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강의 - 통합논술 세대를 위한
손병목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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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양고전이 지속적으로 소개되면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게다가 대입 논술문제에서 동양고전이 차지하는 비중도 날로 늘고 있기 때문에 논술공부를 위해서라도 동양고전에 대한 절실한 필요도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선뜻 고전을 잡고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원전과의 ‘간극’ 때문이다.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나 사고방식이 현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 동양고전을 어렵게 만든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동양고전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철학에 있다. 반복적으로 읽고 그 의미를 헤아려야만 이해가 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통합 논술세대를 위한) 동양고전 강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먼저 동양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나 철학서의 요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고, 거기다 더해 현대적인 예시나 친숙한 용어를 사용하여 학생이나 일반인들이 본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쉽고 친숙하게 설명하면서도 비판적 독해와 핵심 사상에 대한 재구성을 준수하게 수행하고 있다.
주제에 대해서 직접 접근하지 않고, 관련된 정보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핵심으로 다가가는 서술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단편적인 지식은 아는 것을 벗어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해서 비판적 독해를 시도하거나 원문을 아예 비판적으로 재구성해 하나의 독서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은 동양고전의 내용에 함몰되지 않고 보다 주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단락의 말미에 입문을 위한 추천도서와, 본격적인 독서를 위한 원전도서를 제시하고, 낱말퀴즈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이 책은 원전을 위한 친숙한 해설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고전을 읽기 전에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을 완화하고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도와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양고전의 독법은 애초부터 텍스트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을 읽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물신주의나 무한경쟁 세계화 시대일수록 시대적 본질을 꿰뚫고 자신이 취해야 할 선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뒤처지거나 세태에 따라가기 급급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논술문제를 풀거나 처세를 익히는 데 애쓰는 것도 좋지만, 과거 선조들이 고민했던 뜻을 이어받아 자신은 물론 이웃들의 미래에 대해서 기여하는 것이 이 책이 숨기고 있는 취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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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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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지성이 태어나는 곳

 

 

책1 :  페다고지 / 파울로 프레이리, 그린비, 262쪽, 2002년

 

 

책2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 서광사, 492쪽, 2003년

 

 

영화 : 죽은 시인의 사회(1990) (피터 위어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

 

 


 

 

 

전통, 명예, 규율, 최고

 

 

 

학부모 및 학생 여러분! 지식의 촛불입니다.

100년 전, 1859년에도 41명의 소년들이 여기 앉아서 학기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여러분을 반기는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4개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전통, 명예, 규율, 최고!

웰튼 아카데미가 설립된 해에 5명의 학생이 졸업했고 작년에는 51명의 학생이 졸업을 했습니다. 그 중 75%가 넘는 학생들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했습니다. 이런, 이런 훌륭한 업적은 우리 학교가 열성적으로 가르친 원칙들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곧 학부모님들의 자제 분들을 이곳에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며 이곳이 미국에서 최고가는 대학 진학 예비 학교인가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죽은 시인의 사회』,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학기 개강식 교장선생님 축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다. 바로 ‘아이비리그’ 대신 서울대나 고려대 같은 국내 유명 대학을 집어넣으면 감쪽같이 국내 유명 고등학교의 개회사가 될 것이다. 학생들은 기숙사로 돌아가서 명문 모교의 4대 교훈을 조롱한다.

“여러분? 4개 교훈이 뭐지? / 익살, 공포, 타락, 배설!”

이 학교의 학생들과 같이 교장 선생님의 축사를 신나게 비판해 보자. ‘지식의 촛불’이나 ‘전통’은 ‘실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새로운 발견을 하고 인류에게 유익한 가치를 전해준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이 명문 대학에 몇 명 진학했는지 하는 ‘실적’이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명문대학에 진학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광이다. 교장 선생님의 축사는 이것을 학교의 차원으로 조금 넓혀놓았을 뿐이다. 이들에게 지식이란 것은 명문 대학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능력이므로 ‘기술’이라고 해야 옳다. 이것이 ‘전통’으로 불리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신분상승이 오히려 ‘명예’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폐단이 바뀌지 않고 대대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명문’ 고등학교가 정체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명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고등학교의 현실인 셈이다.

그러면 세 번째 교훈인 ‘규율’은 어떨까?

 

 

(교사가 설명자인) 설명은 학생들이 셜명된 내용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도록 만든다. 더 나쁜 것은 학생들을 교사가 내용물을 ‘주입’하는 ‘그릇’이나 ‘용기’로 만든다는 점이다. 더 완벽하게 그릇 안을 채울수록 그 교사는 더욱 유능한 평가를 받는다. 또한 내용물을 고분고분 받아 채울수록 더욱 나은 학생들로 평가된다.

이렇게 해서 교육은 예금 행위처럼 된다. 학생은 보관소이고 교사는 예탁자다. 양측이 서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교사가 성명을 발표하고 예탁금을 만들면, 학생은 참을성 있게 그것을 바당 저장하고, 암기하고,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은행 저금식’ 교육 개념이다. 여기서는 학생들에게 허용된 행동의 범위가 교사에게서 받고, 채우고, 보관하는 정도에 국한된다. 물론 학생들도 자신이 보관하는 물건들의 수집가 또는 목록 작성자가 될 수 있는 기회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오도된 제도에서는 누구나 창조성, 변화, 지식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탐구 정신과 프락시스(practice, 변혁을 위한 인간의 능동적 실천)가 없으면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저금식 교육관에서 지식이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억압 이데올로기의 한 특징이며,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부정한다.

- 『페다고지』

 

 

규율이라는 것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것’을 말한다. 이미 만들어진 지식의 체계를 강요해도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지 않는 학생이 바로 규율을 잘 따르는 학생이다. 이것을 페다고지에서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조성과 능동적 사고가 결여된 ‘죽은 교육’을 뜻한다. 이것을 잘 따르기만 한 학생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때문에 ‘최고’라는 교훈은 자기모순적이다.

‘최고’는 그보다 낮은 무엇인가를 상정한 개념이므로 ‘최하’와 같은 개념들이 있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최고’인지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이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헤게모니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최고’라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개념이다. 최고와 최하를 가르는 순간 인간의 존재가치는 사라진다.

 

 

믿거나 말거나 여기 있는 우리 각자

모두는 언젠가는 숨이 멎고 차가워져서 죽게 되지

이쪽으로 와서 과거의 얼굴들을 지켜봐라(100년 가까이 된 선배들의 사진을 가리킨다)

여러 번 이 방을 왔어도 유심히 본 적은 없었을 거야

너희와 별로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지?

머리모양도 같고 너희처럼 젊고 패기만만하고 너희처럼 세상을 그들 손에 넣어 위대한 일을 할거라 믿고 그들의 눈도 너희들처럼 희망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시기를 놓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는지 오래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여러분들이 잘 들어보면 그들의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자, 귀를 기울여봐, 들리나?

카르페

들리나?

카르페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의 첫 강의

※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날을 붙잡아라’‘현재를 즐겨라’의 뜻을 가진 라틴어

 

 

키팅 선생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현재적 가치를 강조한다. ‘최고’라는 허무한 관념에 지배당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현재를 즐기는 메시지를 던진다. 바로 이것이 ‘최고의 인생’이 아닐까?

 

 

 

지성이 태어나는 곳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상당 부분은 코네티컷 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있는 사뮤엘 피커링(Samuel Pickering)과 함께 한 사립학교 학생들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말하는 학교는 지성이 태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의 의미는 점차 변질되고 있다. 학원폭력 등 학교문제의 이면에는 일방적인 교육정책에 소외된 구조적 문제가 암존한다. 학교는 이제 ‘어떻게 가르치느냐’보다는 ‘어떤 학교를 졸업했느냐’로 가치기준이 바뀌고 있다. 키팅 선생님은 시와 인생,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 계속 찢어라. 이건 전투요, 전쟁이다. 지면 마음과 영혼이 다친다.

우수한 학생들한테 시를 측정하게 만들다니, 안되지!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생각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될 거야

여러분은 말과 언어의 맛을 배우게 될 거야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과 언어는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다 ……

비밀을 하나 얘기해 주지

가까이 모여라! 가까이 모여!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휘트만의 시를 인용하자면

“오, 나여! 오, 생명이여! /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

 

 

키팅 선생님에게 있어서 ‘시’는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래서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측정할 수 있는 잣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오만과 무지가 있을 뿐이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이런 것들을 이제는 인생의 목적이라고 가르치지만, 진정한 인생의 목적은 시와 미, 낭만, 사랑이다. 인류의 생명과 존재와 어울리는 궁극적이 가치는 이것들밖에 없다. 이처럼 인생의 도구와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이지만, 휘트먼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바보들로 넘쳐난다.

 

 

문제제기식 교육 방법은 교사-학생의 행동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교사가 어떨 때는 ‘인식적’이고, 어떨 때는 ‘설명적’인 일이 없다. 즉 교사는 학습안을 준비할 때나 학생들과의 대화에 참여할 때나 똑같이 늘 ‘인식적’이다. 교사는 인식 대상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학생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식 교육자는 항상 학생들을 배려하여 자신의 성찰을 재형성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더 이상 유순한 강의 청취자가 아니라 교사와의 대화 속에서 비판적인 공동 탐구자가 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생각할 재료를 제시하며, 학생들이 각자의 견해를 발표할 때 예전에 가졌던 자신의 생각을 재고한다. 문제제기식 교육자의 역할은 학생들과 함께 독사(doxa) 수준의 지식이 로고스(logos) 수준의 참된 지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창출하는 데 있다.(그리스 철학에서 독사란 ‘낮은 차원의 주관적 지식’을 뜻하고 로고스란 ‘사색의 결과로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

은행 저금식 교육은 창조성을 마비시키고 금지하지만, 문제제기식 교육은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자는 의식의 침잠을 유지하려 하지만, 후자는 의식의 출현과 비판적 현실 개입을 위해 노력한다.

학생들은 점점 세계와 더불어 그리고 세계 속에서 자신들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대하게 되기 때문에, 점점 자극을 받으며 그 자극에 반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학생들은 그 자극을 이론적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총체적 맥락 속에서 다른 문제들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므로, 점점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점점 덜 소외된다. 자극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새로운 자극을 낳고 뒤이어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점차 자신도 몰두하고 헌신할 수 있다고 간주하게 된다.

- 『페다고지』

 

 

키팅 선생님에게 한 사람의 인간이 아름다운 시와 같다면 페다고지에서는 ‘로고스’와 같다. 사색하는 창조적인 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문제제기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교사와 학생이 지성을 탐구하는 공동참여자로서 대등한 관계를 가지며, 비판적 지성으로 현실문제에 참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학생은 총체적 맥락 속에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나날이 세상을 거듭나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교육 모델이다.

 

 

 

이상적 교육의 좌절

 

요즘 인기 있는 개그 프로에 다음과 같은 유행어가 나온다.

“현실은 달라요!”

교육의 문제 역시 떡하니 버티고 선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상적인 교육철학이나 개인 차원의 노력은 좌절되기 쉽다. 아래의 표는 어느 신문사가 조사한 올해 지방대 수석 졸업자들의 취업률 현황이다. 미취업자와 취업자, 진학자가 대체로 같은 분포도를 보이지만, 진학자들 중에서는 취업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택한 졸업생도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은 학생들이 사실상 미취업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대학의 수석졸업자는 대학 생활 내내 성실하게 학업에 열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개인의 그러한 노력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교육적 가치는 왜곡되기 쉽다. 키팅 선생님의 좌절은 아마도 예견될 일인지도 모른다. 평소 학교의 교육 방침에 따르지 않아 눈의 가시 같은 존재인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학생의 자살 사건과 비밀 모임에 대한 사주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학생들의 가슴 속에 숨은 열정과 감수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특성들이 죄악시된다. 소크라테스 역시 그와 같은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테네 여러분! 바로 이 캐물음으로 말미암아 저에 대한 많은 증오심이 생겼는데, 그것도 아주 고약하고 심각한 것들이어서, 마침내는 이로 인해 많은 비방이 생겼으며, 또한 이 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도 된 것입니다. 그건 그 때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제가 다른 사람을 논박하게 되는 그 문제들에 있어서 저 자신이 지혜로운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은 신이 지혜롭고, 또한 신은 이 신탁의 응답에서 이 점을, 즉 인간적인 지혜는 별로 아니 전혀 가치가 없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한데, 이에 더하여 갑부들의 자식들로서 아주 여가가 많은 젊은이들이 자진해서 저를 따라다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람들이 캐물음을 당하는 걸 들으며 즐거워하고, 때로는 자신들도 저를 흉내내어서는, 다른 사람들한테 캐어묻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신들은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숱한 사람을 이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들한테서 캐물음을 당한 사람들은 저한테 화를 내지 이들한테는 그러지 않거니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라는 자는 지극히 혐오스런 자이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와 키팅 선생님은 몇 가지 공통적인 죄목(?)이 있다.

첫째, 젊은이의 가슴에 진정한 지식에 애정과 열의를 불어넣었다.

둘째, 부당한 전통에 대해 저항하고 맞서는 비판정신을 가르쳤다.

셋째, 미신보다는 자신의 이성을, 헛된 환상보다는 자신의 실체를 성찰할 수 있게 하였다.

넷째,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가르쳐서, 아름다움이 젊은이의 가슴에서 떠나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위에 열거한 죄목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처형을 당했고, 키팅 선생님은 추방을 당했다. 위와 같은 항목들이 과연 ‘죄’가 되는지에 대해서 의아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가치가 올바로 평가되느냐 왜곡되게 평가되느냐는 순전히 그 사회의 성숙도에 달려 있다. 중국의 시인 굴원의 말처럼 ‘세상은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다면’ 결국 나 혼자 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것은 개인들 간의 연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키팅 선생님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날, 그날이 과연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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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 정치지리의 세계사 책과함께 아틀라스 1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 / 책과함께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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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림의 움직이는 지도

 

사회과부도를 던저버려라

 

 

 

역사는 두 줄기로 흐른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정적인 흐름과 역동적으로 변화해 자신조차도 흔적 없이 바꿔버리는 동적인 흐름이 있다. 세상이 안정과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하면 정적인 흐름으로 편승하다가 혼란스러워지면 순식간에 동적인 흐름으로 바뀐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기업가들이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은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질서란 변화가 가져다준 산물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질서에 편승하기보다 시대변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동양에서 철학의 비조로 받드는 공자와 맹자도 전국시대에는 한낱 일개 학파에 불과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지배하고 중국을 움직인 사람들은 시시각각의 형세에 주목하는 종횡가들이었다.

다가올 미래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현재보다 더욱 극심한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때문에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의 숨 가쁜 변화를 포착하고 활로를 모색해도 시원치 않건만 미래의 자원을 가르치는 우리의 교과서는 10년째 감옥에 갇혀 있다.

 




<표1> 시판 중인 중학교 검정교과서 사회과부도 8종 분석(2007년도, 경향신문)

 

 

 

위 표를 보면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는 사회과부도가 2007년도의 것인지 90년도의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가장 기본적인 세계인구조차 2000년의 자료를 반영한 곳이 단 1곳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교재를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위 정보에 대한 최신 자료를 획득하는 길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정은 가르치는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성의있는 교사라면 ‘구닥다리’ 통계수치나 자료를 자체적으로 보완해서 가르치는데, 사실상 상당수 교사들이 그냥 가르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선학교를 담당하는 장학사의 고백이다. (관련기사 : 케케묵은 ‘사회과부도’…10년 넘은 통계자료 버젓이)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이‘정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느 해에 무엇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변화’이며, 그 위치가 만들어낸 ‘관계’이다. 그것을 파악해야만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이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흐름은 오래된 과거에서부터 흘러왔고, 미래로 향해 가고 있다. 곧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흐름이다.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하게 다가온다. 과거의 신호를 읽어내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각지의 사정과 변화양상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사회과부도’가 나왔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이 그것이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것은 다큐멘터리를 출판화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학자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프랑스 지상파 제5채널인 아르테 방송에서 1990년부터 「지도의 이면」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그러고 보면 서양에서 다큐멘터리가 출판 고전이 되는 환경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부럽기 그지 없다. 그만큼 교양에 대한 일상적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영국 BBC 방송은 클라크의 「문명」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에 이어, 우리가 잘 아는 J.브로노프스키와 함께 인류의 문명을 추적한 텔레비전 시리즈「인간등정의 발자취」를 만들었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이 시리즈가 책으로 출판된 것이 바로 『인간등정의 발자취』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지식과 일상과의 괴리’와 달리,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지식의 일상화를 실천하고 있다. 외국의 연구소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오픈하우스를 열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불어넣어주는데, 이것을 ‘아웃리치’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과학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가 일상화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과학커뮤니케이터’라고 한다. (관련기사 : “학문의 ‘크로스오버’ 더 많아져야”)

우리의 경우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의 거리가 너무나 멀다. 일반인들은 과학이나 지식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고, 학생들은 구닥다리 찌꺼기나 훑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 ‘황우석 사태’를 낳았으며,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식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식을 널리 공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국의 지식인들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역시 정치와 지리, 외교 등 전문가, 식자층에게만 국한되었던 정보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연합의 개념

 

 

전국시대는 秦(진)나라라는 서쪽의 강국과 나머지 6개국(越(월), 趙(조), 韓(한), 魏(위), 楚(초), 齊(제))이 겨루는 형국이었다. 6국의 전선으로 통일작업을 한 전략을 合綜(합종)이라고 하고, 진나라를 중심으로 각국과 교섭하는 통일전략을 連橫(연횡)이라고 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합종은 WTO나 각종 지역연대와 유사한 형태이며, 연횡은 FTA와 같이 쌍자 단독협상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전략가나 국가 고유의 역량차이는 있겠지만, 합종은 구조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왜냐하면 연횡은 ‘진나라의 이익’이라는 단순한 목표가 있는 반면, 연횡은 6개국의 이해관계가 6중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힘을 모으기가 힘들고, 연횡의 교란에 넘어가 자중지화에 빠질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나라의 장의는 각국의 이해관계와 지형상의 이유를 들먹이며 끈질기게 합종을 교란하였고, 영토를 하나씩 먹어들어간 끝에 진나라의 중국 통일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

 

 

제후들이 합종을 하려는 것은 그것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임금을 높이며 군대를 튼튼하게 하여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합종하는 자들은 천하를 하나로 통일시켜 의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洹水(원수)라는 곳에서 白馬(백마)를 잡아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서로의 결속을 굳게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끼리도 서로 재물을 다투는 일이 있는데, 간사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진(대표적인 합종가)의 술책을 믿으려고 하니,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명백합니다.

만약 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하여 조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북쪽 지역 전역을 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나라는 남쪽으로 내려와 위나라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조나라가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위나라도 북쪽으로 올라가 돕지 않을 것이고, 위나라가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합종의 길은 끊어질 것입니다. 합종의 길이 끊어진다면 왕의 나라는 아무리 안전을 바라더라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 사마천, 『사기열전』 중 장의(대표적인 연횡가)가 위나라 왕을 협박하는 모습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은 유럽연합(EU)부터 시작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1993년 11월 1일 발효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라 유럽 12개국이 참가하면서부터 출범한 연합기구인데, 2007년 현재 참가국이 27개국으로 늘어났으며 중국, 미국에 이은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의 공동체를 표방하는 유럽연합의 구성원을 보면 당연히 가입할 것 같은 나라들은 스스로 가입을 꺼려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스위스가 그러한데,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는 수산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스위스는 금융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가입을 꺼리고 있다. 이는 연합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경제원리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을 보여주는 나라는 ‘터키’이다. 터키는 1986년에 이미 가입 신청서를 제출해놓은 상태이지만, 유럽연합은 터키의 가입을 주저하고 있다. 왜냐하면 터키는 영토 대부분이 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종교 또한 97%가 이슬람교도로 터키의 EU 가입은 유럽 안에서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는 것을 의미한다. 2006년에 덴마크의 조그만 신문사가 게재한 마호메트 만평이 보여주듯 유럽과 이슬람은 앙숙의 골이 깊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유럽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이 특정 대륙이나 국가에 앞서 ‘연합’을 첫 번째 화두로 삼은 것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세계에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현대로 오면서 이와 같은 이합집산이 더욱 두드러졌다.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었던 구소련(러시아)과 미국이 패권을 다투며 50년 넘게 냉전을 유지해 온 것에서 시작해, 앙숙이었던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에 대항해 손을 잡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전쟁을 치른 베트남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하기야 미국에 의해서 수십 만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일본은 지금 미국 없이는 못 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은 바로 ‘이익’이다. 이익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는 매우 당연한 말이 되었다.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

 

 

아프리카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륙이다. 지구상에 있는 49개의 ‘미개발국’ 가운데 34개국이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 총 52개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가난과 혼란’을 상징하는 곳이다. 아프리카에는 지독하게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심지어 아프리카에 저축한 돈도 선진국이나 금융규제를 덜 받는 외국에 투자되는 실정이다.

이러한 역설은 왜 일어날까.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하다. ‘누가’ 아프리카에 투자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인도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는 ‘수익성’이 더 확실한 근거이다. 세계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인도적’으로 보기보다는 철저히 ‘비지니스’의 관점으로 본다.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는 세계투자의 22%를 차지하는 데, 거기에는 ‘훌륭한 자원’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내전이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서 무고한 주민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세계자본의 입장에서는 내전이 유지되는 것이 ‘이익’이 된다. 스위스의 국제대학원연구소는 아프리카에 약 3천만정의 소형무기가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 그 중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총기상’들에 의한 밀수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무기수출국들은 합법성을 주장하지만 합법이든 불법이든 검은 대륙을 피로 적시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무기 팔아 돈 벌고 그 가운데 일부를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행태이다. 저자는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그 전쟁으로 ‘누가’ 이익을 얻는가를 잘 살펴보라고 주문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석유’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독재정권을 지원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독재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한 나라의 자원이 있을 때 이것을 독재자가 독점하고 있다면, 이 자원은 독재자와 독재자를 지원하는 나라가 나눠가지면 된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 자원은 ‘만인의 공동 소유’가 되기 때문에 독재자를 지원하는 나라로서는 그만큼 가져가는 것이 적어진다. 이것이 바로 독재정권이 존립하는 확실한 이유가 된다. 저자는 국제사회가 분쟁과 위기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개입 자제

알제리와 콩고민주공화국, 체첸의 분쟁에 국제사회는 개입하지 않았다.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국제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반대파에 대해 한 국가가 전면전을 벌이지만, 국제사회는 대답이 없다. 한 국가 혹은 한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 ‘살인권’을 보장해주고 있는 꼴이다.

 

인도적 지원

개입을 하는 대신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분쟁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이다. 직접 개입하는 데 따르는 정치적, 군사적 비용 대신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1996년 기근 이후로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 대한 지원이 대표적 예이다. 또 1998년 앙골라 전면독립민족동맹이 무너졌을 때도, 2002년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도, 국제사회는 앙골라에 인도적 지원을 해주었다. 인도적 지원이 끊기면 수단 남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근이 발생하고, 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적 개입

국제사회의 마지막 선택은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시에라리온이 그랬고, 아프가니스탄이 그랬고, 이라크가 그랬다. 이때에도 물론 인도적 지원이 병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군사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지, 진짜로 ‘인도적’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인도적 전쟁’은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전쟁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원을 해주는 것이 인도적 전쟁이다.

- 책 167쪽

 

 

 

 

아름다운 그림속의 아름답지 않은 모습

 

 

이 책의 자랑은 무엇보다 350개의 아름다운 지도이다. 이 지도의 아름다움은 색채와 자료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기 어려운 그 지역의 속사정에 대해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중국을 설명하는 지도는 화선지를 이용하여 동양적 색감을 주고 있다. 아래의 지도는 2005년 현재 완공된 이스라엘의 장벽이다. 완공된 빨간 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장벽이 얼마나 자의적이며 제국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위의 빨간 색은 녹색 선의 한참 안쪽까지 세워져 있다. 그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인의 정착지가 있다는 이유다. 그 안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도 사로 있는데, 이와 같이 비상식적으로 세워진 장벽 때문에 10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사는 5,200은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스라엘 장벽, 책 106쪽>

 

이제 우리가 민족감정을 분출하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 이 책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알아보자. 독도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섬을 확보한 덕에 일본은 자기 영토의 열두 배나 되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지고 있다. 바다는 일본의 확실한 자원으로서 그 덕에 일본은 전 세계 어업 생산량의 12퍼센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고야와 치바의 항고에 집중된 조선업은 세계 제1위이고, 편의치적선(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 타국에 등록한 선박)을 제외하면 그리스 다음으로 많은 상선을 보유한 나라가 일본이다. 이처럼 일본에게 바다는 무척 중요한 자원이다. 일본 영토는 땅이 아니라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것이다.

- 글과 그림, 책 142쪽

 

 

위 그림을 보면 일본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도 영토분쟁, 아니 해역분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독도나 동해 명칭에 대해서 과도한 민족감정이나 여타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에 비해 일본을 철저히 실리적 외교를 펼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며, 독도와 동해 문제는 거대한 해상 계획의 일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지구본을 쳐다보면 평범한 공 모양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구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한다. 이 책은 지도가 하고 싶은 말을 구체적으로 재현했다. 강조해야 할 부분에는 좀더 큰 그림을 보여주고, 헷갈린 곳은 색깔을 이용해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 마치 아이들이 진흙놀이를 할 때처럼 이리 주무르고 저리 주물러서 만든 ‘움직이는 지도’이다. 때문에 이 책의 결론은 역시 ‘환경 문제’이다. 지도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전쟁’도 아니고 바로 ‘환경’이기 때문이다. 아예 지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이 책은 경고한다. 이 결론에 관해서는 이 책의 그림을 쓰기보다는 더 좋은 그림이 하나 있다.

 

 




 

<경향신문, 2005.9.23일자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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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5-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2기의 첫 작업인데, 시간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네여 ㅡㅡ;;

마늘빵 2007-05-1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걸 시도하고 계시는군요! :)

승주나무 2007-05-16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프 님//저의 인생은 언제나 도전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중용 대학 나남신서 668
이동환 역해 / 나남출판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동양사상 시리즈를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여태껏 사서를 정리하지 못했네요. 애초에는 한 달에 하나씩 다루려고 했는데, 무리했나 봅니다. 이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의 저항이 만만치 않네요. 이번 회부터는 '사회화'를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이번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총기난사 사건'입니다. 만약 고전이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면 현재적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전에는 항상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혹시 시리즈를 기다리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 있네요. 아래는 지난 시리즈의 목록입니다. 링크를 걸었으니 혹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양사상1]<논어> 정제된 인생의 철학적 시, 혹은 시적 철학

[동양사상2]<맹자>난세에 지성인으로 산다는 것

 

 

모든 學은 大學이라야 한다

- 총기난사사건과 관련하여

 

1. 사설

 

나는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을 문화가 저지른 살인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총기 허용에 대해서 대학은 '불행하지만 미국에서 총기 금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건이 學에 대한 심각한 왜곡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미국에서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은 한국으로 파견된 미군과 비교될 때가 종종 있다. 미군들은 잊어버릴 만하면 엽기적인 성폭행(60대 할머니를 성폭행하는 등)이나 폭력으로 매스컴에 이름을 알리며, 한국인 유학생들은 방황하는 문화상이나 그 안에서 배태된 '마약 문제', '각종 폭력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미국인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에 대한 결정판이 이번 총기 난사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실 이 사건은 한국에 더 책임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교육 문화가 이번 사건의 진범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은 으레 볼 수 있는 유학생 부적응자로 지금까지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미국 유학길로 내몰렸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10만에 가까운 유학생이다. 이들 중에 더러는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잠재적 부적응자가 자꾸 늘어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런 대목이다. 

 


미 이민세관국(ICE)이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를 기준으로 미국 유학생 감시시스템(SEVIS)에 등록된 한국인은 9만3728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에 있는 전체 외국인 유학생 63만998명 가운데 14.9%를 차지, 출신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 다음으로 인도(7만6708명), 중국(6만850명), 일본(4만5820명), 대만(3만3651명) 등의 순이었다.

- 美 한국유학생 10만시대···송금도 44억弗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번 사건에서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부분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미국에 유학보내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부모/학생의 경우는 미국 유학이 바람직한 진로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명문사학이라고 일컫는 이름 있는 대학과 교육 당국은 빠져나가는 유학생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대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내 글의 전매특허인 '사설'은 부담 없고 잘 읽히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지만 총기 난사사건과 같은 침통한 사건을 당하여 사설의 방향이 쏠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논어와 맹자에 대한 서평을 힘들게 쓰고 나서 대학과 중용은 빨리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 과목의 분량을 합쳐야 논어만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두 달이라는 공백기를 보내고 말았다. 그보다 나를 더 괴롭힌 것은 내가 정한 룰 때문이다. 대학을 쓰기에 앞서 나는 두 달간 '대학'만을 청취했다. 그래서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특히 관료주의처럼 체계가 딱 잡혀 있어서 극적 분위기도 나지 않기 때문에 대학을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때문에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른 대학에서 빠져 나와야지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2. 왜곡된 學과 大學에 대한 오해

 

學에 대한 왜곡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체성이 완전히 절단된 제국주의 시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는 제대로 된 學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진정한 독립국이 되지 못했으며, 광복은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최근 새삼 깨달았다. 굴욕적인 FTA 협상과정과 교육의 사회적 기능이 처참히 농락당한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하면서부터 나는 주권 없는 국가의 국민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것을 철저히 버리고, 서구의 문물에 경도된다. 전통문화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일제 시대를 중심으로 일제 이전 문화와 일제 이후 문화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가 되고 말았다. 學이라는 말 자체에는 '두 사람'이 전제되어 있다. 즉 혼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전수를 통해 연명하는 것이다. 교육과 학습은 매우 근원적인 문제이다.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끈이 놓아진다는 것은 아틀라스가 지구를 들다 말고 도망쳐 버린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상호적인 學이 개인적인 學으로 분리와 변질을 거듭하였고, 성찰이자 목적으로의 學이 도구의 學으로 전락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앎의 學이 헤게모니의 시녀로 전락한 것이 매우 결정적 타격을 안겼으며 이것이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사건은 물론 미국 유학 1위와 함께 문제아 한인 유학생들을 낳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學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식들 또한 헤게모니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선택에 의한 미국행이었다면 최소한의 책임이 있었을진대, 자의와는 무관하게 내몰렸다면 그 책임은 내몬 자 즉 한국사회가 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대학으로 돌아오자. 대학은 예기의 편명으로서의 위치와 사서로서의 위치를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사서로서의 위치는 소학과 대학이라는 교육의 두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삼대(하은주)가 융성할 때는 그 법도가 사뭇 잘 갖춰져 있었다. 때문에 왕궁이 있는 서울에서부터 일개 향촌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이 없는 곳이 없었다. 여덟 살이 되면 왕의 공자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으로 들어가서 청소하고 어른을 모시고 집안에서와 밖에서 해야 하는 행동지침과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점괘 보기 등 기본적인 교양을 가르쳤다. 그리고 열다섯이 되면 역시 천자의 자제나 대신의 자제, 그리고 서민의 자제 중 뛰어난 자를 가려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는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도를 심층적으로 익혔으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크고 작은 과목들이 적절히 분류되고 완성되었다.

- 대학 서문(주자)

 

그러니까 소학은 플라톤이 주창한 지,덕,체 중에 체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소학을 '초중등 과정'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천지자연의 형이상학적 이치를 초중등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풀어놓았고, 성찰의 근원이 되는 '행동의 표본'들을 축적하는 시기가 소학의 시기인 것이다.

이것은 송대(宋代) 이후의 관점이므로 대학의 본래 취지와 다를 수 있다. 대학은 원래 예기(禮記)라는 경서의 한 편명이었다. 여기서의 대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예기를 확인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學'에 관한 이야기로 갈음하려 한다. 한중일은 '배움'이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할까. 우리나라는 '공부(工夫)'라고 하고, 일본은 '면강(勉强)', 중국은 그냥 '學'이라고 한다. 공부는 불교 용어인 듯하다.  ‘공부(工夫)’는 수행에 전념하는 것, 또는 수행에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하며, 본분에 힘을 다하는 것이란 뜻이다. 공부(功夫)라고도 하며, 주로 선종에서 많이 쓰며, 선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면강(勉强)'은 원래 중용에 나온 구절로서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 고된 노력 끝에 실천할 수 있다)'의 의미이지만, 일본에서는 '산고와 같이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는 노력'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중국은 學이라는 일반명사를 쓰고 있다. 13억 중국인의 교과서인 논어의 가장 첫머리의 제목이 '학이(學而)'라는 말에서도 보듯 중국인들은 배움에 대해 별다른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환경일 수도 있지만, 공부에 대해서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미화하는 부분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수명사가 될 때, 그것은 자칫 특권의식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에 들끓고 있는 향학렬이나 식자층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 등을 종합해 볼 때 學은 보편성을 갖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분극복을 위한 주무기로 완전히 전락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양극화를 가장 고착화시키는 것이 바로 '학력 세습'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해라, 공부해라' 역시 일반명사로서의 學이 아니라 신분상승이나 신분유지,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도구적 특수명사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大'의 쓰임이다. 이 글자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大人과 巨人이다. 거인은 외양이 큰 사람을 의미하며 대인은 내면이 큰 사람을 의미한다. 즉 대인은 외양과 무관한 그 사람의 본질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大國과 强國은 어떤가. 강국은 미국처럼 깡패같이 힘만 센 나라를 지칭한다.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를 감화할 수 있는 나라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오해하는 말 중에 고학력자와 대학자가 있다. 고학력자는 가방끈이 긴 자를 말하는데, 이것 역시 대학자와 구분이 된다.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그가 비록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꺼이 그에게 '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겠다'(논어)라는 공자의 말과 같이 대학자는 가방끈과 상관 없이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대학은 '대인의 학문'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된다. 결국 대학이라는 말 속에는 人이 감추어져 있으며 강력한 휴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大學의 체계와 특징

 

대학은 한 마디로 삼강령 팔조목으로 규정된다. 즉 천성적으로 품부받은 선한 덕망을 확충시키는 데 있으며(在明明德), 이를 통해 만백성에게 혜택이 골고루 나눠지도록 하여 나날이 거듭나도록 만들며(在新民 또는 在親民이며 함께 해석함),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극한 선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데 있다(在止於至善)

이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배움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데 그것을 팔조목이라고 한다. 즉 온세계의 지도자가되기 위해서는 우선 국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국정에 앞서 가정을 잘 다독여야 하며, 온가족이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교양을 이뤄야만 한다. 이것이 행위의 준칙이다. 이어서 인식의 준칙이 나온다. 교양이 온몸에 충일하려면 마음공부를 바르게 해야 하는데(正心), 마음공부는 한치의 태만함도 없이 지극하고 전일한 성실함에서 나온다(誠意) 마음을 집중시켜 전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지의 안개가 걷혀야 한다.(致知) 지식의 최고 경지는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동화되는 데 있다.(格物)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이 역순으로 반복되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환의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상향식도 아니고 하양식도 아니며 상호 쌍방향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음양이론의 발현을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장구들은 삼강령 팔조목의 주석에 해당한다.

 

대학에서 재미있는 것은 지식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한계란 지식의 유한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식의 한계가 결정되는 순간 행동과 실천의 기반이 생긴다. 유학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행위를 위한 지식이기 때문에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양하고 있다. 서양과 달리 동양은 문자에 대한 독점현상이 강하지 않았다. 주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대학의 가르침은 몸소 행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고 있으며, 그것 역시 일반시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상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유학이 보편성을 갖게 된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다.

앞서는 '차등애'에 대해서 다뤘지만, '차등' 역시 유학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것은 대학에서도 드러난다. 사람마다 기질의 차이가 있고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듯이 氣는 단일하지 않다.이는 중용에서 더욱 명확하게 그려지는 데, 학과과정을 통해 학문수준이 높아지는 단계라는 것이 동양에서는 의미가 없다. 결국 스스로 깨달은 바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수학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일종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개념이 여기서 등장하는 데 이른바 '활연관통론(豁然貫通論)'이 그것이다. 남보다 몇 배나 더 노력했지만, 깨달은 바는 남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나 그 반대의 상황을 동양은 매우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일반적인 기준보다 자기 스스로의 기준에 더 신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한계를 단정짓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만의 굴레에 갇힌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굴레'로 단정짓기보다는 '잠재성'으로 인정한다. 만약 그가 굴레를 벗고 일어선다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번번이 소개되는데, 자발적 학습이 뿌리를 이룬 동양의 내면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4.  大學의 이상적 모델과 몇 가지 경고

 

앞서 대학이 휴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유학의 지향점이기도 한데, 한 사람의 인간으로 완성되는 정신이 바로 '심광체반(心廣體반, 반은 살질 반)'이다. 즉 덕이 온몸에 충일해 그 반반한 빛이 외양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인간형을 말한다. 일관된 인식과 실천을 보이는 지행합일의 인간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 유학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몸소 완성한 자는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있다.

중용으로 치자면 중용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군자라 할 수 있지만, 공자조차도 그런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고백한 바 있다. 때문에 대학은 군자가 진정한 군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피해야 할 점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학에서 백미로 치는 문장이다.

 

1. 마음에 노여움이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마음에 한줄기 두려움이 있어도 바름을 얻지 못하고, 따로이 즐기거나 좋아하는 바에 집착하면 역시 바름을 얻지 못하며, 따로 근심하거나 찔리는 바가 있어도 역시 바름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살펴도 보이지 않고,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2. 사람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따로 아끼고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미워하거나 천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역시 그에게는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두려워하거나 그 이름에 압도당하는 자가 있어도 역시 편파적이게 되며, 오만하거나 소홀히 다루는 자에 대해서도 편파적이게 된다.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와 미워하지만 그의 장점을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몹시 드물다.

- 대학 전문 7,8장

 

1은 '바름'을 방해하는 내적 요소이며, 2는 관계를 방해하는 외적 요소이다. 이것은 팔조목의 유기적인 순환을 몸소 갖추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다. 내가 바르게 살고자 하여도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이유는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당위만 있지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참여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결국 '불참정부'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성찰에는 끝이 없으며 '다가감'과 '햇볕과 같은 성의'가 있어야 도달할 수 있다.

 

5. '대학' 텍스트

 

교수신문이 펴낸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에서는 김학주씨의 텍스트(서울대학교출판부)와 함께 박완식씨의 대학(여강출판사)을 소개하고 있다. 두 텍스트를 읽어보지 않아 코멘트할 것은 없으나 교수신문의 평에 의하면 김학주씨의 텍스트는 정확하고 매끄러운 원문 번역과 상세한 해석으로 일반인에게 매우 접근도가 높다고 평하고 있다. 김학주씨는 온갖 동양고전을 다 역주한 분이지만, 나 같이 '천착형'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역주가라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소견이다. 노자와 장자를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박완식씨의 텍스트는 대학의 선구적 주석가인 주자의 주장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거기다 주자 이외의 설을 첨가해 주자를 보완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고 있다.

내가 접한 텍스트는 전통문화연구회의 성백효본이지만, 원문 텍스트 이외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이동환 씨의 『중용,대학』과 남회근 할아버지의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대학 강의』를 언급하고 싶다. 이동환 씨의 텍스트는 자구 해석과 용어는 고지식하고 어렵지만 '천착형'에게는 다소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것도 남명서당에서 교수님의 추천을 받은 텍스트라는 점을 밝힌다. 남회근 할아버지의 텍스트는 주자의 주석에 반해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책값이 비싸고 두꺼운 만큼 일상의 예시와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있으므로, '다양한 담론'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어울리는 텍스트라 생각한다.

 

 

 

 

 

6.  大學의 사회학

 

이번 총기난사사건에 대한 대학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이번 살인은 방황하는 청년이 아니라 문화가 저지른 살인이다.

2. 이것은 學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참극이다.

3. 미국의 수정헌법이 아니더라도 총기사용에 대한 금지는 불가능하다.

4. 협력사회, 협력문화의 힘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조선시대만 해도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국무회의에 상정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도 국무회의를 하고 있지만 '한낱 택시운전사의 자살'이라는 오늘날의 국무회의는 대체 어느 나라의 국무회의인지 부끄러울 지경이다. 조선이 살인사건에 대한 국무회의를 한 것은 사건의 희소성도 희소성이지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에 대한 당국의 유기적인 협력이 주 의제라 할 수 있다.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엽기적인 살인이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테러는 일어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 엽기적인 사건도 일어날 수 있는 사회분위기이며, 그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사회분위기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무방비하다는 데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학력신장을 위주로 한 교육 병폐는 그대로라고 진단했다.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어요. 대학을 가기 위해 전부를 걸었고 나머지는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죠. ‘학력신장’ 앞에 ‘인성교육’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
그는 학교교육에서 인성도, 학력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겉보기에는 두 마리 토끼 같지만 사실은 ‘한 마리’라고 했다. 학생들의 인간관계를 우선적으로 회복시켜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집중력이 생겨야 학력이 높아진다는 주장이다.

- 강석준 교장 “인성과 학력은 한마리 토끼”

 

 

"집안을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바로잡지 못하므로 군자는 집을 나서지 않고서도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는 말처럼 대학은 한 가정과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절대적이다. "일가가 仁을 이루면 국가에 인덕이 넘쳐나지만 한 사람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먹으면 국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는 말 역시 유의할 대목이다. 가수 김흥국은 4년째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데, 평소 보이던 이미지와는 달리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매우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김흥국 관련기사)이것이 우리 가정의 현주소다. 살인자 조승희 역시 방황하는 1.5세대 이민가족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두 가족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증거이다.

미국이 총기소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대학에서 이치로 증명하고 있다.

 

순임금이 천하의 사람들을 仁으로 이끌자 백성들이 이에 화답하였고, 폭군 걸주가 천하 사람들을 포악함으로 이끌자 백성들 역시 이에 화답하였다. 걸주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순임금의 인덕으로 이끌려 한다면 백성들은 극심하게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군자는 자신이 갖춘 것만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이 완전무결한 후에야 남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다.

- 대학, 9장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컬럼바인'이라는 다큐에는 '폭력의 미국 역사'가 잘 그려져 있다. NRA(전민총기협회)로 대표되는 대규모 로비 그룹은 헌법에 총기 소유를 명문화하는 데 일조했으며, 총기에 대한 여론을 압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행정부는 물론 언론까지 가세하여 전미에 공포분위기를 심어놓음으로써 무기 소비와 무기 개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디트로이트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캐나다 도시 윈저에는 3년간 총기 살인이 1건 발생했는데, 그것 역시 디트로이트에서 건너온 미국인의 소행이라 한다.

미국의 이야기는 그만 하자. 지면을 거기에 쓸 이유는 없다. 대학을 포함한 유학은 일상적인 수준의 언어 활용에도 불구하고 거론하는 사상의 외연이 광범위하다. 하늘과 땅은 물론 한 국가, 한 가정, 한 사람, 그리고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마음의 움직임 등에 대해서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용에서 아주 거침없이 펼쳐진다.

대학이 총기 난사 사건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1인으로 시작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왜곡된 學을 바로 세우는 것도 포함된다. 동양의 성어에 호리지차천리지말(毫釐之差千里之末)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우 터럭만큼 조그마한 차이가 천리가 넘는 차이를 만든다는 말이다.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 대학의 지론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에 표현된 협력문화와 국가의 운명에 관한 문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한 사람의 신하가 있는데 이는 매우 단정하면서 별다른 기술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맑고 깨끗해서 온몸에 관용이 넘쳐난다. 만약 자기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그는 마치 자신이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뻐하며, 지혜로운 뜻을 가진 사람이 보이면 마음 속으로 그를 신뢰하여 단지 입으로만 찬사를 늘어놓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더욱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이것이 바로 자손과 국민을 보존하는 사고방식이니 매우 커다란 이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을 질시하고 큰 뜻을 가진 사람의 메시지를 끝내 무시하여 그를 좌절시키고 만다. 이것은 자손과 국민을 재앙에 빠뜨리는 일이니 그 자체가 커다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 대학,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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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지구온난화가 전세계의 화두가 되면서 그 심각성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막연한 추측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막연한 추측에 머무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들은 실질적으로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주저하는 것이다.

둘째, 온난화에 적극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크고 작은 규모의 부담에 대해서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몇몇 국가와 다국적 기업의 이기주의로 인해 교토의정서를 포함해 중요한 환경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온난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재활용을 하거나 음식물을 줄이는 등의 기본적인 실천 이외에 체계적인 실천방향을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 국가시스템과 개인의 노력이 맞물려 돌아가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넷째, 스스로의 오만함으로 인해 인간은 생태계와 공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즈의 환경 전문 기자 출신인 저자는 지구온난화 문제의 실체를 다각도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제공하는 수치와 자료, 수치와 자료가 나타내는 상호관계, 미래의 대재앙을 경고하는 조그마한 변화 등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이미 자연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다음 차례가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협력과 대책이 지지부진한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즉 이해관계에 있는 국가와 기업이 눈앞의 손실에 급급해 미래의 대재앙을 방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지금도 온난화를 가속화하는 탄소 소비량은 은행 이자보다 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지구의 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현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어찌 되었건 간에 순조롭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공포로 불어넣는 테러리즘도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고가지는 않으며 이에 대한 대책 수립이 가능하다. 심지어 우주 괴물마저도 우리는 싸워서 이겨냈다. 하지만 자연의 재앙은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선진국, 강대국이라고 일컫는 국가들이 대부분의 환경 재앙을 조장하였으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 없고 가난한 아프리카나 제3세계의 국가들이 짊어져야 하는 극심한 모순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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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관심갖고 있는 주제인데, 요새 신문에서도 많이 떠들고, 책도 많이 나왔더라고요.

승주나무 2007-04-10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IPCC 4차 평가보고서가 나온 시점이라서 더 민감한 것 같더군요. 미국이나 중국은 또 '문구따먹기'를 했다죠. 추악하게스리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