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나는 드라마 <직장의 신> 짤을 볼 때마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나고,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을 때마다 이 드라마가 생각난다.
바틀비는 '거절의 신'이기 때문에 거절의 이미지로 다가갔을 때 공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절 잘해?"
참석한 중학생들은 모두 거절을 잘 못 한다. 거절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했다.
"거절 당해본 적 있어?"
의외로 거절은 많이 안 당해봤던 것 같다. 거절의 범위를 넓힌다면 이력서를 수십 통 썼는데 번번이 낙방하거나 수십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거절당하거나 일상의 세세한 상황과 거절들의 사례를 들자 이제야 뭔가 떠오른 표정들이다. 덕분에 거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근육을 좀 키워야한다는 말도 잘 녹아들었다.
중학생들과 쟁점을 모았더니 이렇게 나왔다.
(1) 바틀비가 구치소로 가는 것을 내버려둔 변호사는 옳지 않다 (A)
(2) 바틀비가 사무실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A)
(3) 바틀비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을 거절했을 때 주인공은 양보를 해줬는데 좀 더 단호한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 않았나? (C)
(4) 바틀비가 필경 업무만 전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VS 부당하다 ★★ (B)
(5) 사장이 바틀비를 너무 오냐오냐했다 VS 바틀비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B)
(6) 바틀비도 이제는 과거를 잊고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D)
4번과 5번이 호응을 많이 받아서 그 주제 가지고 토론을 했다. 질문도 함께 모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 바틀비가 왜 사람들의 말을 거절했을까? (왜 고립됐을까?)
(2) 바틀비는 왜 주인공의 부탁을 거절했을까?
(3) 바틀비는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자고 한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4) 바틀비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아닌지?
(5) 바틀비가 중간에 자신이 필경사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시력 말고도 뭔가 있지 않을까?
(6) 바틀비는 왜 거절왕이 되었을까?
토론을 하면서 사장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바틀비의 행동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는 독특성을 감안해야 하는데, 그 독특성이라는 것은 비판과 토론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바틀비는 역대급 캐릭터인 만큼 배달 불능 우편물(Dead Letter) 담당으로 일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해고당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고, 그마저도 소문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니까 바틀비는 이해의 대상이지 비판이나 토론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바틀비가 다른 행동으 할 여지가 있다면 그로 인해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하기 바쁘다. 사장에 대한 비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장은 단지 사람 좋은 변호사로서 불편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생활인이다. 바틀비가 사장에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사장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소설에서나 가능한 대응이지 현실에서는 곧바로 112행이 아니겠는가?
고민 끝에 우리는 소설 속에서 다시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배달 불능 우편물을 취급할 당시 바틀비는 전쟁으로 인해서 수신이 불가능해진 사례를 주로 접수했을 것이고, 그 중에서는 바틀비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던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이 모든 불행한 죽음과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이렇게나 많이 소멸된 것은 우리가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인생인데 군 징집이라든지, 무리한 공격 명령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정들 떄문에 거절할 수 없이 죽음의 종창역으로 끌려가버린 인생들을 보면서 바틀비는 거절하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마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결과를 불쌍한 우리 변호사 사장님한테 시전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또 다시 '이해'와 관련되는데, 독자가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의 차이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 역시 천차만별이다. 등장인물들에게도 바틀비는 무척 혼란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예순살 먹은 영국인 터키는 상식과 상례에 의거한 요구가 정당했다고 사장을 옹호했고, 니퍼트는 바틀비를 당장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너트는 바틀비 씨가 살쪽 돌았다고 보았다. 바틀비의 거절이 더 심해지자 터키는 바틀비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놓아야겠다며 달려들 기세였고, 니퍼트는 바틀비의 행동이 확실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변덕일지 모르겠다고 관대하게 태도를 바꾼다. 왜냐하면 니퍼트가 맥주에 살짝 취했기 떄문이다. 나는 바틀비가 법률사무소로 온 것은 불행했던 삶 중에서 약간의 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변호사가 바틀비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소설은 전혀 다른 결말로 갔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반만 이해함으로써, 그러니까 상식의 눈으로 바틀비를 바라봄으로서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바틀비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데는 변호사의 책임도 약간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수업을 위해서 인물행동분석표를 만들어 봤다. 단편이니까 이 정도지 장편이라면 여러 장 나왔을 듯. 장편이면 이런 표를 안 만들지. 중학생들과 토론 수업 한 번 하겠다고 이런 노가다를... 내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