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제주 4.3특별위원회를 폐지하기로 내부결론을 내린 이후에 한나라당은 제주 4.3특별법에 대한 개정안을 상정한 데 이어, 보수 단체들은 4.3을 폭도들의 반란 쯤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 글은 그들의 논리에 대해 비판하기 전에 제주 4.3에 무참히 살해된 희생자의 유족으로서 그간 경험한 제주 4.3에 대한 갖가지 인상들을 기록한 글이다.

'지식인'은 죽여야 할 존재였다.

내가 제주 4.3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대학시절인 1997년에 나는 어머니에게 최초로 4.3에 대해서 물었다. 그 전까지는 4.3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극도로 두려운 표정으로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 같은 반응이 매우 이상했다. 하지만 제주에서라면 그것은 별로 이상한 장면이 아니다. 학부때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나는 여름이면 제주의 곳곳으로 학술조사를 다녔다. 당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채록'이었다. 사투리나 민요, 역사에 대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기록해 보고서에 반영하는 것이 학술조사의 주 목적이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반드시 소주를 몇 병 사고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노인들은 '역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술을 따라 드리고 오랜 시간 동안 춤추고, 노래하고, 설득한 후에야 기억의 편린들을 꺼내놓으신다. 이처럼 제주 도민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외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지식인이었다. 한학에 관한 방대한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고, 동네의 대소사에 있어서 중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외할아버지는 정체 모를 자들에게 끌려갔고, 그 후로 다시는 외할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를 끌고 간 사람들이 경찰이었는지 아니면 '폭도'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외할머니의 그후의 행동들을 보면 누가 끌고 갔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외할머니는 칠흑같은 밤 2~3시 경에 외할아버지의 장서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몇날며칠을 태웠다고 한다. 만약 그 장서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면 엄청난 재산가치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렇다면 그런 소중한 장서들을 외할머니는 왜 불살라버렸을까? 그것은 남은 가족이 '지식인의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기득권에게 '지식인'은 기피대상 1호였다. 아마도 지식인이 당시의 상황을 냉철히 분석하고 증언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서중석이 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웅진 지식하우스)에서는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가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다가 경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김영배의 사진을 전하고 있다.
지식인의 가족되 예외가 아니다. 지식인은 죽은 이후에도 '불순분자'의 딱지가 유족들에게 그대로 남겨진다. 바로 '연좌제'다. 무고하게 살해되었건 법률에 저촉되어 처형되었건 간에 척결된 자의 유족은 언제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장서를 남의 눈 안 띄는 시간에 태운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연좌제', 죽음으로도 씻지 못한 영원한 사슬

한국전쟁 전후로 제주 출신의 젊은이들은 해병대에 많이 지원했다. 단지 살기 위해서였다. 개인으로서 국가에 반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짐이다. 평생 반역자, 반동, 폭도라는 소리를 들어온 제주 젊은이로서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이제까지 자신을 억눌러온 '반역'이라는 사슬을 풀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익단체들은 목숨을 걸고 폭도를 진압했던 군경의 노력을 악의적으로 훼손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진압의 방법이 다소 감정적이었지 않은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야 한다. 당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투표를 거부한 것은 제주 지역이 유일했다. 투표 거부로 정통성을 훼손당한 이승만은 '제주를 폭파시켜도 좋다'와 같은 충격적이고 과격한 말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진압병력과는 별도로 '서북청년단'이라는 단체를 파견한 것은 그 의도가 매우 악의적이다. 서북청년단은 누구인가. 북한의 기득권층의 자제로 활보하다가 북한의 공산정권이 토지와 사유재산을 몰수하자 저주를 퍼부으며 남한으로 도망친 자들이다. 그들의 눈에 제주는 일생의 원수들이 군집하는 온상이었으며, 제주 도민들은 이들을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제주 도민들은 군경의 학살보다는 서북청년단원들의 학살행위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다. 군경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강조하는 우익단체들은 숭고한 군경 외에 서북청년단원들을 제주로 투입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적절히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제주 도민들의 진압 작전을 주도했던 서북청년단원을 제외한 채 군경만을 거론하는 것은 역사의 엄연한 주체를 애써 외면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연좌제란 본인이 어떤 죄목으로 처단을 받은 뒤에도 유족들에게 일련의 제재가 유지되도록 하는 악법 중의 악법이다. 이른바 폭도이거나 폭도를 지원한 주민이거나 군경(또는 서청)에 의해 학살된 자들의 유족들은 공무원직은 물론 일반 기업체에도 취업이 제한돼 있었으며, 이 외에도 각종 불이익이 당연시되었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4.3의 피해주민들을 폭도라고 매도하는 마당에 연좌제의 기억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든 존속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심각한 우려를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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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2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8년인가 제주도에 갔을때 탔던 택시기사 아저씨가 여기는 그때 일하고 관련없는 집이 별로 없어요라고 하던 말이 참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약간 주저하며 제 질문에 말을 흘리듯이 대답해주시던 그 택시 기사 아저씨. 그 아저씨가 그 말을 꺼낼 수 있게 되는데도 얼마나 엄청난 시간이 흘렀던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주의 그 눈물들을 제대로 닦아주지도 못했는데 위원회 폐지라뇨? 역사의 수레가 뒤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은 맘만 간절한 요즘입니다.

승주나무 2008-02-04 20:01   좋아요 0 | URL
친일파의 망언과 무엇이 다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파 더 월드~

웽스북스 2008-02-0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는 몸으로 겪어냈고,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앞으로 얼마나 더 기막힐 일들이 많이 남아있을지, 아찔하네요

승주나무 2008-02-04 20:01   좋아요 0 | URL
정말 이게 머리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네요~

마노아 2008-02-0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갚아야 할 부채가 구만리인데 부채의 규모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안 갚는다. 배째라! 이런 꼴로 보여요. 이 갑갑증이 5년 버티면 사라질런지... (ㅡㅡ;;)

승주나무 2008-02-04 20:02   좋아요 0 | URL
확실히 정리해야 할 때 정리하지 못하면, 이런 일이 무수히 반복되는 것 같아요. 과거사를 확실히 규명해도 뒷말이 나오는 상황이니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