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산 책들 중에 양장본이 몹시 눈에 띕니다. 물론 가격이 싼 보급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계에 때 아닌 럭셔리 바람이 분 걸까요? 양장본을 내는 것은 출판사의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1. 1만8천원이냐? 1만6천원이냐?

출판 쪽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출판사와 접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책 출간 작업을 하고 있는 출판사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번역물인데 가격 결정을 몹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300쪽 가까이 되는 단행본이라면 15,000원이나 16,000원 정도가 적정선인데 18,000원을 고집하는 겁니다. 그러면 독자들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어서 판매에 도움이 안 된다고 설득했지만, 편집자는 16,000원으로는 도무지 수지를 맞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최종 판매가는 16,000원이 되었지만, 뒷맛이 씁쓸한 경험이었습니다.


#2. 분권 보급판으로 갈 것이나 단권 양장본으로 갈 것이냐?

소설 형식의 문답으로 되어 있고 세계 513명의 지성들이 출연하는 철학책 출간을 앞둔 사장님과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피의 세계>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제목이나 구성 등을 잘 풀어냈는데, 가격에서 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책은 550여 쪽에 가까운데 2권으로 나눠서 갈 것인지 1권 양장본으로 갈 것인지 고민이 깊었습니다.
저희는 두 권 보급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지만
결국 1권 양장본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1권을 사고 감명 깊은 사람이 2권을 구매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출판사는 없었던 셈이죠.
책 읽는 사람이 아무리 씨가 말랐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적적인 일이지만 책을 사서 구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서 문제이지 책이 좋으면 예상보다 더 잘 팔릴 때가 있습니다.
출판사는 이렇게 책을 구매해서 읽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더 지우는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양장본의 비밀이 그것입니다. 책도 시장에서 팔리는 소비재이지만 가격을 올렸다고 해서 판매가 엄청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 권이라도 사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책 값이 지금의 두 배로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사실상 출판사들은 그들과 공존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중형 서점들이 픽픽 쓰러지고 나서 다음 차례는 중견 출판사들이 문을 닫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무척 아끼는 출판사(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책을 출간했던)가 자금난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출판사는 다음 시대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출판사에서는 '출판투쟁'을 벌였습니다.
아직도 헌책방에 가면 그 때의 생생했던 투쟁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투쟁이 사실상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 그것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출판사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미래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씩 닫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미래의 문'들이 양장본이라는 마지막 문고리를 잡으며 바둥거리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이명박은 우리들이 책을 읽지 않기를 바라고, 출판사들이 문을 하나라도 다 닫기를 바랄 것입니다.

오늘 자본론 1-2권에서 무척 충격적이고 생생한 구절을 발견했는데, 마치 우리 나라의 기득권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이 섬뜩했습니다. 인용합니다.

그날그날의 노동에 의하여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은 오직 그들의 욕망뿐이다. 그 욕망을 완화시키는 것은 현명하지만 만족시켜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 노동하는 사람을 근면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적당한 임금이다. 너무 낮은 임금은 그의 성격에 따라서는 그를 낙심시키든가 절망적이 되게 하며, 너무 많은 임금은 불손하고 나태하게 한다.... 이상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가장 확실한 부는 다수의 근면한 빈민에 있다. 그들은 육해군을 위한 무진장한 공급원천이라는 것 외에도 그들이 없이는 어떤 향락도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어떤 나라의 생산물도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물론 非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행복하고 국민을 비참한 상태에서도 만족하게 하려면, 대다수를 무지하고 가난한 상태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식은 우리의 욕망을 확대시키고 다양화시키기 때문이며, 사람이 적게 바라면 바랄수록 그의 욕망은 보다 쉽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 <꿀벌들의 우화> 제5판, 런던, 1728년. 마르크스 <자본론> 1-2권(비봉출판사)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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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09-03-04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정말 숫자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아파지는 요즘입니다!

승주나무 2009-03-04 15:23   좋아요 0 | URL
글쵸.. 영업하시는 분들에게는 봄이 정말 멀게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미르비 2009-03-0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사회도,지식도,계급도 양극화 되어간다는데 이딴 구절도 그걸 재확인하는 슬픈현실...그리고 그게 현실에 주는 타격은...아- 뭐하나 맘에 드는 게 없는 세상입죠.

승주나무 2009-03-06 11:46   좋아요 0 | URL
맘에 드는 게 하나 없죠..
애초 기대는 버리고 맘에 드는 것을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9-03-0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프네요.

승주나무 2009-03-06 11:45   좋아요 0 | URL
네..양장본을 볼 때마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서.. 책의 고급스러운 품질을 음미할 수도 없어요ㅠㅠ

비로그인 2009-03-0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들은, 똑똑한데 독서율이 떨어져서..
인간성은 좀 들된것같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책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볼수있는 계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같은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종교에서 믿음을 찾기보단,
자신교, 즉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수있고 되돌아볼수있는 곳이
책교 라고 생각합니다.

승주나무 2009-03-06 16:03   좋아요 0 | URL
네.. 책을 읽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잘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면 독서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것 하나 배웠습니다. 자전가타요 님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9-03-06 16:03   좋아요 0 | URL
네.. 책을 읽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잘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면 독서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것 하나 배웠습니다. 자전가타요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