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업의 정석

양로석에서 벌어지는 남과 여의 '추파'는 몹시 볼 만한 그림이었다. 특히 중년의 멋쟁이들이 나누는 '프로급'의 플레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나는 지하철에 자리가 없으면 양로석이나 문 옆 모퉁이를 자주 이용한다. 기대서 신문을 보기 위해서다. 그날도 양로석 옆 벽에 기대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한 아저씨가 가래를 끓여먹으며 멀뚱히 서 있었다. 나는 몹시 예민한 성격으로 아저씨의 행동을 흘낏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플레이'는 그때부터 나왔다. 아저씨는 맨 모퉁이의 멋쟁이 아줌마가 몹시 맘에 들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미끼'를 찾기 위해 두리번 살폈다. 좌석 위 짐받이에는 무가지와 '국민일보'가 널려져 있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신문을 얼른 빼들어 구석에 앉은 멋쟁이 아줌마에게 주었다. 멋쟁이 아줌마의 '플레이'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볼 때 멋쟁이 아줌마는 프로의 프로였다. 그 눈을 잘 알고 있는데, 매우 기대에 차 있고 재미있어 하며, 호기심어린 눈빛이었다. 멋쟁이 아줌마는 내숭을 떤다.

"어, 이거를 왜 제게 주시죠?"

황당한 말이 아니라 은근히 사람을 끄는 눈빛과 말투였다. 아저씨 왈

"멋진 아가씨가 신문을 읽어야지!"

"어머, 아저씨 멋쟁이다. 근데 어쩌죠, 저 까막눈인데."(쌩거짓말, 그러나 사실일 지도 모르겠다)

"아냐, 멋쟁이 아가씨가 까막눈일 리가 없어."

"이야, 아저씨 사람 볼 줄 아신다. 암튼 고마워요."

멋진 아줌마에서 멋진 아가씨로 '진급(?)'한 그 아가씨는 신문을 받아들고 핸드백을 뒤적인다.
핸드백 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이거 받으세요. 멋쟁이 아저씨에게 내가 명함을 드리지 않을 수 없지."

멋쟁이 아저씨는 명함을 챙긴다. 그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아가씨에게 화답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아저씨는 눈빛으로 '나 이 역에서 내려'를 보낸다.

"아저씨 연락주세요. 꼭 연락주세요."

아저씨가 내린 다음 나는 좌측 맨 옆에 앉았던 아줌마2가 그 아가씨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줌마2는

"그 사람, 아까부터 계속 가래 끓여먹던데, 어쩌자고..."

하면서 막 구박을 했다. 아가씨는 매우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그분들은 어떻게 통했을까. 아마 그것은 '프로의 눈빛'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쯤 그들은 경복궁 돌담길을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경포대 해수욕장이나. 그것도 아니면 아저씨는 집사람에게 일상적인 구박을 얻어들으며 '나만의 로망'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2. 할머니 감사합니다.

또 지하철. 역시 7호선은 한산하다. 하지만 아주 띄엄띄엄이라 나는 그냥 서 있으면서 빈 자리를 주시했다. 특히 나의 빈자리 의지는 지독하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건다.

"학생 저 자리에 가서 앉아요"

일반석의 할머니가 내게 '경로석'을 가리키며 말한 것이다. 경로석에는 두 분의 할아버지가 아주 여유롭게 자리를 정복(?)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할머니, 저 좀 있다 내리는데요 뭐. 그리고 저곳은 경로석이니까 제가 앉을 곳은 아닌 것 같아요"

할머니는 물러서지 않고 또 권한다.

"아니야, 빈자리에 사람이 앉는 게 맞는 거지. 경로석에 할아버지가 앉아야 경로석이지, 경로석이 빈자리면 그것도 별볼일 없는 거야. 가서 앉지 그래."

나는 할머니에게 연거푸 감사를 표시하며,

"그러면 저곳에 있는 빈자리에 앉을게요."

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할머니가 매우 고마운 이유는 나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경로석과 빈자리'의 의미는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대체로 나이드신 분들은 경로석 일반석 가리지 않고 독식하는 것이 사실이다. '독식'이라는 말은 '젊은이들이 앉아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양보한 자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앉는 것과 젊은이들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자리 양보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미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껄끄러운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이며 그것은 아마 할아버지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할아버지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다음에는 할아버지에게도 그런 권유를 들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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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5-1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이야기 보고 생각난 웹툰 ^^;

승주나무 2006-05-1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매지 님, 저 학상들 어쩌다 보니 개념이 없어졌군요^^;;;
실은 저와 할머니의 대화를 보던 할아버지 두 분의 표정이 저랬어요(무서버라)
한참 웃었습니다!!

마늘빵 2006-05-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