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국가보안법 사수, 한미동맹..
군복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타자와 나를 구분하는 유니폼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군복인데,
군복은 적군과 아군을 철저히 구분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적어도' 2년 동안 군복을 입어야 하는데
군복이 정치적인 아이콘으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보수적 가치를 사수해온 나이든 군복
2004년 5월 24일 서울 남부지방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 3명에 대해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하던 날 오후 서울 남부지법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법원의 판결을 규탄하는 재향군인회의 집회였다. 그들은 "국가안보 위태롭게 하는 법원의 판결에 650만 향군 통곡한다"라든지 "사이비판사 각성하라"같은 과격한 피켓을 들고 규탄집회를 벌였다.
재향군인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사진)
2004년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고 나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으로 벼랑까지 몰리고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지만, 한켠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탄핵 가결일로부터 보름 후인 27일 탄핵안 가결에 찬성하는 80여개 보수단체로 구성된 ‘바른선택 국민행동’이 광화문 동화면세점 ‘나라사랑 문화 한마당’을 열어 ‘아, 대한민국’ 을 부르며 탄핵을 지지했다. 그들은 “북한 동포도 우리 국민이고 다들 어렵게 살고 있는데, 국제사회의 대북 인권결의안을 포기한 노무현은 김정일의 똘마니”라며 “노무현은 하야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던 2004년 3월 재향군인 등 보수단체들은 탄핵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 : 연합뉴스)
이뿐만 아니다. 재향군인회는 2004년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 뜨거웠을 때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시청앞 광장은 인공기로 뒤덮이고 친북·좌경 세력에게 이 나라를 넘겨주게 될 것"이라며 국보법을 적극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는 등 사회 여론과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왔다. 평택시민들이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면서 폭력시위를 벌인다는 이유로 이들을 강경진압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향군회법은 ‘재향군인회는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3조)고 규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조항이 무색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군복이 우리 사회에 드러낸 이미지는 고착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군복의 새로운 이미지가 2008년 대한민국에 찾아왔다.
2004년 10월 재향군인회는 국가보안법 사수와 의문사위 해체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집회를 했다. (사진 : 한겨레)
2008년, 군복과 애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다
이어폰을 끼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젊은 군복이 2008년 광화문의 촛불문화제를 주도했다. 이들은 촛불문화제와 거리행렬에 참여한 시민들을 전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띠를 만들거나 스크럼을 짰다. 이로서 예비군들은 유모차 부대와 함께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그들은 왜 군복을 입었을까? 먼저 군복을 입은 장정들은 같은 장정인 전경에 대적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항마가 될 수 있다. 유니폼은 전경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집회를 평화적으로 이끌 수 있다. 전경은 정부의 명령을 받기 때문에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진압은 강경진압으로 오해되기 쉽고, 여성에게는 성희롱, 학생에게는 폭력이라는 오해를 사기 충분하다. 이에 비해 예비군들은 시민들이기 때문에 호감을 얻을 수 있고, 폭력시위 근절이라는 전경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즉 예비군은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의 역할과 시민과 전경을 함께 보호하는 중재자의 역할도 할 수 있다. 군인이란 전역을 해서도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보여주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30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문화제를 마친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에 나서자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자원봉사자들이 행진 대열을 보호하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차로에 늘어서 있다 (사진 : 한겨레)
내가 군복에 감명을 받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군복이 가지고 있는 국가주의적인 편견을 시민적 에너지로 치환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군인도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시민이라는 당연한 상식도 환기해 주었다. 군대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지만, 군복이 이렇게 아름다워보인 적은 난생 처음이다.
30일 밤 美쇠고기 시장 개방 장관고시 강행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예비군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다. (사진 : 뉴시스)
군복과 함께 해방된 것은 태극기로 상징되는 애국심이다. 태극기가 국가주의에서 진정 해방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뿌듯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반공사상을 국시로 여겨 국가주의를 세뇌당했던 오랜 기억들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나도 어릴 때 반공글짓기에 열성이었던 어린이였으며, 꿈에서도 김일성을 죽이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나의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은 국가주의에 깊이 감염된 상태였다.
5월 8일 밤 여의도에서 펼쳐졌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의 행렬 위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2006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스위스전이 한창일 때 태극기로 투피스와 한복을 만들어 입은 커플이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사진 : OSEN)
빨-병 (-甁)
먹는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그릇. 병같이 생겼으며 끈이 달려 있어 메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등산이나 소풍을 갈 때에 흔히 사용한다. (국립국어원)
순우리말인 빨병은 최근까지 금지어였다. 빨아먹는 병이라는 의미의 빨병에서 '빨간색'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레드 컴플렉스라고 하는데, 2002년에 와서야 우리는 이것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태극기는 2002년 월드컵에서부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태극기를 필통이나 책가방에 걸어놓는가 하면 아예 몸에 두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2008년 청계천, 여의도, 광화문, 시청에서 드디어 '애국'이라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국가주의가 개입되지 않았으며, 시민적 에너지가 충만한 '애국'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얻은 것이다. 여의도에서 만난 한 학생의 한마디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정책에 반대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애국이다."
한달 내내 게속된 거리의 학교에서 내가 얻은 소중한 가치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