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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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직장의 신> 짤을 볼 때마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나고,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을 때마다 이 드라마가 생각난다. 


바틀비는 '거절의 신'이기 때문에 거절의 이미지로 다가갔을 때 공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절 잘해?"


참석한 중학생들은 모두 거절을 잘 못 한다. 거절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했다. 


"거절 당해본 적 있어?"


의외로 거절은 많이 안 당해봤던 것 같다. 거절의 범위를 넓힌다면 이력서를 수십 통 썼는데 번번이 낙방하거나 수십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거절당하거나 일상의 세세한 상황과 거절들의 사례를 들자 이제야 뭔가 떠오른 표정들이다. 덕분에 거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근육을 좀 키워야한다는 말도 잘 녹아들었다. 


중학생들과 쟁점을 모았더니 이렇게 나왔다. 


(1) 바틀비가 구치소로 가는 것을 내버려둔 변호사는 옳지 않다 (A) 

(2) 바틀비가 사무실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A) 

(3) 바틀비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을 거절했을 때 주인공은 양보를 해줬는데 좀 더 단호한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 않았나? (C) 

(4) 바틀비가 필경 업무만 전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VS 부당하다 ★★ (B)

(5) 사장이 바틀비를 너무 오냐오냐했다 VS 바틀비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B)

(6) 바틀비도 이제는 과거를 잊고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D)


4번과 5번이 호응을 많이 받아서 그 주제 가지고 토론을 했다. 질문도 함께 모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 바틀비가 왜 사람들의 말을 거절했을까? (왜 고립됐을까?)

(2) 바틀비는 왜 주인공의 부탁을 거절했을까? 

(3) 바틀비는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자고 한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4) 바틀비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아닌지?

(5) 바틀비가 중간에 자신이 필경사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시력 말고도 뭔가 있지 않을까? 

(6) 바틀비는 왜 거절왕이 되었을까? 


토론을 하면서 사장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바틀비의 행동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는 독특성을 감안해야 하는데, 그 독특성이라는 것은 비판과 토론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바틀비는 역대급 캐릭터인 만큼 배달 불능 우편물(Dead Letter) 담당으로 일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해고당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고, 그마저도 소문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니까 바틀비는 이해의 대상이지 비판이나 토론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바틀비가 다른 행동으 할 여지가 있다면 그로 인해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하기 바쁘다. 사장에 대한 비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장은 단지 사람 좋은 변호사로서 불편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생활인이다. 바틀비가 사장에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사장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소설에서나 가능한 대응이지 현실에서는 곧바로 112행이 아니겠는가?

고민 끝에 우리는 소설 속에서 다시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배달 불능 우편물을 취급할 당시 바틀비는 전쟁으로 인해서 수신이 불가능해진 사례를 주로 접수했을 것이고, 그 중에서는 바틀비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던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이 모든 불행한 죽음과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이렇게나 많이 소멸된 것은 우리가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인생인데 군 징집이라든지, 무리한 공격 명령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정들 떄문에 거절할 수 없이 죽음의 종창역으로 끌려가버린 인생들을 보면서 바틀비는 거절하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마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결과를 불쌍한 우리 변호사 사장님한테 시전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또 다시 '이해'와 관련되는데, 독자가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의 차이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 역시 천차만별이다. 등장인물들에게도 바틀비는 무척 혼란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예순살 먹은 영국인 터키는 상식과 상례에 의거한 요구가 정당했다고 사장을 옹호했고, 니퍼트는 바틀비를 당장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너트는 바틀비 씨가 살쪽 돌았다고 보았다. 바틀비의 거절이 더 심해지자 터키는 바틀비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놓아야겠다며 달려들 기세였고, 니퍼트는 바틀비의 행동이 확실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변덕일지 모르겠다고 관대하게 태도를 바꾼다. 왜냐하면 니퍼트가 맥주에 살짝 취했기 떄문이다. 나는 바틀비가 법률사무소로 온 것은 불행했던 삶 중에서 약간의 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변호사가 바틀비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소설은 전혀 다른 결말로 갔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반만 이해함으로써, 그러니까 상식의 눈으로 바틀비를 바라봄으로서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바틀비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데는 변호사의 책임도 약간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수업을 위해서 인물행동분석표를 만들어 봤다. 단편이니까 이 정도지 장편이라면 여러 장 나왔을 듯. 장편이면 이런 표를 안 만들지. 중학생들과 토론 수업 한 번 하겠다고 이런 노가다를...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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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도시 - 전쟁의 바다를 건너온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홍지흔 지음 / 책상통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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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작가님이 직접 보내주신 책을 얼른 읽고 쓴 것입니다.



초등학생들과 제주4.3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한 것은 슬픈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너무 상세하고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을 최소화하면 감성적인 이야기가 되고 본의 아니게 축소와 왜곡이 될 것 같아서 몇 년 동안 뚜렷한 결론도 없이 고민만 했다. 제주의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매년 4월만 되면 이 부분 때문에 고민에 잠기는데, 아! 좀 있으면 4월이다. 나는 고심 끝에 논어의 도청도설(道聽塗說,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는 뜻)을 원칙으로 삼았다. 제주4.3을 해석하고 꺼낼 만큼 숙성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같은 고민과 어쩌면 도청도설의 원칙에 유의하지 않았나 착각이 들 정도의 만화 작가를 발견했다.

홍지흔 작가의 한국전쟁 만화 『건너온 사람들』은 작가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린이의 시선으로 그렸기 때문에 참신하고 좋았다. 대개 어른들이 옛날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한국전쟁 이야기를 어린이가 해주는 책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후속작인 『사이의 도시』가 나왔다. 『건너온 사람들』이 거제도 피난 이전까지의 이야기였다면, 『사이의 도시』는 거제도 생활에서부터 시작해서 부산에 정착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나는 부제로 써도 될 것 같은 이 말이 참 맘에 들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와도

헤어지지 않는

전쟁 이야기

『사이의 도시』


한국전쟁을 어릴 적 시선 그대로 만화로 옮겨 온 『건너온 사람들』과 『사이의 도시』. 홍지흔 작가의 어머니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만화.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이야기라고 해서 미화하거나 축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극적인 장면에 가려졌던 서늘한 현실을 꿰뚫는다고나 할까? 작가 어머니의 피난 생활 기억에서 되살린 대화 중 유난히 인상적인 대목을 옮겨적어 봤다.


인민군에게 끌려갈까 봐 남쪽으로 피해 왔는데 이번엔 방위군이라니...

『사이의 도시』


아들을 징집당해 어두워진 부모의 대화를 보니 '곰도 무섭고 범도 무서운 세상'이라는 제주4.3 당시의 유행어가 떠올랐다. 낮에는 군인과 경찰들에게 시달리고, 밤에는 무장대에게 시달린 당시 제주인들의 심정을 담은 말이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이란 말을 하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네요.

『사이의 도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당시 할 법한 말들이었지만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경복이는 이북에 있을 때 고등어를 질리게 먹어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피난 오고 나서 고등어를 끝까지 안 먹고 남긴 한 할아버지를 보면서 분개한다. 그렇다고 식성이 완전 바뀐 것은 아니지만 고등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바뀐 것은 사실이다.


훈련병들은 밥 안 줘요?

죽지 않을 만큼만 줘. 아냐, 조만간 진짜로 굶어 죽을지도 모르지.

『사이의 도시』


피란민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폐교가 국민방위군의 훈련소로 사용하게 되자 "전시 상황이니 군인 훈련이 더 먼저지, 어쩌겠습니까." 하고 급히 묵을 곳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번고롭고 고단한 피난생활이 보이는가 하면, 배고픈 훈련병이 엄마가 준 떡을 먹다가 군인에게 발각돼 엄마 보는 앞에서 개처럼 매맞고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만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남았다.


문학은 형상화의 예술이다. 작가가 주제넘게 상황을 설명하려 해서도 안 되고 오로지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말하게 하는 것이라면, 홍지흔 작가의 두 만화 『건너온 사람들』과 『사이의 도시』는 작위적인 장면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서 한국전쟁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어쩌면 '너무 작은 이야기'라는 아쉬움이 느껴질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압축한다는 것과 절제한다는 것은 감정을 지뢰처럼 숨기고 있기 때문에, 담담한 문장과 컷들을 보면서 갑자기 감정이 터져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편안한 장면도 긴장하면서 보게 되는 게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홍지흔 작가님 잘 읽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와도
헤어지지 않는
전쟁 이야기 - P37

"왜 우는지 이유나 알자. 내가 돈 너무 늦게 주고 기다리게 해서 화났어? 응?"
"대답이. 말이.. 안 나와요. 이유가 너무 많아서." - P136

"어쩌나... 하필 오늘따라 양이 부족했는지 남은 쌀이 이것뿐이구나."
"오늘따라는 무슨, 항상 부족하게 배당이 오잖아요. 분명 위에서 누군가 떼먹고들 있는 거야."
"거 애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 P154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이란 말을 하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네요."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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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15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림 잘 그렸다!!
그러고 보면 은근 셀럽이야. 잘 보여야겠어.ㅎㅎ

승주나무 2023-02-1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황송해서 죽는 줄 알았답니다 ㅎㅎㅎ 셀럽은 무슨 ㅎ
 















우리는 이런저런 유토피아에 빠져서 현재를 잃어버린 존재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은 스웨덴의 정치가 비그포르스가 창안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나왔다. 사회주의나 총파업 같은 파국적인 경로로 혁명적인 희망을 제시했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혁명적인 복불복'뿐이었다. 그 예측불가능하고 위험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예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런 저런 유토피아에 젖어 현재를 방기하고들 있지 않은가? 비그포르스는 스웨덴을 천년왕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스웨덴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기로 했다. 1919년 예테보리 강령에는 구체적인 실행방안들이 제시되었다.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 전국단위 의료보험, 출산 및 양육수당, 주택건설의 공공지원, 압도적인 누진적인 재산세와 상속세, 자본과세, 은행 및 보험사의 사회화, 산업현장의 노동자 경영참여 등등.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은 쉽게 말하자면 '현재 구하기'와 같다. 인간이 현재를 얼마나 허망하게 방기해버리는지는 철학자 파스칼이 날카롭게 꼬집었다.




허망한 우리는 이미 없어진 시간을 생각하지만 현존하는 유일한 시간을 무심히 놓쳐 버린다. 그것은 대체로 현재가 괴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를 외면한다. 그것은 현재가 참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가 즐거울 때에는 그것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긴다. 파스칼 『팡세』


미래에 휘둘리고 과거를 잊지 못하며 끌려다니며 현재를 살아갈 줄 모르는 인간들을 공자는 '비열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했다.


공자가 말했다. 비열한 인간이 윗사람을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그는 걱정인형이다. 갖고 싶은 것이 아직 손에 없을 때는 없다고 걱정하고, 설령 그것을 어찌저찌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잃어버릴까 걱정한다.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게 정도를 넘어서니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도 저지르고 만다.

『논어』 「양화」 편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공자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가장 의지했던 제자 자로가 귀신 섬기는 방법을 묻자 산 사람을 섬기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귀신 섬기는 방법을 배울 필요 있겠는가 하고 일갈했고, 말귀를 못 알아먹은 제자가 이번에는 죽음에 대해서 질문하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배울 필요 있겠는가 하고 결정타를 먹인다. 위나라에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던 자로가 5.16 또는 12.12 같은 군사반란 조짐에 초조해 하면서 죽음과 귀신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었지만 공자는 자로가 사는 길에 더 집중하길 바란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은 '차악의 시나리오'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데미지를 받았다면 그대로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재아가 노나라 임금인 애공에게 자문을 하다가 실언을 한 적이 있다. 재아는 중국 고대의 신주(神主 : 위패를 뜻하며 '회사' 할 때의 '社'라는 글자의 뜻)를 만들 때 사용했던 나무의 뜻을 설명했다. 요즘 말로 비유하면 '꽃말'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오래 된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은 잣나무를 썼고, 바로 직전 제국인 주나라는 밤나무를 썼는데, 밤나무는 한자로 '율栗'이었다. 


이 글자가 '몹시 무섭거나 두려워 몸이 벌벌 떨림'이라는 뜻을 가진 전율(戰慄)과 비슷하기에 백성들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썼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백성들이 왕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애공은 '공포정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공자는 제자의 실언을 인정하면서 더 이상의 논란을 만들지 않았다. 재아의 말을 넌지시 억누름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이라 논쟁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 탓하지 않는다

『논어』 「팔일」 편


만약 공자가 제자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면 다른 방향에서 반론이 제기되면서 정치 논쟁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는 살얼음판 같아서 말이 어느 방향으로 튀는가에 따라서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국민의 운명이 큰 영향을 입기 때문에, 도지사는 '정무부지사'를 두고, 당대표는 '정무실장'을 두면서 메시지 관리를 한다. 공자 역시 일종의 메시지 관리를 한 셈이다. 공백료라는 사람이 노나라 제1실세 계손씨에게 자로에 대한 비방을 퍼뜨렸을 때도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가 실행되었다. 공직에 있었던 자복경백이 자신의 직권으로 공백료를 처형시키겠다고 말했지만 공자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며 도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천명이니, 공백료가 천명을 어떻게 하겠는가?

『논어』 「헌문」 편


만약 자복경백의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디스토피아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다. 물론 자복경백은 공백료를 처형함으로써 화근을 없앴다고 생각하겠지만 노나라 정가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공자는 공백료의 입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불리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서 일단 인정하고, 그것이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었다.



일상에서 '잠정적 디스토피아' 실천하는 방법


나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와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떨궜다. 내겐 정말 유용한 개념이었다. 만약 돈 100만원을 잃어버렸거나, 갑작스런 손해를 보았거나, 접촉사고가 나서 피해를 봤을 때 사고가 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사고로 인한 2차 3차 피해를 막는 것은 가능하다. 주식투자를 할 때 큰 손해를 보았다면 손절함으로써 2차 3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결국 매도 판단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손해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휘둘리고 미래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일단 벌어진 손해를 인정하고 그것이 '디스토피아'로 확대되기 전에 끊는 것이 잠정적 디스토피아의 핵심이다.


나는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사람에게도 적용한다. 어떤 문제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특히 그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맥락이 존재한다면 캐릭터 분석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가 할 것이 예상되는 행동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의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컨대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구멍이 어느 쪽에도 없다면 '지연시키기' 작전을 실행한다. 어차피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 남아 있다면 악화를 최대한 늦추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에는 내 몫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에서 지연 작전을 쓰면 디스토피아로 치닫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에서 갑자기 유토피아로 방향을 트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의 또다른 죽음이나 비극적인 사고를 통해서 전환점이 강제로 마련이 되지 않고서는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만약 나의 슬픈 예상이 틀렸다면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은 '헛된 희망'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거꾸로 관계가 개선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계산한다. 대개는 관계가 개선될 조건들이 거의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많을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슬픈 시나리오는 현실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관계가 개선될 확률을 0%로 잡은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고 속도 편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이가 어리다면 변화 가능성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나이대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지금은 초등학생들과 주로 대화를 하고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안에서는 '슬프지 않은 예감'을 경험할 수 있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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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조연들은 언젠가는 다뤄보고 싶은 주제다. 주인공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작가가 세심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남겨 놓은 조연들을 꽃피워볼까 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 (보쒸에)에게 불운이 닥쳤다. 그의 쾌활성은 그러한 불운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기와가 자주 떨어지는 지붕 밑에서 살아.” 그가 자주 하던 말이다. 그에게는 모든 사고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별로 놀라는 일이 없는 그는, 불운을 잔잔하게 맞았고, 농담을 이해하는 사람처럼 운명의 짓궂은 장난에 미소를 보냈다. 그는 가난하였으되, 명랑함을 숨겨 둔 그의 안주머니는 결코 고갈되지 않았다. 마지막 한 푼은 신속히 고갈되었지만, 그의 웃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레 미제라블 3권(펭귄클래식코리아)


라주미힌(죄와 벌)에 이어서 보쒸에를 만나면서 나는 소설 속 위대한 조연들에 관심이 생겼다. 솔직히 보쒸에는 이름을 잊어버려서 한참을 찾았다. 메모를 해두지 않았다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보쒸에는 아베쎄(ABC)의 멤버로 좀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베쎄는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단체로, 파리의 대학생 및 청년 노동자들의 모임이다. 카페 뮈쟁을 본부로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어 Abaissé의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아베쎄는 '낮은 자들' 혹은 '비천한 자들' 이라는 뜻이며'아베쎄의 친구들'은 비천한 이들의 친구로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과 통한다. 레 미제라블 역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한국 최초의 번안 제목은 <너 참 불쌍타>였다. 빅토르 위고는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인물과 공간에 애정을 두는 작가였기 때문에 알려질 수 있었다. 


보쒸에는 외투처럼 불운을 입고 다닌다. 그에게 불운이 찾아오는 것은 운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지극히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불운이 그를 쾌활하고 독특한 캐릭터로 만든 것이다. 보쒸에가 가르쳐주는 것은 불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리수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 불운의 공기는 네가 게을러서도 아니고 운이 나빠서도 아니고 미세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것에 불과하다. 미세먼지를 없애기 위해 공지청정기를 매일같이 돌리고 세스코 서비스를 풀옵션으로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미세먼지'는 마셔야 할 수밖에 없다. '만들어진 불운'은 그야말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원인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보다는 보쒸에처럼 반 정도는 자연스레 마실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보쒸에의 가르침에 숙명론적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운은 당연한 것이니 별소리 말고 고 달게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불운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어쨌든 전진한다. 순례자처럼. <사당동 더하기 25>에 나오는 순례자들처럼. 반대쪽으로 전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불운의 공장들을 격파하려는 보쒸에 같은 사람들이다. 보쒸에가 아베쎄 멤버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보쒸에는 불운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면 구조를 깨뜨리는 데 인생을 걸어서 불운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처럼 펼쳐지지 않고 스캔들 또는 찻잔 속의 태풍처럼 적당한 생채기로 남아 있는 세상을 원했다. 우리에게 닥친 불운 중에서 자연스러운 불운과 만들어진 불운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은 보쒸에로부터 배웠다. 스물 다섯에 일찍 대머리가 되어 버린 보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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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2-01 14:03   좋아요 1 | URL
혹시 내 댓글 밑에 답글 썼나?
그렇게 쓰면 내가 볼 수가 없어.
반드시 엮기로 써야 볼 수가 있지.
내 댓글에 <댓글달기>로 말야.
이렇게...

2023-02-01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2-01 16: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2023-01-31 1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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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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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못했다. 공자가 말했다. “너는 어찌 ‘그의 인물됨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분발하느라 먹는 것도 잊고, 이치를 깨달으면 즐거움에 빠져 근심과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았니?

- 『논어』, 「술이」 편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오프닝 장면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부연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즐거움에 빠져 근심과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는 황홀경의 경지를 전할 수 있다. <빌리 엘리어트>는 특이하게도 뮤지컬이 원작이며, 소설은 뮤지컬과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침대 위에서 감전된 것처럼 춤을 추는 장면은 소설보다 먼저인 것이다. 황홀경을 느끼는 인생의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어서 언저리를 불나방처럼 배회하다가 결국 불타버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진정 황홀경의 순간은 시련, 그것도 극한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맹렬히 불탄다.


재키 아저씨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빌리는 발을 구르고, 도약하고, 회전하면서, 온몸을 불사르며 춤추었다. 확실히는 몰라도 그 춤은 대충 5분 가량 계속 되었고, 그동안 아저씨는 동상처럼 꼼짝않고 서 있었다. 아마 아저씨도 이전에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나랑 같았던 것이다. 나는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이봐요. 아저씨! 아저씨 아들을 보세요! 정말 놀랍지 않으세요?

『빌리 엘리어트』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의 학살적인 노동자 탄압으로 인해 탄광 노동조합이 궤멸된 1984년 영국 뉴캐슬 지역이 작품의 배경이기에, 작품의 모든 곳에 '분노'가 다양한 에너지로 변주되고 있다.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는 '전향'하지 않은 탄광 노동자였기에 임금도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큰아들 토니 엘리어트는 강경파 노동조합원이었기에 경찰의 표적이 되어 더 큰 탄압을 받았다. 엄마가 있을 때에는 집안이 그럭저럭 굴러갔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집안의 구심점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매일 강한 놈들에게 당해 왔던 재키는 둘째인 빌리는 강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권투를 시켰는데, 빌리는 발레에 빠져서 속을 썩힌다. 권투를 배웠으면 하는 아버지의 '강함'과 발레로 맞서는 빌리의 '강함'에 관해서도 토론이 가능하지만, 이번 글의 주제는 '감전'이기 때문에 감전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짚는 것이다.


공자는 왜 남쪽의 초나라에까지 굴러 가게 되었던 걸까? 세상을 바꿔보고 싶어서 국정농단을 일삼는 '삼환'이라 불리는 세 대부를 실각시키기 위해서 작전을 세웠지만 깨끗이 실패하면서 망명생활을 하게 된 이후에 가는 곳마다 냉대와 문전박대를 당하며 공자의 여행은 유쾌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남쪽의 오나라에서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전쟁 혁신으로 춘추시대의 낭만적인 전쟁이 아니라 대량학살이 일상화된 비현실적인 삶이 고통스러웠다. 공자가 초나라에 간 것은 섭공이라는 실권자의 요청도 있었지만 약소국인 자신의 나라를 살릴 길을 찾아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처음 읽을 때는 노동조합 이야기와 1984년 영국의 상황, 노동자를 악마화하여 마녀사냥을 벌이는 정치 상황과 발레를 어떻게 연결했을까 의아할 수 있다. 특히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노동자 파업과 발레의 연관성을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감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분노라는 것은 무엇인가? 몸짓이라는 건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을 던져 본다면 감정과 정의와 설천과 정신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삶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다. 빌리와 함께 '감전'될 수 있다면, 공자와 함께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다면, 나의 삶에 불꽃이 일어나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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