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말이었던 것 같다.
자기 일신의 영위를 위하여 혹은 피붙이의 번영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개개인과,
국가의 안녕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는 정치인들 중에서
누가 더 세계에 기여하느냐고.
'자신을 희생한다'는 말은 순전히 결과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단지 희망사항으로 '희생'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정말 죽어버리거나 희생을 치른 사람에게는 이런 명예를 허락할 수 있다.
문제는 '말로만 희생'이다.

대체로 공명심이 대단한 사람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며, 공적인 것도 얼마든지 '공익'을 위해서 사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싫은 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단정지으면서
자신의 호불호가 타당한지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심지어 뇌물로 배를 따뜻하게 해도 그것은 자신이 배부른 게 아니라 국가가 배부른 것이라 생각한다.
급기야 자기 스스로에게도 행위의 공정성과 불편부당성을 세뇌시키는데,
신정아에게만 "공상허언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병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천만 년 전부터 내려온 '방어기제' 때문이다.

공명심에 대한 알라딘의 스펙트럼은 꽤나 다양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일종의 '공명심'을 가지고 쓰는 것일 테니.
재미있는 것은 '공명심'이 득세하면 '성찰'이 자리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통스런 '성찰'의 과정을 밟으면 공명심이 훨씬 근사한 행위로 거듭난다.
성찰은 결국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성찰의 부재 상태가 막장까지 가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똥이나 오줌처럼 말을 "싸고 갈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말을 싸고 뿌리고 갈기는 영역은 호사가들의 일이므로 언급의 가치가 별로 없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처럼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이 시작된 계기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파장을 생략하기 쉽다.
그러면 어찌 되었든 간에 '나쁜 말'이 되는 거고,
이런 나쁜 말이 쌓이면 스스로 돌아갈 길을 막아버리게 된다.

'알라딘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좀더 솔직해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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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10-0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다. 추천이다!

비로그인 2007-10-07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글 읽고 갑니다.

2007-10-08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