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님을 아시나요?
천병희 선생님을 아시나요?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퀼로스는요? 음, 그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요? 이런 점층법의 맹점은 알 만한 내용은 뒤에 있는데 정작 알아야 할 내용은 앞에 있다는 겁니다. 천병희 선생님은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의 태두라고 할 만한 분으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같은 고전문학에서 그리스 희극, 비극,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주요 그리스 라틴 고전을 (중역이 아닌) 원전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간 번역하신 책만 주욱 늘어놓아도 페이지가 꽉 찰 지경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번역 외에는 딱히 하시는 일이 없으실 정도로 이 일에 몰두하고 계셔서 그간 '접선'이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숲 출판사의 '원전으로 읽는 순수 고전 세계' 이벤트(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00705_soup)를 준비하면서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고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누구나 말은 하지만 정녕 읽은 이는 별로 없다는 고전의 세계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왜 고전 번역인가
첫 질문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문득 그리스 고전과 신화의 관계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스 라틴 원전'이라고 하면 흔히 '신화'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고전은 어떤 관계인가요?
그리스 신화가 그리스 고전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신화는 재미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서사시와 많은 비극의 소재가 되긴 했으나, 그 자체가 고전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그리스 고전 하면 신화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수많은 고전의 소재가 되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서양에는 그리스 신화 외에 게르만 신화와 켈트 신화도 있고 이를 형상화한 문학 작품들도 있지만,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말고는 고전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동양에도 나라마다 신화가 있지만 이를 소재로 한 고전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서양에는 중세, 근대, 현대에 씌인, 신화를 소재로 하지 않은 고전들도 많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많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요?
그리스 시대에는 수많은 서사시들이 낭송되고, 그에 못지 않은 비극과 희극이 무대 위에서 우열을 다투었습니다. 비극의 경우 다른 비극 작가들은 차치하고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가 쓴 것만 해도 300편이 넘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33편뿐입니다. 두고두고 읽힐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작품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곧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리스까지 갈 것도 없이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수많은 ‘연속극’과 신문의 ‘연재소설’ 가운데 우리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은 까닭도 작품의 소재나 양식을 떠나 독자에게 오래도록 감동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시대와 상황이 변해도 여전히 독자에게 살아 있는 화두로 다가오고, 언제 읽어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아니 읽을수록 더 감동을 주는 작품만이 고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선생님께서는 말 그대로 '평생'을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에 바쳐오셨습니다. 혹자는 '집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무엇이 선생님을 고전 번역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에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번역도 창작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의 구마라습이나 현장법사의 한역(漢譯) 불경들은 동양의 대승불교 사상의 형성과 완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의 불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 라틴 고전도 우리의 사고 지평을 넓혀주고 심화해줄 훌륭한 영양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 문명은 서양 역사 전체를 통틀어 후대에 가장 빛나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공직자들을 투표로 선출하고, 민회에서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꽃피었고, 철학, 역사, 서사시, 드라마, 조각, 건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로마는 물론이고 서유럽이 빨리 야만을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 문화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르네상스’란 다름 아닌 그리스 문화의 부활 그 자체입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문화 전반에 적용하여 유럽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주석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선생님의 평생을 사로잡은 그리스 문화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그리스 문화에 끌린 까닭은 그리스인들이 지식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알아도 안다고 우쭐대지 않고 겸손하며, 누구와도 대등한 입장에서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어도 지나치게 잘난체하는 사람은 독재자가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도편추방’ 제도를 통해 재산은 몰수하지 않고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한 것입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장군 겸 정치가로 풍전등화의 지경에 놓인 조국 아테나이를 구했으며, 어쩌면 서양이 페르시아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은 만고영웅입니다. 하지만 아테나이인들은 한 영웅보다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더 사랑하여 그에게 가혹한 처분을 내렸습니다. 무엇이든 통치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기보다는 잘잘못을 따져보고 행동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 그런 아테나이인들이 나는 부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스 3대 비극]
왜 고전을 읽는가
다시 원전 번역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조금 거친 질문이지만, '꼭' 원전을 읽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배우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입학하자마자 취업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라틴 고전을 편역하는 수준을 넘어 원전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요즘은 한두 가지 외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번역본이 잘 팔리면 원서가 덩달아 팔리기도 하고요. 그리스 고전은 서양 문화의 뿌리라 해당 언어권마다 기준으로 삼는 판본도 있는 줄 압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번역본에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어 번역에 임하시는지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잘된 우리말 번역이 잘된 영역이나 독역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원전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어를 배운 지가 벌써 50년이 훨씬 넘었고 번역할 때면 영역 몇 가지와 독역 몇 가지를 참고하니까 계속해서 독일어와 함께하는데도,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잘된 독역이라도 읽어보면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일 경우 말입니다.
고전이 중요하다는 말은 누구나 하지만 정작 고전을 찾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은 현실입니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끊임없이 회자되는데요. 선생님께 답을 구해보고 싶습니다.
이 살기 힘든 세상에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대답하기가 참 쉽지 않은, 어쩌면 불가능한 매우 오래된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이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지금 같은 물질만능의 시대에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겠지요. 여기서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우회적인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몸으로 하는 일인 사람은 타고난 노예라고 했습니다. 스포츠 선수들과 탤런트들이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우리 인간은 이성에 따라 정신적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몸을 위해 충동에 따라 몸으로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과 인간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다른 동물들의 행복처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신적 가치'라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요? 고전이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를테면 여가 시간에 스포츠나 오락물만 관람하고 육체적 스트레스만 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음악도 듣고 연극도 관람하고 미술관을 찾아 명화도 보고 친구들과 어울려 유익하고 재미있는 대화도 하곤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틈틈이 고전도 읽고 클래식 음악도 듣고 친구들과 독서회나 음악 감상회 같은 동아리 모임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삶이 인간에게는 더 의미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신의 가치를 믿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사회도 더 인간적이 될 것입니다.
[삶의 지혜를 주는 고전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회 얘기가 나왔으니 논의를 조금 넓혀보겠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횡행하는 요즘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인문학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에게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이 목적이고 돈은 그 목적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도, 마치 돈이 전부인 양 너도나도 돈에만 매달리고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는 결국 소수의 부자들 말고는 모두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부(富)는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직 자신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 돈을 벌자마자, 여태까지 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양 명예까지 요구하는 풍조가 만연한다면, 그런 위선적 사회는 더불어 살기가 힘들어지고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절망할 테니 말입니다. 이런 물질만능의 사회를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견딜 만한 사회로 만드는 데에 문사철(文史哲)의 역할이 크다고 봅니다. 사회가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문사철이 할 일이고, 그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은 응용 학문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우리는 사회가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문사철에서 구하려고 하지 않는 듯합니다. 고전이나 역사 속에서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를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사철이 똑바로 서지 못하고 푸대접받는 나라는 일시적으로는 번영을 누릴는지 몰라도 결국에는 몰락과 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것은 문사철의 전통이 약해졌기 때문이며, 오스만 제국과 몽골 제국이 몰락한 뒤 이렇다 할 문화유산을 남기지 못하고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 것도 결국 문사철이 똑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지 않습니까!
요즘 말로 바꿔보면 '황금으로 흥한 자 황금으로 망한다' 정도 되겠군요.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 매몰되어가는 개인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바꿔낼 수 있을까요?
당장 취업 경쟁에 내몰린 20대에게 이런 이야기는 잔소리쯤으로 들리겠지만 지금이라도 일상에서 낭비되는 자투리 시간이 없는지 살펴보고 그 자투리 시간이라도 선용하는 식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늘려나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취업한 뒤, 출세한 뒤, 먹고 살 만큼 돈을 번 뒤 그러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좋지 않은 습관으로 머리가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져 달라질 수 없거나 달라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구성원들의 그런 작은 노력으로도 사회는 인간의 탈을 쓴 야만과 탐욕이 날뛰는 살벌한 전쟁터가 되지 않고 더불어 살 만한 인간적 삶터가 될 것이며, 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미래를 살게 될 우리 자손들에게도 더 바람직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게 덕담 겸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나이 많고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세대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 달라고 한다면, 시간낭비하지 말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고 열심히 씨를 뿌리라고 권하고 싶어요. 개미와 매미의 우화가 암시해주듯, 씨 뿌린 자는 가을이 되면 거둘 것이 있어도 씨 뿌리지 않은 자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씨란 주로 혼자 책 읽고 사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모임이나 만남은 되도록 줄여야 합니다. 혼자 있으면 두려워질 때도 있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만이 생각이 커지고, 몰려다니면 내 생활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어느새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 가장 후회스런 것 중 하나는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한 번뿐인 인생을 의미 있는 일에 쓰지 않고 허송세월했다는 느낌이 아닐까요? 그러나 의미 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한 사람은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 보라고 한 독일 시인 횔덜린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선생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씨 뿌리는 일인 고전 번역의 시간을 축내었으니 귀한 말씀 잘 갈무리하여 새로운 사람들이 씨 뿌리는 일에 나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8월에 나올 <에티카> 번역도 잘 마무리하시고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천병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5년 동안 독문학과 고전문학을 수학했으며 북바덴 주정부가 시행하는 희랍어검정시험 및 라틴어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지금은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명예 교수로, 그리스 문학과 라틴 문학을 원전에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원전 번역으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로마의 축제력>, 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아리스토텔레스 밑 호라티우스의 <시학> 등 다수가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그리스 비극의 이해> 등이 있다.
서면 인터뷰의 한계로 개별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번역 과정에서의 고충 등 내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아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평생을 '이야기' 속에서 살아오신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전해주고픈 이야기,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마음 속 가득하다는 표정이셨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찾아뵙고 '그리스 비극'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 응원해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뵐 때도 여전히 건강한 모습 보여주시리라 믿으며 인터뷰를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