무도 찍 소리 못했을 터. 적어도 겉으로는.
올림픽을 통해 국가의 우성 유전자만 보여주겠다는 건가.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올림픽 기간 동안 야쿠자들은 시골 온천에 '짱박혀' 있겠다고 하던데,
그렇게 범죄좌와 빈민들을 몰아내고 나면, 그게 바로 진정한 올림픽 도시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언론에 꾸며진 평양의 모습이랑 다를 건 또 뭐야.

이쯤에서 홍세화 선생님의 깨진 계란 이론이 생각나서
강연회 때 책 뒤에 필기(?)해 놓은 걸 다시 보려고 책장에서 <생각의 좌표>를 찾는데, 어랏, 없다.
어디 있지 어디 있지 하며 지난 7월 이사 후 정리를 안 해 장르, 국가, 작가 상관없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책장 앞에서
한참동안을 찾아봐도 역시나 없다! 
좌절해서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오는데 책상 옆 여행가방을 보니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
그 책, Ryu가 해외출장 갈 때 읽는다며 빌려갔었다 털썩...

어쨌거나 <올림픽의 몸값>에는 이런 생각할거리 말고도 군데군데 '한국찾기 잔재미'도 가득하다.
전철역 앞에는 조선인이 하는 불고기집이 있고 처음 보는 김치도 매워하면서 맛있게 먹는다.
도쿄 어디쯤의 개발 안 된 동네에서는 한복 입은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고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김씨 아저씨는 시마자키와 무라타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물론 돈 받고)

요즘 좀 우울했던터라 무슨 책을 읽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오쿠다 히데오 책이나 더 찾아봐야겠다.
우울할 땐 그의 책이 즉효약이다.  
 

(2010년 2월 13일에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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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 (외) 범우 사르비아 총서 632
0. 헨리 지음, 송관식 옮김 / 범우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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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헨리는 왜 이렇게 단편을 잘 쓰는 건가요.
<마지막 잎새><크리스마스 선물>은 워낙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니 차치하고라도
나머지 단편들도 훌륭하기 그지없다.
 
특히나 마음에 들어왔던 건 <추수 감사절의 두 신사>와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
 
먼저 <추수 감사절의 두 신사>.
가난한 떠돌이 스터피 피트는 매년 추수 감사절마다 유니온 스퀘어 파크에서 한 노신사를 만나 명절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이 일은 몇년째 되풀이되던 터라 둘 다에게 관습처럼 지켜지던 건데
아뿔싸, 이번 추수 감사절엔 그만 다른 집에서 배불리 얻어먹게 된 스터피 피트.
그러나 노신사와의 관습을 어길 수는 없어서 유니언 스퀘어 파크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게 되고
배가 안 고픈 척, 매우 고마운 척 식당까지 따라가 정말로 배가 터질만큼 '또' 얻어먹는다.
그리고 식당 문 앞에서 헤어져 첫번째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스터피는 과식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원래의 단편이라면 여기에서 코믹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이건 오 헨리의 단편!
한 시간 후 다른 구급차가 아까의 그 노신사를 싣고 온다.
두둥. 과연 그 이유는?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은 비누회사로 떼돈을 번 안토니 로크월 노인의 부성애(?) 이야기.
이 비누왕의 아들 리처드가 렌트리라는 아가씨를 좋아하는데 이 렌트리 양은 얼마 후 2년 예정으로 유럽으로 떠날 예정.
청혼하고 싶어 죽겠지만 상류사회의 일원인 그 아가씨는 언제나 정해진 스케줄대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이 숫기없는 청년과 상류사회 아가씨가 단둘이 있을 시간은 도통 생기질 않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브로드웨이의 극장가로 그 아가씨를 데려다줄 7~8분 남짓.
이 7~8분 안에 청혼을 하지 못하면 둘의 사랑은 영영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큐피트라도 강림한 건지 마차가 34번가를 지날 무렵 리처드가 어머니의 유품인 반지를 떨어뜨리고
이걸 줍느라 잠시 지체하는 동안 사상 유례없는 교통체증이 생겨버린다!
결국 마차 안에서 2시간을 함께 보낸 두 청춘남녀는 결혼을 약속한단 행복한 이야기... 여기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이쯤되면 오 헨리도 이쯤에서 대놓고 고백을 한다.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맺어져야 좋을 것이다. 독자인 여러분만큼이나 나도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찾으려면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오 헨리 말대로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아, 역시. ㅇ이 최고? ㅋㅋ
 
이것 말고도, '연인의 사소한 습관을 기억하라'는 만고의 진리를 깨우쳐주는(ㅋㅋ) <봄날 이야기>는 완전히 내 취향이고,
<붉은 추장의 몸값>은 어딘가 드라마극장 같은 데서 본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나 낄낄대고 웃을 수 있을 만큼 유쾌하다.
 
여기 실린 18편의 단편은 거의 모두가 뉴욕 소시민의 삶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간혹 범죄성이 짙은 일이라 해도 어쩐지 밉지가 않다.
마지막에는 결국 반성하고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 보면 가끔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얼토당토않는 결말을 보기도 하지만 (특히 헐리우드 재난영화)
오 헨리 단편 속 해결사인 '사랑'은 헐리우드 재난영화처럼 가식적이지 않다.
소박하고 풋풋하다.
 
아참. <봄날 이야기>에 나온 '연인의 사소한 습관' 말인데, Ryu는 나랑 사귈 때 나의 사소한 습관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내가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와 일반 볼펜으로 글씨를 쓸 때, 글씨체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윗쪽 모서리를 접고, 오타를 발견할 때는 아랫쪽 모서리를 접는다는 건?
초코케익을 먹을 땐 손으로 들고 손가락마다 잔뜩 묻혀가며 먹는 걸 좋아하는 건?
나는 다 아는데 걔는 몰랐던 것 같아서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다.
다음 연애 땐 이순재 고사처럼 나도 객관식 시험을 봐야겠다.
100점 맞으면 상품도 푸짐하답니다.

 

P.S... 그의 전 여자친구가 간혹 여기 와서 글들을 읽고 가는 모양인데, 이제 헤어진 거 알았으니 만세삼창 부르시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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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 민음의 시 161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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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었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지지난해(혹은 지지지난해) 만나던 남자한테 된통 뒤통수를 얻어맞고서
기형도의 시집을 무한반복 리핏해서 읽었던 게 그나마 가장 최근.
특히 <빈집>을 수도 없이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눈물이 솟구치는 바람에
아예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아 타일바닥에 맘껏 눈물 뚝뚝 흘리며 읽었었다.
하지만 그 시를 하도 읽어서 줄줄 외우고 나니 미련도 뭣도 흔적 없이 사라지더라.
그래, 시의 순기능은 이런 것!

그 이후로 또 다시 시를 돌 보듯 하다가 최근에 읽어보기로 마음먹은 게 바로 장석주의 <몽해항로>.
장석주의 필력이야 익히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의 책을 내 손에 잡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만보객 책속을 거닐다>도 어쩐 일인지 읽지 않았고.

그런데.

그의 시를 읽고 나니, 어쩐지 집 앞 포장마차에라도 가야 할 기분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아래의 문장들이 그 원흉, 

"한낮이 증발하고 후두두 작은 혀들이 내려온다...... 땅에 뛰어내린 혀들이 울먹이며 달려간다."
"그토록 사랑했던 건 당신의 영혼이 아니었어, 오, 그 허리!"
"구름은 만삭이다, 양수가 터진다."

아. 소주 한 잔에 문장 하나 안주 삼고, 또 한 잔에 소리내어 문장 읽으면
시 한 편에 소주 일곱 잔, 한 병은 순식간.
요즘 소주 도수가 낮아지는 바람에 주량도 덩달아 늘었으니
나는 시 세 편쯤은 읽은 후에야 비틀거리며 돌아올 수 있겠다.

묵직하게 침잠하듯 취하는 것.
이것도 시의 기능이라면 기능.

   

*** 나 아무래도 바보..  지금 생각해보니 장석주의 <만보객 책속을 거닐다>는 2009년 4월에 이미 읽었었다. 기록해놓지 않았으면 정말 평생 안 읽은 줄 알았을 텐데...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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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파스타 - 이탈리아에서 훔쳐 온 진짜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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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처음 만날 땐 식당 정하는 게 곤욕이다.
평소에 감자탕이나 삼겹살을 즐겨 먹긴 하지만 남자 앞에서 돼지뼈를 쪽쪽 빨 수도, 입 쩍 벌리고 상추쌈을 우겨넣을 수도 없다.
고등학교 때는 햄버거집에서 소개팅을 한 적도 있는데
소스 잔뜩 묻은 양상추가 줄줄 흘러내려 깔끔하게 먹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었다.
(그 남자애, 내가 흠모했던 우리학교 화학 선생님 아들이었는데 부전자전이 아니어서 참 실망이었지...)
이쯤 되면 처음 만나 만만하게 가기 좋은 식당은 대부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가격도 적당하고, 포크에 돌돌 말아 먹으면 꽤 예쁜 척 먹을 수도 있고, 뭐 그냥 만만하달까.

사실, 욕심만 버린다면 만드는 것도 꽤 수월하다.
M양과 뉴욕에 있는 2달여 동안 우리의 아침은 거의 언제나 파스타였는데
(슈퍼마켓에서 파스타면은 늘 세일중이라....ㅠㅠ)
올리브유에 마늘과 양파 넣어 달달 볶아서 마늘향과 양파의 단맛을 뽑아내고 닭가슴살 넣어 더 볶아준 다음
여기에 생크림 넣어 졸이면서 브로콜리랑 올리브 넣고 마지막으로 면 넣어 휘휘 섞어주면 땡!
가끔은 시판 토마토소스를 사다가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냉동 미트볼을 잔뜩 넣어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토마토랑 샐러리, 레몬, 그리고 올리브를 잔뜩 넣은 샐러드까지 먹으면 아침부터 배가 뻥!
여기, 주말 벼룩시장에만 가도 신선한 올리브가 잔뜩이고 동네에도 올리브 가게가 있어서 참 행복했는데.
M양은 지금까지도 같이 파스타 먹으러 갈 일만 생기면 "너도 이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비행기를 태워주곤 한다.
ㅋㅋ 내 입맛에 길들여진 게지.  

 



요게 바로 우리를 미국돼지로 만들어줬던 파스타의 실체.
나는 요리사, M양은 설거지꾼이었다.

 
그런데 요놈의 파스타가 만들어 보고 먹어 보고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게 된다.
이걸 넣으면 어떨까, 저걸 넣으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되는 것.
우리나라 비빔밥처럼 파스타 또한 변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의 나래를 직접 펼쳐보이는 사람이 바로 박찬일 셰프가 아닌가 싶다.
박찬일 셰프가 있는 논현동 누이누이에 갔는데, 동행한 ㅁㄹ양이 주문한 까르보나라 접시를 보고 그야말로 깜놀!
면 위에 살포시 놓인 건 혹시 '수란'? (사진은 엄써요)
"까르보나라=크림파스타"라는 잘못된 공식을 깨우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여기는 소스에 계란노른자를 섞은 건 물론 수란까지 얹어준다.
온몸으로 "나 계란 들어간 까르보나라다!"라고 외치는 모습.
한 입 먹어봤는데 끈적끈적 맛있다.
내가 주문한 봉골레는 먹고나면 입술이 미끈미끈.
질좋은 올리브유를 잔뜩 썼나봐 하면서 조개 하나하나 알뜰히 빼먹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제일 빨리 먹었어... ㅠㅠ 
광화문의 줄서서먹는 파스타집 "뽐모도로"에 익숙해져서 요 정도 양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란 말이다.

 이날은 사실 알라딘에서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 행사였기 때문에 먹고 나서 박찬일 셰프와의 대화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최근 '파스타'라는 드라마가 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극중 이선균이 박찬일 셰프 아니냐, 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는데
자기를 모델로 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과 스승 주세페의 모습을 절반 정도 섞어 놓은 모습과 비슷하다며 대화 스타트.
그렇지만 자기는 주방에서 절대 욕하지 않는다고 껄껄껄. 그렇게 하면 다들 도망간다나.
나는 사실 '파스타' 할 시간에 '공부의 신'을 보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뭐.
(내가 공부의 신 본다면 다들 의아해하던데 나는 학원물이 정말 좋다.
반올림도 한 회도 안 빼놓고 봤을 정도. 게다가 육남매의 귀염둥이 두희가 나오잖아, 끼욜 >o< !!!)

어쨌거나 커피와 와인과 티라미수까지 짭짭대며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된 만남.
질문시간을 갖길래 아까의 그 독특한 까르보나라에 대해 손 반짝 들어 물어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림파스타와 까르보나라가 동일어인 줄 알다가
인터넷과 <보통날의 파스타> 책을 통해 '진짜' 까르보나라는 계란 노른자로만 만든다는 걸 알았는데
셰프님은 이탈리아 현지의 까르보나라와 한국인이 좋아하는 크림소스 흥건한 까르보나라 중에서 어떻게 타협을 하셨는지,
혹시 아까 까르보나라 위에 올라가 있던 수란 역시 그 타협점의 한 방안인지...
바통을 이어받을 새도 없이 단번에 날아온 셰프님의 답변은 "수란은 창의적인 거다".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냥 한 번 올려본 거라고.
그리고 당연히 한국사람 입맛에 맞춰야 했단다. 왜, 손님들에게 돈 받고 팔아야 했으니까.
그의 지인 중 한 명은 계란노른자만 들어간 '진짜' 까르보나라를 너무 궁금해 해서 한 번 만들어주기도 했다는데
절반도 못 먹고 포기를 선언했을 정도라고.
게다가 원래는 베이컨이 아니라 돼지볼살(?)이 들어가야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거의 '돼지머리' 통째로 소비되기 때문에 가능한 선에서 합의를 봤다는 얘기.
옆 테이블의 다른 분께서는, 셰프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파스타는 그럼 무어냐는 질문도 하셨는데
여기에도 가차없이 '알리오올리오'라는 명쾌한 답변을 해주셨다. 
이유는 만들어 먹기 간편하기 때문.
글도 시원시원 맛깔스럽게 쓰시던데, 요리도 호쾌하게 하시나 보다.
흥신소 통해서 주방에 CCTV 라도 달아볼까나.   

어쨌거나 나는 크록스를 신는 호쾌한 찬일 셰프에게 싸인도 받았다. 촌스럽지만.





책을 읽다 보면 중간중간 간단한 파스타 레시피도 나오는데 요게 참 쏠쏠하다.
특히 자취생에게 강추하는 걸인풍 참치파스타는 너무도 만만해서 아무때나 휘리릭 만들어 먹기 좋을 듯.
(만드는 법은 밑의 '밑줄긋기'에 인용해 놨다.)
앤쵸비 만들어 저장하는 법도 나왔는데, 멸치 손질하는 게 어렵다는 얘기를 또 어디서 주워들어서 좀 망설여지는 중.
그렇지만 앤쵸비 통조림은 정말 쬐끔 든 주제에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정말 한 번 만들어볼까 엉덩이가 들썩인다.

이 모임 이후에 저녁에 여의도에서 추적 동갑내기 모임이 있었는데
독불장군 K 양 때문에 또다시 파스타를 먹었다는 건 나만의 슬픈 이야기 ㅋㅋ
여기에서도 까르보나라 시켰는데 역시, 음, 아까완 다르군.
해물샐러드는 엄청나게 맛있었지만.

그런데 셰프님, 파스타 칼로리는 괜히 말해주셨어요.
점심 저녁 두 끼를 모두 파스타 먹었더니 몸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게다가 점심 후식으로는 티라미수, 저녁 후식으로는 까망베르 치즈케익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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