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가라앉은 노여움이다."
로마의 철학자이면서 정치가, 그리고 법률가,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의 저자인 마르쿠스 키케로가 한 말이다. '가라앉은'이라는 말 때문에 잠시 샛길로 빠진 얘기를 덧붙이자면, 근래에 들어 발효식품인 김치 못지 않게 한국의 막걸리가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으며, 수출실적까지 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막걸리야 말로 흔들어서 마셔야 한다. 뭐 어느 소주(처음처럼)처럼 흔들어 마시거나 그렇지 않거나 내게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효리가 흔드니 술꾼들로 흔들어 먹어야 하는 것으로, 까짓꺼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흔들어서 마시는 모양이다. 그러나 막걸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섹시퀸이라는 광고모델이 가르쳐주지 않아도-최근에 국순당 막거리 광고모델은 시트콤 이후 상종가인 황정음이긴 하던데- 으레 흔들어 마실 줄을 안다. 그런데, 이 막걸리를 흔들지 않고 건더기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위에 맑은 부분만 마시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맑은 부분을 '윗물'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실, 청주(淸酒)가 바로 막거리의 윗물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말이 나온 김에 뜬물이라는 말도 적절치는 않다. 건더기가 가라앉았을 뿐이지, 맑은 부분이 뜬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막거리의 '가라앉은' 바로 이 부분이 발효를 일으키는 누룩의 주성분이며, 과도하게 흔들면 폭발(?)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물질이다.
가라앉은 노여움, 왜 이 문장에서 막걸리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느낌 자체는 상당히 차가운, 때만 되면 부글부글 끓어오를 분노를 이 가라앉은 것들-노여움-에, 그 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 두 자매, 판디온 왕의 딸들인 프로크네와 필로멜레가 펼치는 복수야 말로 차갑고 냉정하며 잔혹한데, 나는 이들 자매가 펼치는 복수의 과정에서 "증오는 가라앉은 노여움."이라는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형부를 사랑하는 처제의 이야기인지 처제를 사랑하는 형부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파주>는 두 자매와 그 사이에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아주 다른 이야기지만 프로크네와 필로멜레 자매의 이야기도 등장인물의 구성만 놓고 보면, 두 자매의 아버지인 판디온의 원군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는 그리고 그 공로로 큰 딸 프로크네를 아내로 얻게 되는 테레우스, 그리고 그의 처제인 필로멜레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영화 <파주>는 뭐랄까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고 할 수 있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그런 메시지에 충실했다기보다는 몇몇 아쉬움을 민감한 소재였던 만큼 어쩔수없이(?) 남기고 있는데, 이들 자매의 경우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내의 여동생을 강제로 추행한 형부 테레우스를 두 자매는 서로 힘을 합쳐(아니 죽을 힘을 다해) 잔인하게 복수를 하는 이 야기는, 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일명 '도서관')에 거의 영화의 시놉시스 수준으로 간명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는 피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드라마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는 이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 확실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고 있다. 그런데, 1)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97/6년에 태어났고, 2)오비디우스의 생몰연대는 기원전 43년~기원후 17년 또는 18년이며, 아폴로도로스는 기원전 2세기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활동한 아테네 출신의 학자이다. 시놉시스가 있고(3아폴로도로스), 그것을 극적으로 형상화한 끈적끈적한 이야기가 나온 다음(2오비디우스), 비극의 중요한 소스로 활용(1에우리피데스)다면 그럴듯할 것인데, 실제로 작가들이 살았고, 작품들이 발표된 시기는 그 역순인 것이 흥미롭다.
그러니까 여기 두 자매의 이야기를 하려먼, 비극 <메데이아>, <변신이야기>, <그리스신화> 순으로 해야 하는데, 실제로 이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는 그 역순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에서 '요약'편 <아테나이 왕들2>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에릭토니오스(1)는 물의 요정 프락시테아(~1)와 결혼하여 아들 판디온(2)을 낳았고, 에릭토니오스가 죽자 판디온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판디온(2)은 이모-이모와 결혼하는 이 자체도 흥미롭고, 이후의 비극의 원인이 되는 느낌-인 제욱십페(~2)와 결혼하여 두 딸인 프로크네(2-1)와 필로멜레(2-2)를 낳고, 쌍둥이 아들인 에렉테우스(2-3)와 부테스(2-4)를 낳는다.
국경문제로 전쟁이 발생하자 판디온(2)은 트라케로부터 테레우스(아레스의 아들)를 원군으로 불러 물리치고, 그 공으로 테레우스에게 딸 프로크네(2-1)를 아내로 준다. 그리고 테레우스는 프로크네에게서 아들 이튀스(3)를 얻는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처제인 필로멜레(2-2)에게 반해 그녀를 겁탈한다. 그리고 테레우스는 프로크네(2-1)에게 동생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반항하는 필로멜레(2-2)의 혀를 잘라버리며 이후에도 몇차례나 유린한다. 갇힌 신세가 되어 베를 짜는 필로멜레(2-2)는 천에다 글자들을 넣어 자신의 불행을 언니 프로크네(2-1)에게 알린다. 그렇게 두 자매의 복수가 시작되는데..
3년마다 한 차례씩 열리는 디오뉘소스 축제를 틈타 프로크네(2-1)는 동생을 찾아내 집으로 돌아오며, 두 자매는 테레우스의 아들-프로크네의 아들이기도 한- 이튀스를 죽이여 요리해서 영문도 모르는 테레우스에게 식사로 내놓는다. 그리고 아들을 찾는 아버에게 아들은 당신이 찾는 사람은 (당신) 안에 있다고, 상황을 알림으로써 복수한다. 그리고 두 자매는 도망친다. 사태를 파악한 테레우스는 도끼를 집어들고 그녀들을 뒤쫓고, 포기스의 다울리스에서 따라잡히자 두 자매는 자기들을 새로 변하게 해달라고 신들에게 기도한다. 그래서 프로크네(2-1) 나이팅게일이 되고, 필로멜레(2-2)는 제비가 되었으며-혀가 잘려 제비처럼 짹짹거릴수밖에 없어- 테레우스도 새로 변하여 오디새(혹은 후투티-변신이야기)가 되었다는, 이상이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가 정리하는 이야기다.
<변신 이야기>는 결정적인 장면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칼을 쓰거나/ 칼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쓸 때란다./ 아우야, 나는 어떤 범행이든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어. ...간악한 테레우스를 불속에 던져 넣거나, 칼로 그자의 혀를 자르고/ 눈을 뽑고 너에게 치욕을 안긴 사지를 절단하거나.."
라고 프로크네가 얘기하는 동안 이튀스가 다가온다. 아들이 다가오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생각난 그녀는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아아, 너는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가!'라고 말한다. 아들을 잃은 아픔을 아비에게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극한의 복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니 프로크네는 아들을 칼로 치고, 동생인 필로멜라는 조카의 목을 자르고, 사지를 해체하며, 청동솥에서 부글부글 끓여 요리를 만들어, 테레우스가 먹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라앉은 노여움'은 냉정한 행위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의 일부를 미워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들이
우리를 거슬리게 하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데미안>)의 얘기다. 프로크네의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분노를 표출한다. 가장 소중한 아들에게서 가장 증오하는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 자신 안에서 자신의 일부로 꿈틀거리는 연민까지도 잘라내는 냉혹한 선택을 한다.
"사랑, 우정, 존경 같은 감정은
어떤 대상에 대한 공통의 증오만큼
인간을 똘똘 뭉치게 하지는 못한다."
안톤 체홉(1860~1904, <<NOTEBOOKS>>)은 복수의 화신이 된 두 자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를 보고서 이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변신 이야기>는 세 인물이 새로 변한 이후에도 뒷 이야기를 들려준다. 애지중지하던 노년의 보람인 딸(필로멜라), 든든한 또 다른 딸 프로크네와 외손자, 한때 원군으로 자신의 왕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위로부터의 배신 등으로, 판다온은 오래 살지 못하고, 아들 에렉테우스(2-3)에게로 왕권을 이어진다.
에렉테우스(2-3)는 아들 넷과 그만큼의 딸을 낳았는데, 딸 프로크리스(3-1)은 아이울로스의 자손인 케팔루스의 아내가 되고, 다른 딸 오리튀이아(3-2)는 북풍의 신인 보레아스에게 납치되어 차디찬 폭군의 아내로 살아가며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칼라이스(3-2-1)와 제테스(3-2-2)가 그들이다. 이 두 소년은 성년이 되었을 때 아르고 호에 승선하여 황금양모피를 찾아가는 아이손과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아손을 사랑한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프로크리스(3-1)와 오리튀이아(3-2) 자매는,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자매의 조카들로, 이들 자매의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으나, 일단 줄이기로 하자.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특히 어미인 프로크네가 아들을 죽여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음으로써 남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가, <메데이아>에서 이아손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죽이면서까지 복수하는 수법(?)이 비슷한다. 이버지를 배신하고 오빠를 살해하여 토막내어 버림으로써 추격하는 아버지의 배를 따올렸을 뿐만 아니라. 이올코스로 돌아와 황금 양모피를 바쳐도 펠리아스가 왕권을 돌려주지 않자, 메데이아는 남편을 위해 잔혹한 살인을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펠리아스의 딸들이 보는 앞에서 늙은 숫양 한 마리를 토막 내어 마법의 약초를 넣고 삶아서 도로 젊게 하고 나서는 그들의 아버지도 그렇게 해 주겠다고 설득한다. 그래서 그들이 아버지를 토막 내어 삶자 마법의 약초를 주지 않아 그를 죽게 만든다. 그 뒤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이올코스에서 추방되어 코린토스로 도망쳐 와서는 두 아이까지 낳고 10년 동안 행복하게 산다. 이상이 드라마 <데메이아>가 시작되기 이전의 상황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남편 테레우스(Tereus)가 처제 필로멜레(Philomele)를 범한 것에 격분하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제 아들 이튀스(Itys)를 손수 죽인 프로크네(Prokne)의 이야기를 모델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신화>를 시솝시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풍부해진 소스를 취한 다음, 오늘날 영화쯤에 해당하는 비극 <메데이아>를 쓰고 무대에서 상연하지는 않았을까 착각이 들 만큼, 세 곳에서 펼쳐지는 한(같은) 이야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다. 토막난 사체를 부검했는데, 알고 보니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딸이었던 영화 <용서는 없다>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올드보이>에서 사랑을 나눴던 여자가 사실은 15년 전에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딸이라는.. 이렇게 우리 영화속에서의 복수극의 원 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메데이아는 사랑하는 남편이 새장가를 들려고 하는 크레우사 공주와 그 아버지 크레온(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크레온은 아님)을 제거하는 화려한 의상을 아들들을 시켜 갖다 바치게 한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 아이들이 돌아오자 죽음의 선물을 전달해 준 아이들이 살아남을 길이 없음을 알고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두 자매의 캐릭터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자매 중에서 안티고네가 운명을 주도하는 입장이듯이 더 강렬하여, 캐릭터로는 프로크네와 메데이아가 오버랩된다. 또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 등장하는 엘렉트라와 크리소테미스(<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중에서도 주어진 운명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언니 엘렉트라-소심한 동생 크리소테미스에 비해-의 모습이 프로크네(메데이아)-안티고네와 일맥을 이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예나 지금이나 '자비로운 여신들'-사실은 전혀 '자비롭지' 않은 복수의 여신들을 달래기 위한 말이 '자비로운'이라는 역설-만 바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