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카프카가 넘사벽이었다. 어렵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카프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성>, <실종>, <소송> 등 장편들을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했다. 대학원 조교를 2년 했는데 카프카 덕분에 버텼다. 교수 연구실과 대학 본부를 누비면서 <성>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과 건물, 인물과 인물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더더욱 논리적이지 않았기에 카프카 주인공의 당혹스러움이 훅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카프카를 신으로 섬길 뻔했다. 조르주 아감벤, 발터 벤야민 등 전공서적을 읽을 때도 카프카는 계속 소환되었다. 특히 단편과 손바닥소설이 많이 소환되었는데 큰맘 먹고 단편 전집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읽지 않았다. 1일1카프카는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작품이 <국도의 아이들>이다.
카프카 장편(손바닥소설) <국도의 아이들>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짓눌린 자를 주인공 또는 화자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두운 세계의 소년 백석"을 떠올린다.백석 시인의 유년 세계는 빛으로 짜인 옷이라면, 카프카의 유년 세계는 어둠으로 짜인 옷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항상 무언가의 통제 안에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확장에 불과하다.
국도의 아이들은 어떻게 놀까? 나는 그림책 <지름길>이 생각났다. 지름길의 아이들은 집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기차길을 지름길로 택한 아이들이 굉음을 내고 달려오는 기차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이야기다.
국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지름길의 아이들이 생각났던 까닭은 철저히 타자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국도의 아이들>은 국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논다.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다. 완벽하게 위계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곤충이나 애완동물과 비슷한 위치의 피라미드 층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삶은 어쨌거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 안에서 둘레를 치지만, 지금까지 어린이를 보는 시선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서로 긴밀히 공유한다는 점이다. 어느새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은 대부분 파악이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든 우리는 그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부서버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만날 확률은 최소 90%는 된다고 생각한다. 이 확률을 49%로 줄이는 것이 나의 "불가능한 목표"다.
바보들은 피곤해지지도 않는다고?
-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질 수 있겠니?
'아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공간'이다. '국도'라는 공간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소설적 공간은 '무대'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에게 공간이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카프카에게는 공간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개념으로 <국도의 아이들>을 해석한 논문도 있던데, '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hetero와 장소라는 의미의 topos/topia의 합성어인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가지고 푸코는 시간과는 달리 여전히 신성화에 묶여 있는 근대적 장소의 폐쇄성을 비판한다. 공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카프카 소설을 읽는다면 하나의 재미를 추가할 수 있다. 예컨대 <성>의 경우 '성'이라는 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성과 주인공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공간은 권력이 반영된 장소이므로 위계질서가 완성된 카프카의 소설 사회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넘보고, 거기서 수많은 좌절과 몰락이 만들어진다. 위에 언급한 마지막 대화는 두 아이가 국도를 타면 갈 수 있는 남쪽의 도시에 대한 소문을 비평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잠을 자지 않는다'고 상징한 것이다. 국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국도의 아이들>이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길'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왜 지방도가 아니라 국도인가? 먼저 국가권력을 생각할 수 있다. 공간과 공간은 길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길은 공간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길은 명령권자가 아니다.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갑'이 최종 명령권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명령을 받은 공간에서 그 내용물을 길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통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에서 종국에는 공간의 지배자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길은 문고리 권력이지만, 문고리 권력이야말로 절대 권력이다. 카프카 소설의 절대 권력자는 '문고리 권력'이자 '문지기'인데, 감춰진 권력은 주인공들과 인물들이 볼 수 없고 그들의 '하인'만이 권력을 대표한다. <성>에서 하인은 목수에게 딸과 잠자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목수는 하인의 명령을 어긴 죄로 그 사회에서 매도당해 생계의 극한에 내몰린다. 농부의 딸은 스스로 하인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허락하는데, 하인들은 비로소 농부에게 내려진 사회적 형벌을 취하한다. 내가 1일1카프카를 하고 싶은 까닭은 카프카가 권력과 위계질서를 거의 공기처럼 잘 그려놓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