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1주기에 맞춰 국제 학술대회와 기사, 단행본이 밀려든다. 그 중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김수영-이어령' 지상논쟁을 다뤘던 교수신문 기사였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김수영의 상황 인식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는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다. 그 논쟁의 핵심은 이어령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문인들의 두려움을 엄살이라고 치부한 데 비해, 김수영은 문인들을 소시민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조건의 억압성을 문제삼았다는 데에 있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신문 칼럼과 문예지 지면 등을 통해서 펼쳐졌던 지상논쟁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김수영 산문전집』에서는 세 편의 글에서 논쟁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논쟁이 펼쳐진 시기는 1968년 1월~3월 3개월 동안이다. 물론 이어령 교수의 비판에 대한 김수영 시인의 주장이기 때문에 한계는 있겠지만, 김수영 시인의 글을 통해서 쟁점을 찾을 수 있다. 글은 「지식인의 사회참여」,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사유」,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에서 볼 수 있다.


지난 연말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린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이라는 시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성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이 근대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의 글에서 강조된 낱말은 '단견'과 '피상적'이라는 것인데, 젊은 비평가가 현상 진단을 진지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 당시의 정치적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부의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그 폐해를 과대하게 망상하는 것은 지극히 소아병적인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그는 (중략) 해방 직후와 4.19 직후를 예로 들면서, 정치적 자유의 폭이 비교적 넓었던 시기의 문화현상을 <자유의 영역이 확보될수록 한국문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화하여 쇠멸해 가는 이상한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무모한 일방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위험한 피상적인 판단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작가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사회적인 구조와 억압을 소홀히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가난해진 것이 개인들의 '노오력'이 부족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비판과 닮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어령의 탈정치성과 자기계발적 성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이어령 논쟁은 '에비 논쟁'으로 부를 만하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아민 그레더 그림책 『섬』의 한 장면. 이 그림을 보면 '에비'가 생각난다



이어령은 한국 문단의 작가들이 일종의 '자기검열 기제'를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에비'라는 단어를 꺼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의 '에비' 비판에 대해서 김수영은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가상적인 금제의 힘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이며,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라고 항변했다. 이어령의 주장에 대해서 김수영이 짜증을 내는 부분은 명확한 형태가 없다는 점이다. <질서는 위대한 예술이다>라는 언사는 '정치권력의 시정구호'로서는 알맞지만 문학의 백년의 대계를 세워야 할 전위적인 평론가가 내세울 만한 기발한 시사는 못 된다는 김수영 시인의 비판이 그러한데, 그 중 압권은 아래와 같다. 이 논쟁 과정에서 김수영은 이어령과 완전한 결별을 한 듯하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작품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기사를 검색해 보니 김수영 시인 50주기인 2018년에 이어령 교수의 발언이 소개돼 있었다. (김수영 50주기, 이어령의 회고 “누운 자리 달랐어도 같은 꿈 꿨을 것”)


“돌이켜 보면 논쟁 과정에서 절친한 사이인 김수영 시인과 인간적으로 멀어졌던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어령 교수의 발언을 미루어 보면 이 논쟁 이후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만세>(김일성 만세 대자보 사건 관련 기사)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아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김수영 시인으로서는 젊은 비평가 이어령의 피상적인 비판이 몹시 부당하고 불쾌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김수영과 조지 오웰의 글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이어령의 글이 다소 한가하게 느껴진다.

김일성 만세 / 김수영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김수영 <김일성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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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1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네가 말했던 거구나.
그런데 좀 어렵네.ㅋ

승주나무 2023-03-01 19:40   좋아요 1 | URL
그렇죠. 좀 어렵죠. 이어령이 김수영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카프카가 넘사벽이었다. 어렵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카프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성>, <실종>, <소송> 등 장편들을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했다. 대학원 조교를 2년 했는데 카프카 덕분에 버텼다. 교수 연구실과 대학 본부를 누비면서 <성>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과 건물, 인물과 인물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더더욱 논리적이지 않았기에 카프카 주인공의 당혹스러움이 훅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카프카를 신으로 섬길 뻔했다. 조르주 아감벤, 발터 벤야민 등 전공서적을 읽을 때도 카프카는 계속 소환되었다. 특히 단편과 손바닥소설이 많이 소환되었는데 큰맘 먹고 단편 전집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읽지 않았다. 1일1카프카는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작품이 <국도의 아이들>이다. 

카프카 장편(손바닥소설) <국도의 아이들>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짓눌린 자를 주인공 또는 화자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두운 세계의 소년 백석"을 떠올린다.백석 시인의 유년 세계는 빛으로 짜인 옷이라면, 카프카의 유년 세계는 어둠으로 짜인 옷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항상 무언가의 통제 안에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확장에 불과하다.


국도의 아이들은 어떻게 놀까? 나는 그림책 <지름길>이 생각났다. 지름길의 아이들은 집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기차길을 지름길로 택한 아이들이 굉음을 내고 달려오는 기차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이야기다. 


국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지름길의 아이들이 생각났던 까닭은 철저히 타자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국도의 아이들>은 국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논다.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다. 완벽하게 위계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곤충이나 애완동물과 비슷한 위치의 피라미드 층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삶은 어쨌거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 안에서 둘레를 치지만, 지금까지 어린이를 보는 시선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서로 긴밀히 공유한다는 점이다. 어느새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은 대부분 파악이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든 우리는 그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부서버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만날 확률은 최소 90%는 된다고 생각한다. 이 확률을 49%로 줄이는 것이 나의 "불가능한 목표"다.


바보들은 피곤해지지도 않는다고?

-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질 수 있겠니?

카프카, <국도의 아이들> 서로간의 대화


'아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공간'이다. '국도'라는 공간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소설적 공간은 '무대'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에게 공간이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카프카에게는 공간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개념으로 <국도의 아이들>을 해석한 논문도 있던데, '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hetero와 장소라는 의미의 topos/topia의 합성어인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가지고 푸코는 시간과는 달리 여전히 신성화에 묶여 있는 근대적 장소의 폐쇄성을 비판한다. 공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카프카 소설을 읽는다면 하나의 재미를 추가할 수 있다. 예컨대 <성>의 경우 '성'이라는 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성과 주인공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공간은 권력이 반영된 장소이므로 위계질서가 완성된 카프카의 소설 사회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넘보고, 거기서 수많은 좌절과 몰락이 만들어진다. 위에 언급한 마지막 대화는 두 아이가 국도를 타면 갈 수 있는 남쪽의 도시에 대한 소문을 비평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잠을 자지 않는다'고 상징한 것이다. 국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국도의 아이들>이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길'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왜 지방도가 아니라 국도인가? 먼저 국가권력을 생각할 수 있다. 공간과 공간은 길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길은 공간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길은 명령권자가 아니다.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갑'이 최종 명령권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명령을 받은 공간에서 그 내용물을 길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통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에서 종국에는 공간의 지배자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길은 문고리 권력이지만, 문고리 권력이야말로 절대 권력이다. 카프카 소설의 절대 권력자는 '문고리 권력'이자 '문지기'인데, 감춰진 권력은 주인공들과 인물들이 볼 수 없고 그들의 '하인'만이 권력을 대표한다. <성>에서 하인은 목수에게 딸과 잠자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목수는 하인의 명령을 어긴 죄로 그 사회에서 매도당해 생계의 극한에 내몰린다. 농부의 딸은 스스로 하인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허락하는데, 하인들은 비로소 농부에게 내려진 사회적 형벌을 취하한다. 내가 1일1카프카를 하고 싶은 까닭은 카프카가 권력과 위계질서를 거의 공기처럼 잘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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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차 논어 강의 목록을 만들었다.

소인론, 반역의 시대, 필생의 라이벌(양호 또는 양화. 논어 17편이 양화편이다)이라는 내용은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가 되었다. "반체제적 복고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의 특성이 "반체제적 권모술수가"인 양호(양화)와 평생 긴장하면서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드라마틱하다. 요즘 공자 연구서들은 양호에 주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공자는 복고주의자이자 혁명가이다. 《공자전》(펄북스)을 집필한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은 "혁명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나도 혁명가보다는 혁명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혁명으로 일가를 나눈 것이 아니라, 모든 혁명가들의 혁명 태도를 기초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교육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하지만, 예외적으로 병든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을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좋은 스승이 태어난 경우다. 뒤르켐은 선생의 사회학적 기원을 "비주류 평민"이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사 계급으로 평민과 귀족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비주류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반역의 시대에 태어나 활약한 공자에게 반역자의 특성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양호와 당대 권모술수가들의 반역은 권력투쟁에 머물렀지만, 공자의 반역은 변혁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공자 강의 요청이 계속 있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으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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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 대한 강의 의뢰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10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찬찬히 읽어본 책들과 논어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며 강의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최근 공자 연구서를 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군자에 반대되는 의미의 "소인"에 대해서 다시 보였다. 공자와 논어가 줄곧 비판하던 소인은 현대인에 무척 가깝기 때문이다.


내가 소인을 진지하게 분석 대상으로 삼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소인은 현대인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는데, 이를테면 아래 구절은 현대인의 모습과 참 흡사하다.


(소인, 또는 비열한 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얻을 때까지 근심하고, 설령 원하는 것을 얻더라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근심한다. 근심이 커지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논어 양화 편

영원히 근심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 식으로 표현하지면 "형이상학적 욕망"에 영원히 갇힌 현대인의 모습이다. 근심을 해결하기 위해 취직을 했더니 형이상학적 욕망이 해결되지 않았고, 퇴사를 하고 이직을 했더니 새로운 근심걱정, 새로운 형이상학적 욕망이라는 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씁쓸히 확인한다. 그래서 구조주의자가 되나 보다.


공자는 "소인 지식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소시민이 소인으로 욕망하고 살고 행동하는 것은 위허할 것까지는 없지만, 지식인이 소인으로 욕망하고 살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너(자하)는 군자다운 유가 될 것이지, 소인 같은 유가 되지는 말아라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논어 옹야 편


공자의 소인론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보려 한다. 군자에 가려진 조연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소인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철학의 근본 원리 중에서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이 있다. 군자는 그 동안 조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빛이 이제 시들해졌지만, 소인은 천대받다가 반대로 조명이 되고 있다. 마치 원의 운동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되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듯, 군자는 소인의 위치로, 소인은 군자의 위치로 되돌아간다는 게 참 신비롭고도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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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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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 작품이 대세가 된 시대의 천연기념물


나는 수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두괄식으로 쓰라고 배웠고 나 또한 두괄식으로 쓰도록 가르쳤다. 수많은 정보와 생산 속도에 익숙한 요즘에는 첫 페이지, 아니 처음 몇 문장에서 승부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첫눈에 독자를 사로잡는 작품을 권장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용두사미 식의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처음 몇 장면에 모든 힘을 쓴 것 같은 작품은 당연히 오버 페이스에 걸려들어 부실한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두괄식 작품 대신 미괄식 작품을 신뢰하게 되었다. 세대에 걸쳐서 살아남은 문학 고전은 미괄식이 많다. 빌드업 과정은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뿌려진 떡밥들은 가지런하게 결론을 향해 있다.(이 경우는 '떡밥 회수'가 아니라 '떡밥 수렴'이라고 보아야 한다. 떡밥들이 나름대로의 비중과 의미를 가지고 결론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첫 50쪽(또는 첫 100쪽)에 대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괄식(또는 용두사미 식) 작품은 첫 50쪽이 흥미롭지만, 미괄식 작품은 첫 50쪽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인사하는 공간 또는 빌드업하는 공간이라고 감안한다. 요즘 대세인 드라마 <카지노>가 바로 빌드업에 충실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시나리오 공부하는 사람들은 <카지노>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고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첫 50쪽이 힘든 작품이다.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현실과 불화하는(또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낯선 존재와 독자가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플롯은 단순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상가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과 아버지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끌고 가는 구조이다. 어떻게 보면 『돈키호테』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돈키호테이고 어머니는 산초 판사와 비슷하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뮈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해방일지』


벼룩을 잔뜩 몰고 온 방물장수 여자에게 방 하나를 통 크게 내주고 푸념하는 아내에게 아버지가 사회주의자, 혁명 운운하는 모습이 작가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게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극우 반공주의가 오랫 동안 주류였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사회' 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조차도 빨갱이 바라보듯 했했기에 이명박 정부가 되어서야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회주의 실천과 책 한 권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에 대해서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고정관념과 사회주의 알레르기를 씻어내는 시간이면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나아가 '사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경험했고, 연좌제가 엄존했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사상'은 마치 고어(古語) 또는 사어(死語) 같은 취급을 당해 왔다. 하지만 사상 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상 없이는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누구 것을 베끼든 영향을 받든 행동은 사상을 근거로 한다.


내가 볼 때 사상은 '좋은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생존하는 것과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충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전략차가 너무나 압도적이다. 생존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박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사수하기 위해서 생존의 압박을 힘겹게 이겨냈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삶 실천 과정에서 아버지의 온기를 받았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례식'이라는 장치다. 장례는 가족이 주최하는 행사다. 가족 전통에서 필수적인 체계이지만 '사회주의자의 장례식'은 가족 제도와 장례 제도, 온갖 전통적인 관계의 모순이 폭발하는 뇌관처럼 작동한다.


느그 아배는 살아서도 혈육 등지고 동무들 찾아가등만 죽어서도 동무들이 먼첨이라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빨치산이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모든 가족들의 앞길은 올스톱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통한 사연의 최대 피해자였던 작은 아버지의 외침은 그 시간의 무게감이 있기에 울림이 더 크다. 전도유망했던 작은 아버지의 팔자가 아버지로 인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평생을 술에 의존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야기는 애처롭다. 하지만 애처로운 만큼 아버지의 평생 실천이 더욱 돋보인다. 물론 가족을 사회주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매일 고민하는 것은 생존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일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조그만 영광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거대한 원망을 남겼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례의 극단으로서 손색이 없다. 양극단에 점을 찍으면 나의 위치가 보이기 때문에 좋다. 좋지 않은 사회에서 좋은 삶은 언제나 손해를 보지만,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좋은 삶의 도전을 이어가지 않으면 사회는 더욱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좋은 사회는 좋은 삶의 실천이 쌓일 때 가능하다면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셈이다. 좋지 않은 사회에 편승한 삶을 살 것인지, 가시밭길을 가더라도 좋은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참 어려운 선택임은 분명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 P27

작은아버지는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인 소였다. 그 고삐가 풀렸다. 이제 작은 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 P41

바위는 서늘하고 살구나무 늙은 입사귀는 바람에 살랑이고 그 틈으로 잔햇살이 너울거리고, 소설이나 읽다가 단잠에 빠져들기 좋았다. - P204

미국과 싸워 지고 반역자가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 여인이 찾아왔다. - P234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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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2-19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이 말씀이 지금의 사회를 관통한다고 생각됩니다.
마음은 언제나 인간다움을 추구하지만, 생계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 고통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23-02-19 19:2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요즘 저를 괴롭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삶의 욕구와 생존의 욕구를 조화시키는 것은 양자택일을 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는 능력부족으로 항상 양자택일로 빠지곤 합니다. 좋은 책은 좋은 친구를 부른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이렇게 생각을 남긴 덕분에 좋은 친구를 알게 되었네요. 이 맛에 알라딘을 하는 것 같아요.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