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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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가 죽었다. 제자들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려고 했지만 공자가 반대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자가 말했다. “안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대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내탓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이다.『논어』, 「선진」 편



안회는 신화적 인물이다. 안회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고 더군다나 요절했기 때문에 마치 역사적 인물보다 신화적 인물로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논어』에서 공자가 안회에 대한 엄청난 찬사를 남겼기 때문에 제자들도 넘버2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공자는 넘버1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선생께서 자공에게 물으셨다. 너와 안회는 누가 나으냐? 자공이 대답했다. 안회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 너뿐만 아니라 나도 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논어』, 「공야장」 편


처음에 인용한 『논어』 구절에서는 안회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공자가 안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 제자들이 안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충돌하고 있다. 제자들은 왜 안회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려고 했을까? 안회라는 제자의 상징적인 의미와 '성대한 장례'가 가져오는 효과를 생각한 것이다. 장례라는 것은 세를 과시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성대한 장례를 통해서 공자의 제자들은 세를 과시하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공자는 소박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한다. 이것은 공자와 안회의 일이며, 두 사람의 문제이기 떄문이다. 공자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안회의 마음'이다. 안회는 "찬밥에 냉수를 마시며 골목 안 누추한 집에서 살"았고 보통 사람이 혐오하고 불평해마지 않는 가난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며 살았다. (논어, 옹야 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살았다면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지 모르겠지만, 공자는 부유하고 가난한 것이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란 사실을 알았기 떄문에 안회의 삶을 존중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안회가 죽고 나서 갑자기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은 어쩌면 안회의 삶에 대한 부정이자 배신일 수 있다는 생각은 스승 공자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공자가 성인이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기에 제자들이 무조건 복종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논어』에는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반항과 논쟁, 다양한 이견으로 가득하다. 소박하게 장례를 치렀으면 좋겠다는 스승의 바람이 제자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자들 뒷담화와 푸념을 늘어놓는 것밖에 없다.


논어의 시선을 『어린 왕자』로 옮긴다면 "대상을 그 자체로 마주할 수 있는가?" 하는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논어에서 공자가 안회를 그 자체로 마주한 것처럼, 어린 왕자에서는 그 자체로 마주하는 것에 대한 장면들이 많다.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 B612를 1909년 최초로 발견한 터키 천문학자는 자신이 입은 복장 때문에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터키의 독재자는 백성들에게 유럽식으로 옷을 입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명령해서 천문학자는 1920년 우아한 양복을 입고 논증을 다시 해서 비로소 인정 받을 수 있었다. 소행성 B612와 천문학자는 변함이 없었지만 전통 복장을 서양식 양복으로 보정하는 작업을 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대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서양식 양복' 덕분이지 순수하게 B612를 마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린 왕자 역시 대상을 그 자체로 마주하지 못한 실수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장미 이야기다. "해님과 함께 태어났다", "호랑이 따윈 무서울 게 없다", "제가 떠나온 곳은" 같은 허영심 가득한 말들과 "저녁엔 유리 덮개를 씌워 줘요" "바람막이는요?" 같은 까다롭고 눈치 없는 요구 때문에 어린 왕자는 장미를, 장미의 사랑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없었고 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바로 보지 못한 죄값을 치른다는 점에서, 어린 왕자의 여행은 어쩌면 '유형(流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한 거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꽃을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 꽃은 나를 향기롭게 해주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었어.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어설픈 거짓말 뒤에 따뜻한 마음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린 왕자』


마지막으로 '뱀'과 관련해서 "대상을 그 자체로 마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절정에 도달한다. 지구에 내렸을 때 어린 왕자가 처음 만난 "손가락같이 가느다랗고..."이상한 짐승"은 "건드리기만 하면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되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뱀이었다. 어린 왕자는 뱀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지구에서의 작별을 부탁한다. 뱀과의 마지막 일을 바라보는 어린 왕자와 비행사의 엇갈린 시선은 슬픔과 감동을 증폭시킨다. 비행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마음이 더 애절해진다.


"아저씨는 잘못한 거야. 마음이 아플 거야. 내가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말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도 알 거야. 거긴 너무 멀어. 이 몸뚱이를 가지고 갈 수는 없어. 너무 무거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벗어 버린 낡은 껍데기나 같을 거야. 낡은 껍데기가 슬플 건 없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잠시 기운을 잃었다. 그러나 다시 안간힘을 썼다.
"참 포근할 거야, 아저씨도 알잖아. 나도 별들을 바라볼 거야. 별들이 모두 녹슨 도르래를 달고 있는 우물이 될 거야. 별들이 모두 내게 마실 물을 부어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즐거울 거야! 아저씨는 방울이 5억 개나 있고 나는 샘이 5억 개나 있고..."
그리고 그도 말이 없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왕자』,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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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2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오랜만이야. 잘 지내?
올해는 여기서 자주 볼 수 있는 거니? ㅎ
암튼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승주나무 2023-01-2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조금 여유가 있어서 간간히 글 남길 수 있을 듯합니다^^

바람돌이 2023-01-25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의 장면이 이렇게 어린왕자의 장면과 만나기도 하는군요. 책읽기에서 어떤 질문을 던질것인가는 굉장히 고차원의 독서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에서 그런 독서를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오랫만에 저도 댓글 남기는거 같은데 반가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승주나무 2023-01-25 23:32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오랜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전에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했던 논어와 문학의 콜라보에서 했던 원고를 리뷰 형태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일단 논어는 나에게 들어와 있으니까요, 그 눈으로 문학작품을 찬찬히 살펴보고 자주 글을 남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조형근 지음 / 창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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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이렇게 자학적일까 하는 의문은 프롤로그를 읽고 풀렸다. 하지만 글의 전반에 보이는 ‘착함‘은 다소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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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7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8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8-28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 잘 지내지?
이책 흥미롭네. 보관함에 넣어본다.^^

2022-08-28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9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22-10-28 13:5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조지오웰 덕후입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영화예매 쿠폰 안 쓰신 분 있으신가요?

지난 주에 써버렸는데 필요해서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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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22-07-2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완전 고맙습니다^^
 
완역 사기세가 2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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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3권 좀 내자. 공자세가가 47권부터인데 46권에서 끝이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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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64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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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공간이 맞다는데 시간여행자는 왜 '후달리냐'?

※후달리다 : '불안하냐?' '걱정스럽냐?' 등의 뜻으로 영화 <타짜>의 명대사. 비슷한 말) 쫄리냐?


자살하려고 권총 총구를 머리에 갖다 댄 사람은 아마 그때 내가 느낀 것과 거의 같은 불안감을 느낄 겁니다.


시간여행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타임머신 레버를 돌리기 위해서는 '시간은 공간이다'라는 이론에 대해서 '몸'이 받아들여야 한다. 시간이 공간이 아니라면 레버를 돌리는 순간 벽 안에 박혀버릴 수도 있고, 허공에서 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 교과서를 출간하기도 하고 『네이처』 같은 일류 매체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던 허버트 조지 웰스는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웰스의 시대는 '과학의 시대'였다. 다윈의 진화론에 물든 세기말에서 원자력이 등장한 시기까지 1세기라는 웰스의 생애에는 치열한 과학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맑시즘보다 대세인 이데올로기였고, 당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인류 사회의 과거와 미래라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사차원에 관한 공개 토론회가 활발히 열렸고 웰스도 몇 번 참여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시간은 공간이다'라는 명제는 『타임머신』에 삽화로 담기는 차원을 넘어선 논쟁이었다. 시간여행자는 이론적으로는 '시간은 공간'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였지만, 몸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따라서 타임머신의 작동 레벨을 움직이는 것은 머리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같은 기괴한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중학생들과 『타임머신』을 읽으면서 '시간은 공간인가?'로 토론을 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고 했다. 시간은 시간이고 공간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던 시대도 공간도 얼마든지 있는데 어떻게 시간이 담길 수 있겠는가? 반면 한 학생은 우리는 모두 시간에 매달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은 공간이다'라는 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중학생들의 논점은 매우 날카로웠다. 



'시간은 공간인가?'라는 질문에 담긴 의미


네 방향이란 길이와 너비와 두께 그리고 지속 시간이지요. 하지만 육체가 타고난 결함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네 가지 차원이 존재하고, 그중 세 개를 우리는 공간의 세 평면이라고 부르고, 네 번째 차원은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시간은 공간인가?'라는 질문에는 육체와 정신의 특성에 대한 의미도 담겨 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지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육체와 정신이 결합된 모습이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인류와 나는 '정신'으로 묶여 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이라는 네 번째 차원을 따라 한 방향으로만 단속적으로 이동"(17)하며 "우리의 정신은 비물질적이고 차원 없는 존재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결같은 속도로 시간이라는 차원을 따라 나아가고"(20) 있는 것이다.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지금까지 시간이 묻어 있지 않은 공간이라는 게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인류 탄생 이전의 우주와 지구 공간을 말한다면 내가 포함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되물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나'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육체와 정신이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며, 이론적으로 자명한 것을 인정한 시간여행자의 육체가 타임머신의 레버를 돌리기에는 끝내 머뭇거리게 되는 육체적 한계가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시가는 공간인가?'라는 질문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중학생들과 이 주제로 토론하는 것은 재밌었다. 


나는 인류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내고 헛발질한 총합이 바로 나다. 그러므로 내가 없던 먼 과거에 인류가 겪었던 시간 역시 나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인류의 문제에 나를 포함시키지 않고 생각하는 습관이 문제인 것이다. 나와 인류를 끊임없이 구별하고 별개로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압력은 한 가지 질문만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 


나는 인류가 아닌가?


우리의 정신은 비물질적이고 차원이 없는 존재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결같은 속도로 시간이라는 차원을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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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요즘 중력들은 이런 걸 토론하는구만.
나 중학교 때와 엄청난데? ㅎㅎ
자주 온다더니 이제야 왔구만. 반갑!^^

승주나무 2022-02-26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렇죠. 재밌어요. 제 아들도 끼어 있어서. 방학 때 끝날 줄 알았는데 강의가 좋았는지 개학 때도 계속 하기로 했어요^^ 자주가 아니라 종종이 됐네요. 그래도 계속 올릴게요. 항상 댓글로 인사해주셔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