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오언 - 산업혁명기, 협동의 공동체를 건설한 사회혁신가
G.D.H. 콜 지음, 홍기빈 옮김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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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사회 혁신가라고?


로버트 오언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위대한 사회 혁신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산업혁명이 영국을 휩쓸어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공장의 부품으로 전락할 때 사회를 발견하고 협동의 원리라는 소중한 전통을 남겼다. 협동조합으로 질 좋은 생필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었고, 아동교육과 보육, 성인교육과 각종 대중교육시스템은 혁신의 알맹이였다. 노동자들에게 질 높은 위생과 교육, 생필품이 제공되니 자신감을 찾은 그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나아가 정치적 권리를 위한 폭넓은 단결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공자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유교 문화의 잔재'라는 말을 할 때 연상되는 인물은 공자다. '공자님 말씀'이라는 비유 역시 입바른 소리만 하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다. 그런데 공자에게 '혁신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영 어울리지 않은 느낌도 들 것이다. 공자는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던 것도 아니고, 뜻을 얻었던 적도 없다. 평생 견제와 배척 속에 살면서 정치적으로 이뤄놓은 것은 거의 없이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그에게 '혁신가'라니? 공자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는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에는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생애에는 별로 극적인 요소가 없었다. 클라이막스도 순교도 없었으며, 그의 주요 포부 중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실패자로 여긴 것도 분명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 《공자, 인간과 신화》


사정이 이와 같다면 공자가 동양인을 대표하듯 떠받들여지는 것은 그저 신화에 불과한 것인가? 공자 스스로가 기여한 것은 없을까? 공자에 관심 갖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떠오를 의문을 나도 가졌다. 어떤 분야의 원조를 ㅣ신격화하는 동양 특유의 훈고학적 전통이 있고, 공자 역시 그렇게 포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 스스로 이뤄낸 부분도 분명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내가 로버트 오언과 공자의 '혁신적'인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한 까닭은 위대한 혁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공자와 로버트 오언의 공통점


첫 번째 공통점은 '교육'이다. 두 사람 모두 교육에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쏟은 노력은 혁신의 혁신을 거듭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들이 거둔 혁신은 대개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먼저 공자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이뤄낸 것부터 살펴보자. 

공자는 무혈혁명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왕위를 세스반 군주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아 공적을 기준으로 선발된 대신들에게 그것을 부여하고, 정부의 목적을 소수의 권력강화에서 전체 백성의 행복과 복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이지적인 확신만으로는 혁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생애를 바친 주의주장에 대한 참된 정열을 제자들에게 불붙이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도道의 기사단'은 (아더 웨일리의 적절한 표현을 빌자면) 후세 기독교 기사도에서 발견되는 것 못지 않게 헌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 H.G.크릴의 같은 책


오언의 경우는 뜻밖의 추종자들에게 복음 수준의 영향력을 끼쳤다. 

이렇게 실패로 끝난 공동체 건설의 노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노동계급 사이에 오언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었다는 점이었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오언이 주로 직접 대화를 트고자 했던 대상은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이들이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그의 핵심 학설들은 당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던 도시 노동자 계급에 훨씬 친화적이었고 이들을 풍부한 토양으로 삼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좀 더 젊은 세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오언주의가 희망의 복음으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고, 바람직한 이상뿐만 아니라 경제를 건설할 정책의 핵심 요소들까지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G.D.H.콜 《로버트 오언》


이미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듯 오언은 급진주의와 정치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10시간 노동제 운동에 헌신하였지만(말년에는 8시간 노동제를 옹호한다) 국회의원, 기업가, 종교 지도자를 만나 설득하는 데 집중했다. 오언의 혼을 담은 '공장법 입법'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당시 영국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반향을 얻으며 통과되었다. 공장에서 고용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은 10세가 아니라 9세로 낮아졌고, 노동 시간 제한은 10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었으며 식사시간을 포함할 경우는 13시간 반이었다. 하지만 16세 이상의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규제가 없었고 어떤 종류의 감독 조항도 없었다. 강제성의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벌금은 두 배로 늘었지만, 법령을 집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사실상 무의미했다. 오언조차도 이 법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김영란법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면 오언의 공장법 처리 과정이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오언이 추진한 공장법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법은 보통의 시장에서 채용한 노동의 조건에 대해서도 국가가 규제를 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확립했으니까. 



오언과 공자는 비주류에 관심이 없었고 사회의 주류를 설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공자는 민중의 편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로버트 오언 역시 노동자에 관심이 없었고 정치 투쟁은 더더욱 싫어했다. 로버트 오언은 국회의원, 종교지도자, 기업가들을 설득해서 노동법을 통과시키려 애썼다. 당연히 예상되는 결론이지만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오언의 말에 관심을 표했지만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관심을 가진 까닭은 오언이라는 지렛대를 이용해 노동자 계급과 대다수의 하층민들에게 이미지 광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언이 종교를 비난하고 사회적 책임의 부담을 늘리므로 오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공장법 추진 결과를 부자와 권력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과정을 지켜본 노동자, 젊은이, 하층민 등은 오언의 생각은 부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걸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공자의 언행이 담긴 《논어》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귀족과 관리를 위한 책이다. 노동자나 서민, 백성을 위한 말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공자에게 백성은 '타자'에 불과했다. 대화의 대상은 철저히 귀족층으로 제한되었다. 심지어 "여자와 하인들은 잘 해주면 기어오르려고 하고, 거리를 두면 원망하는 족속들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나지 않는가? 고대 세계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공자 철학의 목표는 백성이었다. 백성을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대신 모든 책임을 지도자에게 돌렸다.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다면 백성을 처벌하지 않아도 되며, 흉년에 백성 세금을 늘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백성에게 군사 교육과 기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백성을 현금인출기 정도로 생각하던 귀족들에게 백성 자체가 국가의 존립 이유이며 국가 운영의 목적이라는 공자의 주장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만한 점은 둘 다 '도덕 개혁가'였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심성을 잘 다스려 사회 변혁을 이룬다는 주장은 한가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편이었다. 로버트 오언은 당시 권력자들의 선한 심성을 자극하려고 무척이나 애썼고, 공장 노동자들이 정직하게 노동하고 전 생애에 걸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시민의 심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애썼다. 공자 역시 국민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패기 있는 평민을 교육받은 '군자'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결국 세습적인 귀족질서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귀족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제기한 파괴적인 이론에 의해 수세에 몰리고 나서야 명확한 정치 철학을 발전시켰다. 당대의 정치 문화가 합리적인 수준으로 높아지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한 것은 공자의 공적이다. 


로버트 오언과 공자를 사회 혁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중요한 까닭은 앞으로 사회를 혁신하려고 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급격한 것을 싫어한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보다는 어떤 권리 주체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대중을 지배하는 자들 역시 급진적인 사람들과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 이 두 계층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젠틀하고 합리적인 캐릭터가 필요하다. 오언과 공자 같은 캐릭터 말이다. 나는 이들이 '뜻 밖의 혁신'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역동적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인간적인 덕목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시대에 휘말리지 않고 인간의 가치를 지키는 방법이다. 스스로 성과를 내기 위해서 혼신을 기울이기보다는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혁신의 기회를 넘겨준 것은 내가 배우고 싶은 점이다. 사회 혁신가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위험한 함정이자 유혹이 자기 세대에 이루려는 욕심이 아닐까? 진정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키우고 스스로 거름이 되는 사람이야말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로버트 오언과 공자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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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언 - 산업혁명기, 협동의 공동체를 건설한 사회혁신가
G.D.H. 콜 지음, 홍기빈 옮김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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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어린이 교육까지 이어지는 다리


내가 어떻게 해서 『로버트 오언』을 읽게 되었는지 설명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제주대학교 다니던 시절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 빠져 지내다가 군 입대와 함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7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 언론시민운동을 2010년까지 하면서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나의 경제학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는 세미나 그룹도 기웃거려 보았고, 장하준의 책도 열심히 읽었고, 폴 크루그먼 같은 외국 경제학자들의 책도 많이 읽었다. 그러다가 읽게 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홍기빈 선생의 여러 책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경제학을 읽어야겠다는 이유가 밝혀진 것 같아서 속이 시원했다. 경제학이란 사회학의 일부이며, 지금은 전체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이해해야 하고, 특히 사람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경제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맥락을 알아야 정치와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로버트 오언이라는 거지?


칼 폴라니가 "인간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당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쓴 책이 『거대한 전환』이다. 『로버트 오언』은 칼 폴라니에게 조망점을 제공해준 선구자였다. 로버트 오언을 근거로 삼은 다음에야 폴라니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거대한 전환』의 번역자인 홍기빈 선생이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왜 어린이일까? 로버트 오언이 어린이를 말하게 된 과정은 깊은 뜻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어린이와 가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배운 철학자들의 생각을 종잣돈으로 세상을 바꾸고 썩은 정치를 치우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뿌리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게 바로 어린이와 가족이었다. 


공장 노동자들 중에는 성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구빈법 행정 당국은 구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불행한 빈민 아동들을 떼로 엮어서 고맙게도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공장 소유주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파견하는 관습이 있었다.. (중략)..보통의 고용주들로서 볼 때에는 갈 곳 없는 영세민 자녀들이야말로 산업의 원료로 쓰기에 최상의 자재였다.

- 『로버트 오언』, 본문

로버트 오언은 사회 혁신가였다. 산업혁명은1760년~1830년대 영국에서의 공장제도에 기반한 일련의 경제적 격변 가리키지만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가 거의 끝날 즈음이다. 그러니까 100년간 산업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로버트 오언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산업혁명과 공장이라는 맷돌 안으로 사람들과 모든 사회가 빨려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협동조합과 협동촌을 만들었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동교육과 보육제도를 창안했다. 로버트 오언에게는 아동교육과 보육이야말로 사회 혁신의 첫단추였던 셈이다. 



오언 덕분에 어른들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았다


우리는 어린이를 꿈나무, 미래의 기둥 같은 말로 찬양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린이의 권익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까? 18세기 영국 어른들은 영세민의 자녀들을 '최고의 산업 원료이자 자재'로 이해했다. 쓰다 버리면 그뿐인 것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생, 청년, 실습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을 쓰다 버리는 자재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 수준이 200년 전 영국이라고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짜 실질적이 미래를 위해서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라는 말인가? 오언의 다음 구절을 보면서 나는 눈이 확 트였다. 그리고 내가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졌다. 


다 자라지도 못한 아이들을 일터로 보내 한 푼이라도 더 우려내려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이 미래에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을 날려버리는 셈이며,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미래에 향유해야 할 건강, 안락, 좋은 품행 등도 모두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 『로버트 오언』, 본문


『로버트 오언』에는 어린이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는 대목이 매우 많다. 어린이에 대한 오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어린이에 대해서 무지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고, 부모이자 교사인 내가 무지에 근거한 어리석은 행동들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로버트 오언이 '어린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릴 만한 위대함이 있다. 그의 생각을 읽은 200년 뒤의 어떤 사람이 아이들에게 하는 행동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언은 1771년에 태어나 1858년에 죽었다.그러니까 산업혁명(1760년~1830년대) 기간과 완전히 겹친다. 산업혁명이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고, 시작점으로 잡은 시기의 이전에 이미 징후들이 있었다는 점을 본다면 오언의 생애 전체가 산업혁명의 태풍의 눈과 겹친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비참한 추억과 마구 늘어나는 빈민과 그늘의 자녀, 그리고 이 문제에 무지한 당시의 지식인들. 오언은 안팎의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온갖 조롱에 시달렸다. 


나는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라는 책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과 로버트 오언을 비교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당시 조선의 어른들이 자녀들을 너무 쉽게 때리고 함부로 하니까 어린이에게 '하느님'의 신성성을 부여해서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높여 주었던 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만, 로버트 오언은 어린이들을 공장에서 구해서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 비교할 바는 못 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로버트 오언이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를 위한" 사상을 주장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가 사회혁신의 첫단추이기 때문에 중시한 것이다.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어린이를 보았을 때 비로소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완성된다. 좀 슬픈 이야기이지만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기존의 주류 과학자들이 죽은 이후에야 새로운 과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불합리함을 일거에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의거한 교육, 민주적인 교우 관계,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한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토론 습관 등을 가르친다면 우리 세대의 슬픈 조건들이 다음 세대에는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 희망을 가지고 어린이와 어머니, 가족들,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생각을 이 정도까지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로버트 오언에게 감사하다. 

우리는 뉴 래너크의 아이들이 얼마나 오언을 사랑했는지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오언 또한 그 아이들을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사랑했었음이 분명하다. 아이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이루고 싶은 열망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만나게 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낄 줄 아는 실로 드문 성품을 가진 이였다. 그는 집회에 모인 청중들에게조차 사랑을 느끼는 듯이 연설했다. 집단으로서의 청중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듯이 말이다.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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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나에 대한 그 아이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래도 반가웠다. 애증은 서로 교차하는 거니까 무관심보다는 낫지 않은가?



OO아, 책벌레 선생님이 글 남긴다.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운 것 같아. 교실 모든 친구들 신경쓰다 보니 너랑 얘기 많이 못해서 미안하다. 

그 대신 너한테 '맛있는 거 사줌'권 한 장 줄게. 편한 시간에 연락해라. 그땐 맛난 거 사줄게. 010-XXXX-XXXX. 책벌레 오승주 샘 연락처다. 연락 기다릴게. 

나를 싫어하는 학생이 둘 있었다. 한 명은 나의 실수로 인해서 나랑 멀어지게 되었고, 한명은 그냥 싫어하는 아이다. 마지막 수업을 한 번 남겨둔 어제 아이들에게 글쓰기에 도움되는 책을 한 권 소개했다. 글 고쳐쓰기 연습을 시키자 그 아이가 활동지 한쪽에 그린 그림을 봤다. '책벌레'라고 적혀 있었다. 나를 그린 듯했다. 이 그림을 보자 이 아이와 관계를 잘 매듭져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움'도 역시 하나의 감정이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차피 활동지는 쓰지 않을 거니 그 친구의 볼펜과 종이를 가져다가 손편지를 썼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연락해"라고 말했다. 아이는 예의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는 나를 향해서 "사양"이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하지만 손편지가 그 아이에게 미친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이미 아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다 났고, 담임선생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아이가 편지를 받자마자 담임선생님께 가서 자랑한 것이다. 


이 아이는 나의 '예의 선생님'이다. 어른과 선생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서 살얼음판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한 학기 내내 친해지려고 시도했지만 그렇게 될 수 없었다. 내가 좀 더 비굴해져야 했는데, 그것은 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긴장은 계속 있었고, 한 동안은 그 아이가 내 꿈을 지배한 적도 있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부담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논어』에서 증자가 맹경자에게 해준 말이 생각났다.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대목이다. 이제 이 아이와 헤어질 때가 되자 나도 착한 마음이 생겨서 손편지를 쓰기에 이르렀으니 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얼굴을 움직일 때는 상대가 공격하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도록 해야 하고, 정색을 해야 할 때는 굳은 신뢰가 바탕에 있어야 하며, 말로 나타낼 때는 상대방이 깔보거나 배척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외에 세세한 부분은 담당자에게 맡기면 됩니다. 

- 『논어』, 「태백」


이 구절은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주자와 리링 선생은 1인칭으로 해석했는데, 나는 오규 소라이가『논어징』에서 주장한 해석을 따라 2인칭으로 해석했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 어리며, 맹경자는 맹무백의 아들이다. 계손씨, 숙손씨와 함께 노나라의 '삼대천왕'이다. 그래서 '삼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기세는 노나라 왕을 능가했다. 『논어』에서 '증삼'은 '증자'로 표현될 때가 많았고, 공자가 부를 때만 이름을 썼기에 증자 제자들이 책의 편찬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논어』에서 증자는 분위기를 일시에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요즘 청소년들이 본다면 '쓸데없이 진지 빤다'고 할지도 모른다. 나도 논어를 읽다가 증자가 나오면 자세를 고쳐 앉고 경청한다. 하물며 증자의 유언 앞에서랴! 나는 증자의 세 가지 경고를 다 어겼다. 손편지의 주인공은 이를 고발했다! 그 아이는 내가 얼굴을 보았을 때 거만했고, 공격적이었으며, 내가 정색해서 이야기할 때는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내면 깔보고 배척했다. 게다가 나는 그 아이의 세세한 부분에만 집착했다. 증자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래서 반성문으로 쓴 것이다. 


OO이에게. 

OO아 안녕. 수업시간에 긴장된 분위기 만들어 미안하다. OO이가 충격 받았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이 수업이 싫어졌을 것 같다. 나라도 싫었을 것 같다. 미안. 

너 덕분에 교실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안 만들려고 노력하고 반 전체에게 화 내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O이가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셈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니? OO이는 이미 내 수업에서 마음이 떠났는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ㅡ 오승주 샘


공교롭게도 두 아이는 같은 반이다. 앞서 손편지를 썼던 아이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불만스런 말을 계속 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고, 그런 상황이 이 아이에게 준 충격이 컸다. 이 아이는 순전히 나의 실수와 부족함에 의해서 멀어지게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 이 손편지 이야기도 담임선생님께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무리 담임선생님이라지만, 그 선생님은 정말 아이들 마음의 저수지 같은 분이다. 많이 배웠다. '왜 말했어요?'가 그 아이의 일성이었다고 한다. 


기막힌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이 아이의 마음을 전달받은 경로가 담임선생님뿐이 아니었다. 시험 기간에 학교 주변 공공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말을 건 사서 선생님께 나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여과 없이 전달한 것이다. 나는 두 배로 부끄러웠다. 어떤 기대를 하고 손편지를 쓴 것은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 나의 미안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미안한 마음을 받아줄지 어떨지는 아이들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근신하며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증 선생님(증자(曾子)는 증씨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못하기 전에 선생님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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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5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2-15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난 두 아이라고 해서 너의 아들내미들이면 어쩌나 했다.
책만 읽고 안 놀아주는 뭐 그런 거...ㅎ

선생님이 참 어렵긴 해.
그래도 그렇게 노력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거
언젠간 아이들도 알게 될 거라고 믿어. 힘내라!^^

승주나무 2017-12-15 19:07   좋아요 0 | URL
내 아이들은 서로 좋아요^^

선생님의 양보는 10년이나 20년쯤 뒤에 기억되지 않을까 합니다.
욕심은 안 부릴래요~
 

근원적인 차별은 역차별을 초래하며, 이런 모든 차별에 의해서 양성평등의 가능성들이 모두 상쇄돼 버린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다가 '잘못된 교육'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실제 경험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선생님이 여학생을 예뻐하면서 동시에 남학생을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이 선생님에게 교육 받는 학생들은 남녀관에 왜곡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남녀관의 왜곡을 선생님의 차별적 교육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만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나의 상황을 더 예로 들었다. 한 대기업에서 매우 드물게 부장으로 승진한 한 여성의 경우였다. 여성 부장 밑에는 많은 남성 과장들이 있었다. 여성을 상사로 둬야 했던 과장들은 은근히 부장을 무시하고 보고를 누락하며 저항했다. 화가 난 여성 부장은 남성 과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심한 과장의 뺨을 때렸다. 남성 과장들은 자연스레 제압당했지만 뒷맛이 씁쓸한 장면이다. 여성 부장이 마치 남성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현재 우리의 사회가 남성 위주의 차별적인 사회이기도 하지만, 여성 위주의 역차별 사회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마치 풍선 효과처럼 차별과 역차별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한 학생이 '유교사회의 잔재'라는 말을 했을 때 이를 좀 구체화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 부엌에서 벌어지는 풍경과 TV가 있는 안방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라고. 이것이 근원적인 차별이며, 유교문화의 잔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남자들이 명절 때 부엌에서 '일'을 하고, 여성들이 좀 쉬면서 TV를 보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한다면? 근원적인 차별이 조금씩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비췄다.


이 이야기 끝에 나온 학생의 결론이 바로 맨 처음 소개한 이야기다. 근원적 차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해 보였지만, 아이들은 명절 때마다 부엌 풍경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명절 풍경 외에 또 다른 근원적 차별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런 대화가 생각을 정리하고 명쾌한 언어로 재구성되는 모습을 보니 가슴에 벅찬 감동이 밀려와 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음 주가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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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 책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후배가 그나마 신뢰하는 책이라는 말에 혹한 책.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 후배이니 얼마나 많은 글쓰기 책을 찾아봤을 것인가?


이 책을 저렴하게 구하려고 알라딘헌책방 강남점에 갔더니 30분전에 이미 팔렸다는 소식에 당황했다. 

다음날 수원에서 동탄까지 가서 기어코 샀던 기억이 난다. 

신기했던 것은 이 책이 뇌리에 띠리링 하고 떠올랐을 때 아는 기자 누나와 커피를 마시다가 작가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알고 보니 은유 작가가 그 매체에 고정 연재를 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아줌마들 대상으로 책쓰기 특강을 하고 있다길래 나중에 특강 요청할 때 섭외에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요즘 정말 카피하고 싶은 두 명의 작가 김정선 작가와 은유 작가가 이렇게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글의 방법론이 아니라 '동기'를 건드리는 책이다. 글쓰기 책은 정녕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적당히 현학적인 게 맘에 든다. '학인'이라는 용어도 재밌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공개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조건은 나도 써먹어야겠다. 도서관 게시판 같은 곳에 글을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한다면 어떨까? 아이들이든 아줌마든 나의 글쓰기 수업을 받는 사람들은 '추상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삶을 관대히 바라보고,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묘사를 구체적으로 하는 문제는 나에게도 난제다. 


이 책을 잡은 까닭은 내가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잘 쓰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방법을 내가 몸으로 터득했음에도, 누군가에게 알려줄 때는 잘 되지 않는다. 이야기로 만드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다"라는 말은 참 와닿는다. 나는 중고등학생 작가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그들의 문제를 자신의 이야기로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줌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줌마 작가는 청소년 작가보다는 상황이 좋은 것 같다. 내와 관련된 사람을 다섯 명 정도는 작가로 만드는 게 나의 꿈인데, 이 책을 함께 읽고 글을 다듬으며 도움을 받아야겠다. 글쓰기 책 불신의 시대에 그래도 믿고 읽을 만한 책이 하나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된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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