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행과는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누가 가자고 하지 않으면 집에 꼼짝 않고 앉아서 책을 파든지 글을 쓰든지 하는 전형적인 간서치라고나 할까요?
그런 제가 작년과 올해만 3번의 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세 번의 여행이 모두 뜨겁고 지친 순간에 도망가듯 훌쩍 날아갔습니다.
마녀의 빗자루라도 떨어진 걸까요? 의도하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의 힘으로 시사저널 독자소비자운동 마무리 지어

작년에는 시사저널 기자들이 회사와 결별하고 창간작업에 매진하고 있을 때 훌쩍 여행을 떠났습니다.
시사모는 참언론시사독자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년 동안 기자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1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고 평가도 좋게 받았던 '자발적 구독운동'은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고, 소박한 독자로서 너무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던 찰나 예스24 문학기행이 저를 불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남도여행을 2박3일 동안 하고 와서 온몸이 충전된 상태로 거뜬히 한달의 고단한 일정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자발적 구독운동은 전국 20여곳에서 6,000부 이상의 독자판(시사인 호외)을 배포하며 독자소비자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이 공로로 민주시민언론연합에서 2007년 민주시민언론상 본상을 수여하였습니다.


▲ 예스24 문학기행 때 황석영 작가와 은희경 작가를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작가 투어'가 시작됐습니다. (맨 왼쪽에 다리털 많이 난 사람이 승주나무 ㅋㅋ)





촛불에 길을 잃었을 때 나를 불러준 일본

촛불문화제가 있는 날이면 줄기차게 따라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취재도 하고 인터뷰도 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퍼나르는 데 주력하다가 직접 목소리를 외치며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뭐든지 처음에는 신이 나지만, 나중에는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게으른 성격이기도 하지만, 촛불의 지속성과 '분화'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물리적인 의미의 촛불은 심지가 다 말라가니 이것이 에너지변환의 법칙에 의해서 고스란히 다른 형식의 에너지로 전환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인데, 답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경찰이 강공으로 나가고 대통령과 장관, 한나라당 정치인들이 측면지원을 해주면서 촛불은 황급히 꺼졌습니다.
현장에 있는다는 것이 괴롭고 무기력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사용해서 스크럼을 넘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이 나를 불렀습니다.
일본인 손윗동서에게 시집간 처형의 초대로 가족들이 일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사카성을 비롯해 오사카 등지를 여행하였습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이 맛난 것 많이 먹고 신기한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에 남는 것은 NHK 건물 1층에 있는 시립박물관 로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공작하는 법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준 일입니다. 세대를 건너뛴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함께 갔던 조카 둘은 일본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신나게 종이접기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 일본 할머니와 한국 손자/손녀들이 함께 모여 공작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사실 조카들이 할머니들과 놀 때 저는 동서 형님과 저만치 벤치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일본 여행 이후에 별다른 해법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거리에서의 고통을 치유해준 것은 오히려 기형도라는 시인이었습니다.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 기형도, 시작 메모

나도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의 소음과 구호 소리, 음악 소리는 모두 하나의 시어로 나에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신호에 응답하는 근사한 시는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나는 최소한 거리의 촛불에너지를 시 에너지로 변환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찾았습니다. 일본여행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큰무덤

부덤보다 차가운 길바닥에 매달려 있던
촛불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가 죽었다
새로운 촛불의 주인이 나타나 또다시
곤봉과 방패에 살해됐을 때도
사람들은 자꾸 나타나 기꺼이 죽었다
내가 기꺼이 죽을 테니
촛불을 더 달라고 성화다

무덤에는 사연이 많다.
더러는 너와 몸을 섞었던
치욕스러운 겨울밤을 잊고 싶어
죽음을 자청하기도 했고
물론 그보다 사소한 죽음도 있었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무덤이 하나씩 세워졌는데
금세 사연 많은 큰 무덤이 만들어졌다

큰무덤 위에 누가 초를 꽂았다
촛불에도 사연이 많다
불나방처럼 촛불을 품에 안으려다 날개가 다 타버렸다
사람들이 촛불 앞에서 쓰러질 때마다
빛은 사연을 더해 갔다.
만 가지 사연을 가지고 애타게 타고 있는 촛불이
곧 꺼질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에서 촛불의 내력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2008년 6월 27일. 거리에서





나의 빈 '상상력 그릇'을 채워준 지리산 여행

지리산 노고단은 나에게 '체력장'이자 詩의 스승이었습니다.
나는 일부러 아무런 글을 쓰지 않았고, 몸으로 남도 땅을 맞았습니다.
남도의 바람과 땡볕과 기후를 받아먹으며 서울촌놈의 땟국물을 남김없이 털어내려 노력하였습니다.
최대한 서울의 사연들이 틈입하지 않는 시적이고 신성한 여행을 그려나갔습니다.


▲ 노고단은 나에게 '술 좀 그만 처먹어라'거나 '젊은 놈이 저질체력이기는' 같은 조롱을 한껏 내뱉었습니다. 땀이 버범이 되고 찜찜한 습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도 바람 한점 보내주지 않다가 정상에 올라가서야 이슬과 바람을 뿌려주었습니다. 나는 노고단에게 한껏 욕을 해주고는 마음속으로 절을 수십 번도 더 했습니다. 서울촌놈으로서는 몹시도 귀한 대접을 받은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 술냄새를 따라 섬진강변을 흘러가다가 인적이 드문 식당 평상에 엉덩이를 깔고 일단 지역 토속 술인 잎새주에 전어회를 곁들였습니다. 전어회는 정해지지 않은 메뉴였는데, 누군가 반드시 질러야 하는 상황에서 정의의 용사 한 분이 기꺼이 지갑을 열어 주었습니다. 메기와 참게로 끓인 매운탕에 노곤함을 잊고 운전사 둘은 대리운전을 부를 요량으로 술잔을 거푸 집어들었고, 나머지 장롱면허를 소지한 사람들은 '뜬금운전'(뜬금없이 운전을 하게 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오버액션을 취했습니다. 건배의 이름이 '운전해'였습니다. 잔을 비우지 않으면 운전을 하게 되니 알아서 먹으라는 거지요. 누가 보면 유치찬란하다고 하겠지만, 지역에서는 원래 이렇게 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도 뒷이야기는 할 것이 너무 많지만 대부분 자랑질에 머무르기 때문에 승주나무 개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남겨 보았습니다. 아 참, 여행마다 함께 했던 꼬맹이 혹은 어린이 선물 이야기를 깜빡 했습니다.




섬진강변 주막에서 아이들과 셀카 한컨 찍었습니다. 쌍둥이 녀석들이 자꾸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사진 몇 장 더 찍으면서 놀았는데, 가려고 하니 무척이나 섭섭해 하더군요^^

공교롭게도 세 번째 여행을 하면서 초대형 스펙터클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의 산시령(山詩靈)께서 보살펴 주셔서 상상력 그릇을 조금 채웠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제가 남도 출신(제주도)인 관계로 남도에만 가면 큰 힘을 얻고 오는 것 같습니다. 세 번의 여행 모두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청량제처럼 뿌려진 기회였습니다.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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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9-0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비우는 일, 여행은 바로 그런 걸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재충전의 기운을 넣어 준 여행으로 승주나무님의 프로젝트가 완성되기 바랍니다.^^

승주나무 2008-09-07 20:22   좋아요 0 | URL
네~ 여행을 통해 마음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무리한 여행이 아니라면 여행은 대체로 신선한 자극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는 꼭 성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울보 2008-09-0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다 멋진 여행을 하셧네요,

승주나무 2008-09-07 20:23   좋아요 0 | URL
행운을 얻었지요^^

하늘바람 2008-09-06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부럽네요 이런 여행이어야 하는데

승주나무 2008-09-07 20:23   좋아요 0 | URL
^^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은 새로운 종류의 깨달음인 것 같아요~

2008-09-06 0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9-07 20:2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무척 아쉽습니다~

Koni 2008-09-0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여행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는 여행이란 그야말로 로망.

승주나무 2008-09-07 20:24   좋아요 0 | URL
네~ 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로망 그 자체죠^^

2008-09-11 0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1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