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자복경백의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디스토피아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다. 물론 자복경백은 공백료를 처형함으로써 화근을 없앴다고 생각하겠지만 노나라 정가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공자는 공백료의 입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불리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서 일단 인정하고, 그것이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었다.
일상에서 '잠정적 디스토피아' 실천하는 방법
나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와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떨궜다. 내겐 정말 유용한 개념이었다. 만약 돈 100만원을 잃어버렸거나, 갑작스런 손해를 보았거나, 접촉사고가 나서 피해를 봤을 때 사고가 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사고로 인한 2차 3차 피해를 막는 것은 가능하다. 주식투자를 할 때 큰 손해를 보았다면 손절함으로써 2차 3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결국 매도 판단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손해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휘둘리고 미래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일단 벌어진 손해를 인정하고 그것이 '디스토피아'로 확대되기 전에 끊는 것이 잠정적 디스토피아의 핵심이다.
나는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사람에게도 적용한다. 어떤 문제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특히 그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맥락이 존재한다면 캐릭터 분석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가 할 것이 예상되는 행동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의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컨대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구멍이 어느 쪽에도 없다면 '지연시키기' 작전을 실행한다. 어차피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 남아 있다면 악화를 최대한 늦추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에는 내 몫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에서 지연 작전을 쓰면 디스토피아로 치닫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에서 갑자기 유토피아로 방향을 트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의 또다른 죽음이나 비극적인 사고를 통해서 전환점이 강제로 마련이 되지 않고서는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만약 나의 슬픈 예상이 틀렸다면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은 '헛된 희망'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거꾸로 관계가 개선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계산한다. 대개는 관계가 개선될 조건들이 거의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많을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슬픈 시나리오는 현실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관계가 개선될 확률을 0%로 잡은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고 속도 편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이가 어리다면 변화 가능성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나이대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지금은 초등학생들과 주로 대화를 하고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안에서는 '슬프지 않은 예감'을 경험할 수 있기 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