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소설가인 은희경 씨는 그의 데뷔작인 <빈처> 이야기가 나오면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한다. <빈처>는 바뀐 제목이며 원제는 <똥>이었다. 작품 제목에 <똥>이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데뷔작'일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의 현명한 친구는 이렇게 충고를 한다.
'만약 당선이 안 된다면 모르겠는데 당선이 된다면 평생 이미지가 남는다. '똥으로 데뷔한 작가'가 되는 거야!'

이 말을 듣고 은희경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당장 <빈처>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의 데뷔작은 <빈처>로 결정되었다. (<오마이뉴스>2007년 8월 16일자 보도, "은희경의 이야기를 듣다")
<시사IN> 창간호가 나오던 날, 따끈따끈한 새 매체를 안고 감동할 새도 없이 일이 터졌다. 28쪽 기사꼭지와 꼭지 사이에 마감이 없이 이어진 것이다. (아래 그림)




<기사꼭지와 기사꼭지 사이에 마감표시를 통해 기사가 전환되었다는 것을 정상적으로 표시한 52쪽과는 달리 28쪽은 마감표시 없이 다음 기사가 이어진다. 앞 꼭지의 마지막 부분이 날라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시사IN>은 독자에게 매우 쓰라린 문제점 두 가지를 노출시켰다. 관계자들이 회의에 들어갔다. 당시는 이미 일부가 인쇄된 상황이어서 적지 않은 추가 비용이 필요했다. 구체적인 협의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 <시사IN>은 잔여분의 인쇄를 강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대목에서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째, 인쇄를 강행한 것은 '비용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한 듯 보인다. 특히 독자들의 피 같은 쌈짓돈으로 이루어진 밑천에 대해서 책임자들은 거액의 손실을 감수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창간호'라는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사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창간호 옆에는 '제작사고'라는 해프닝이 항상 따라다닐 것이다. 게다가 <시사IN>은 기존의 언론체제에에 저항하며 만들어진 매체이기 때문에 '적'들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매체의 품위 운운'을 하려 든다면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시사IN>의 현실인식이다. 편집 책임자들이 독자의 종잣돈을 의식해서 정당한 조처를 취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14개월 넘게 싸워왔던 '편집권'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횡포에 굴복해 기사를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사건은 <시사IN>과 독자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참언론독자단>은 이미 10월 16일을 '관계청산'의 시점으로 선언하고 마지막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그같은 결정은 비단 <시사IN>을 언론시장으로 떠나보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고착화된 관계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문제점과 '우연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생각보다 일찍 터졌다. 지금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시사IN>은 아직도 '독자' 혹은 '독자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시사IN> 기자들의 투쟁에서부터 새 매체 창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했던 독자로서 엄중히 요청한다. <시사IN>은 독자들을 잊으라. 독자들의 돈을 잊으라. 독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완성하라. 이것이 <시사IN>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시사IN>은 아직 이 과제를 풀어내지 못한 듯하다. 독자의 친구 <시사IN>을 만나게 되는 시점까지 '창간의 기쁨'을 유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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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운 일이네요. 시사IN편집자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독자단의 눈이겠죠. 거기다 창간호에 저런 사고로 독자단의 돈을 낭비하게 된다면 편집자들이 얼마나 고민했을지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역시 님의 말대로 그들이 독자단이라는 스스로가 얽어맨 굴레에서도 자유로워지는것에 시사IN의 미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추천을... ^^

승주나무 2007-09-18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독자단의 일원으로서 이러한 지적을 하는 데 대해서 <시사IN> 못지 않게 심히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시험에 들게 한 기자들에게 원망스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성장통'으로 받아들입니다. 추천 감사히 받습니다^^;

웽스북스 2007-09-1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글 읽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정말 옳은 지적입니다
알라딘에서 승주나무님께서 하고 계신 캠페인을 조용히 보고 응원하면서 오늘 저도 시사인을 한권 구매했고, 승주나무님 글을 보기 전에 저 부분을 읽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저 기사를 정말 재밌게 읽고 있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앞뒷장을 펼쳐보며 찾고 찾고 했었지요. 앞부분에 표지이야기를 읽으며 진정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역할을 시사인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독자단의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겠지요. 오히려 이 일은 시사인의 앞날에 상징적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승주나무 2007-09-20 00:18   좋아요 0 | URL
웬디양 님..감사합니다.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겠죠..
다만 제가 <시사IN>에게 지적한 문제는 '독자'에 대해서 좀더 성숙하고 주체적인 인식을 가져 달라는 것입니다. 권력으로서의 독자와 약자로서의 독자를 잘 구분해야 하겠죠^^
저도 역시 이 사건이 보약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소 2007-09-2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글 덕분에 '시사In' 사자마자 그 부분부터 확인해봤어요. 히힛. 홈페이지 가보니 누락된 한 줄 내용이 나오더군요.^^; 그나저나 나름 꼼꼼하게 준비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의외로 심각한 오탈자가 눈에 띄어서 놀랐어요.ㅠㅠ 특히 40쪽 "외골수라기보다 부화뇌동 않했을 뿐" 이란 타이틀 보고 헉!!! 띄어쓰기는 둘째치고 명색이 시사잡지에서 안/않의 구분을 제대로 못하면 어쩌란 말인지.;;; 물론 단순 실수이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넘기기엔 그게 타이틀로 굵게 표시가 돼 있어서 눈에 너무 확 띄더라구요.ㅠ 다음 호에는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외에는 참 좋았어요. 앞으로 열심히 사보려구요. ^^ (그리고 이 글 추천합니다.^^)

승주나무 2007-09-28 00:40   좋아요 0 | URL
다소 님..제가 제주에 있다 보니 댓글을 이제야 살폈습니다. 깊은 관심 감사합니다. 가까이서 보았는데.. 창사와 창간을 함께 하는 모습이 다소 측은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다소 격앙된 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추스리고 본 궤도로 진입하리라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