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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는 만큼 성공한다>로 한국 사회에 번뜩이는 제안을 하며 본격적인 저작활동을 시작한 김정운 전(前) 교수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며 파격을 선보였고, 이후 각종 방송과 대중 강연으로 머리 스타일만큼이나 발랄하고 독특한 이야기를 꾸준히 전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때 문득 교수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에 열중하던 그가 '에디톨로지'란 개념을 제안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야기를 듣고자 만났지만, 그는 끊임없이 내게 다시 질문을 던지며 '삶과 지식의 편집 가능성'을 둘러싼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다.

 

늘 그렇듯 선생님 책에 대해서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반응이 엇갈리는데요. 이번 책에도 비슷한 반응이 있던데요.

 

내용에서는 혁신성을 원하면서 형식의 파괴에는 거부감을 보이는 이중성 때문이라고 봐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자유롭고 편한 걸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정말 그런 삶을 원하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막상 대답이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제가 교수를 그만둘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사상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도, 밥벌이의 구심점이 필요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존경받는, 정년이 보장된 직업에 대한 집착, 이게 없으면 내 인생이 유지가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죠.

 

교수라는 직업을 떠남과 동시에 한국이라는 생활의 근거지를 떠나셨단 말이죠. 한국 중년 남성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말이죠. 계기가 뭘까요?

 

일단 화가 많이 났어요. 당시 제 삶에 대해서요. 엄청 바쁘고 돈도 잘 벌고 찾는 곳도 많고, 그런데 이게 재밌지가 않은 거에요. 삶의 주도권을 뺐겼다는 느낌, 아무도 그걸 빼앗아가지 않았지만,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느낌 그리고 소모되어 간다는 느낌도 들고. 저는 기본적으로 비겁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일단 도망을 갔죠. 그런데 도망을 가서 생각을 해보니까, 삶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뭐냐. 답은 간단해요. 싫어하는 걸 자꾸 해서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걸 적어봤어요. 그런데 1번이 뭐냐. 학교에서 학생 가르치는 게 제일 싫은 거에요. 그러고 나니까 양심에 가책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교수를 한 거죠. 그만둔다고 하니 주변에서 정년까지 보장받았는데 왜 그러냐 이래요.  몇 년만 더 있으면 연금도 나오는데 왜 그만둬. 그러니까 더 기분이 나쁜 거에요. 내가 고작 그것 때문에 교수를 하나. 그럼 학생은 뭐냐.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내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난 거에요. 내가 비겁하고 겁이 많으니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겁에 질리면 어느 순간에 확 하고 뒤집는 순간이 있어요. 그렇게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꽤나 후회했죠. 할 때는 멋있었죠. 그런데 뭐 하지 이제. 그만두기 전까지는 그만두는 게 중요한 건데, 그만두고 나니까 고정적인 수입도 없고, 뭘 하고 살아야지,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한 6개월 지나니까 제대로 된 결정이었다. 지금까지 내 삶은 뭔가 잘못됐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떠난다는 행위 말이에요. 세계일주를 한다든지 해외여행을 간다든지, 이런 방식의 시도가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그간 해오던 공부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셨단 말이죠.

 

공부가 제일 즐거운 거니까요. 한국문화에서 공부의 즐거움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꾸 여행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여행은 일시적이잖아요. 공부하러 여행을 가는 건 정말 재밌어요.

 

쉼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다는 이전과는 다른 공부에 대한 욕망이었던 거군요.

 

삶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걸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 그게 즐거운 거죠.

 

문화심리학,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이전에는 많이 들어보지 못한 말인데요. 이것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문화심리학은 1990년대부터, 발달심리학에서 피아제의 이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유럽의 심리학자들이 인지발달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피아제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거예요. 발달단계에 제때 이르지 못하면 문제라고 보는 건데, 이걸 다르게 본 사람이 비고츠키에요. 그런데 제 지도교수가 비고츠키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거든요. 비고츠키가 남긴 저작을 번역해서 유럽에 소개한 리더가 제 지도교수였어요. 이게 독일에서 벌어진 사회냐, 문화냐 논쟁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전자는 보편성을, 후자는 다원성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문화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인데, 피아제 식 인지발달구조로 설명하면 문화적 차이가 발달 수준의 차이로 설명이 된단 말이에요. 이걸 암묵적으로 우리가 재생산해왔다는 거죠. 문화심리학은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창조는 편집이다.”이번 책의 핵심 문장인데요. 보통 편집이라고 하면 에디팅이라고 하는데, 에디팅과 에디톨로지, 어떤 질적 차이가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네, 질적 차이죠. 물론 에디팅도 창조적인 작업이죠. 어떤 편집자가 작업하느냐에 따라서 책도 전혀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부분을 그간 기술적으로만 이해하고 접근했기 때문에 문제였던 거죠. 스티브 잡스가 창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데, 이전의 관념대로 생각하면 잡스가 새롭게 만든 게 뭐가 있을까요? 없단 말이에요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잘 편집한 거거든요. 마우스로, 터치로 말이죠. 에디톨로지를 한다는 건 메타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줄 안다는 거예요. 창조적 사유는 메타언어를 쓸 줄 아는 거예요. 예를 들면 윷놀이, 떡국, 한복. 이 세 가지를 얘기하면 뭐가 떠올라요?

 

명절이죠. 설날.

 

그럼 떡국, 윷놀이, 한복. 이 구체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설날이라고 하는 메타언어를 내가 갖게 되는 거잖아요. 명절, 축제. 이렇게 말이죠. 개개의 정보를 기억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요. 이걸 엮는 메타언어를 내가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걸 한국 사람이 보면 바로 나오지만, 서양 사람이 보면 메타언어가 안 나오잖아요. 이게 문화적인 거죠. 이런 걸 엮어서 우리 머릿속에 구성되는 게 문화적 기억이에요. 이렇게 하면 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생각이 풍요로워지거든요. 이게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거죠. 책 후반부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걸 다루다 보면 태그처럼 정보의 내용이 어느 맥락에 속해 있는지 지정해주거든요. 주소록을 정리할 때도 나이나 직장 이름이 아니라 자기만의 분류 기준을 세울 수 있잖아요. 이게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거예요.

 

창조라고 하면 전에 없던 걸 만들어내는 걸 생각하기 마련인데, 말씀하신 창조적인 작업은 단순한 작업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그런 생각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창조에 거품이 생긴 거죠.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창조 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창조는 스티브 잡스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런 거지같은 생각이 어디 있어요.

 

본문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한국사회에서 창조는 전통적 의미처럼 신 같은 전능한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용어가 끼치는 영향도 있겠다 싶은데요.

 

맞아요. 창조적인 것과 창조. 우리는 창조를 하는 게 아니라 창조 같은 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적이란 말을 쓰는 거죠. 그래서 창조 경제라는 용어는 틀린 거예요.

 

그런 점에서 편집이란 용어도 생각해봐야겠는데요. 짜깁기라고 할까요.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이런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 않나 싶거든요.

 

그것도 짚어봐야죠.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인데. 옛날에는 다 짜깁기죠, 편집이고. 다 표절이죠. 그런데 그때는 지적재산권이란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개념이 생기면서 범위를 정하는 데에 기준이 생기니까 짜깁기나 표절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고, 그러니까 창조적인 작업이 더 어려워진 거죠. 그래서 그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위해서 누구나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창조는 편집이다. 이런 선언을 한 거예요. 그리고 이걸 에디톨로지라고 한다. 이게 핵심이죠.

 

지식의 위계나 권력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에디톨로지라는 개념과 의미, 내용 역시 책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서 전달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네이버 지식인 같은 경우, 그 효용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이를 통해 확산되는 지식의 근거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단 말이죠. 이렇게 볼 때, 여전히 공인된 지식, 검증받은 지식 혹은 검증받은 자가 말하는 지식. 이런 부분은 여전히 존재한단 말이죠.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과도기니까요. 저도 그런 과도기적 상태를 이용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내가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그 근거로서 내가 그간 밟아온 과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미래 지식의 구성 방향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얘기해야죠. 나도 기존의 지식 체계, 지식 권력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만, 내가 교수를 그만두고 대학이 더는 지식 권력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갖고 있는 기능이 끝났으니, 새로운 지식 구성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자. 게다가 한국이 아이티 기술이 발전해 있으니, 이걸 잘 찾아보면 지식의 종속, 지식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생각해봐요. 1년에 천만 원씩 하는 비용을 들여서 듣는 대학 수업이라는 거, 지금 이런 강의 내용, 세계 유수 대학의 강의 무료로 들을 수 있잖아요. 이걸 교수들도 알아요. 이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 이런 얘기에요.

 

이런 구조적 한계에 대한 고민이 있죠. 그런데 그걸 타파하는 방식이, 현재 대학 구조 안에서는 통섭이라고 표현되는 방식이 최선인 것 같아요. 이런 게 대체로 기존의 구조는 그대로 두고 다리를 놓는 정도의 방식이잖아요.

 

그런데 다리가 안 생겨요. 서로 갖고 있는 언어 체계가 다르거든요.

 

그런 시도는 결과물을 내기 위한 목적성이 많이 느껴지는데, 에디톨로지는 결국 재미잖아요. 과도기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지식의 영역에 들어가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출구는 여기에 있다고 보시는 거죠?

 

이미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 보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는데, 내용과 체계가 정말 놀라울 때가 많단 말이죠. 이런 가능성을 숨 쉬게 해줄 수 있는 제도의 노력이 필요한데, 학문의 틀 내에서는 이게 어떻게 가능할 것이냐, 저는 이걸 고민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제도라는 게 애초 있었던 게 아니라 어느 시기에 만들어지는 거란 말이죠. 만들어졌다고 생각을 하면, 나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주변부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해요. 에디톨로지라는 학문, 이제 시작이니까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누구든지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시작하면서 과정을 거치면서 구조를 갖추고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고 인정받는다면, 어느 때부터는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지요.

 

 

 

 

저는 지식이란 개념에 관심이 많은데, 지식을 정보와 정보의 관계라고 정의하셨잖아요. 이렇게 보면 결국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하게 되는데, 이렇게 보면 1부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에서 2부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가 자연스레 연결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1부에서는 마우스가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기술적 발견으로 언급되는데, 발상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우연히 그 생각을 한 거예요. 계층적 지식이 파괴되고 네트워크적 지식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게 아니지만, 그걸 가능케 한 게 바로 마우스라는 건, 새로운 생각이죠. 하이퍼텍스트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마우스였던 거예요.

 

지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요. 지식의 성격을 검증 가능성, 반증 가능성, 편집 가능성으로 구분하고 편집 가능성이 높은 지식이 좋은 지식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앞서 지식을 정보와 정보의 관계라고 정의했잖아요. 이러고 나니까 새로운 지식이 쉽게 만들어진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편집 가능성이 뭐냐. 어떻게 구성되었느냐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어떤 지식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념을 다른 곳에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바로 편집 가능성이에요. 그래서 그 예가 프로이트인 거예요. 프로이트가 왜 위대한 편집자냐. 이드, 에고, 슈퍼에고라는 편집 단위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여기저기 갖다 쓸 수가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지식은 있는 걸 발견해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구성해나가는 거거든요. 찾아내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거라고요.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편집의 가능성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만들어낸 지식의 체계보다 중요한 건 그 체계를 구성하는 편집의 단위 그리고 그 단위에서 생기는 편집 가능성이란 말씀이군요.

 

맞아요. 그렇다고 모든 곳에 가져다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영역을 펼칠 때 편집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죠.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가 만들어낸 편집의 단위 덕분에 인간의 의식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냐는 말이죠.

 

2부에서 지도나 원근법 이야기 모두 재미있었는데, 재현의 시대에서 편집의 시대로,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이 부분에서 늘 지적되는 문제가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여전히 이게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요. 개별 단위가 얼마나 확실하게 구성된 것이냐 하는 문제요.

 

일면 타당한 비판이에요. 그런데 저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과 사실을 연결시켜주는 편집이 그동안 너무 폄하되어 왔다고 말하고 싶어요. 근대가 분류와 사실 확인의 역사잖아요. 분류를 하고 가장 작은 단위까지 확인하면 해결이 될 거라 믿은 거죠. 그런데 해결이 됐나요? 하나도 해결이 안 된 거예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실 자체가 확인이 안 된다고요. 양자역학이 그렇잖아요. 자연과학도 이런데 인문학에서 사실 확인이 가능하겠어요? 다 해석이죠. 그런데 자꾸 진실을 말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실체적 진실을 이야기해요. 사실 자체가 편집의 결과라는 말이에요. 내가 밥을 먹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밥을 먹었다는 걸 왜 기억하죠? 종일 계속 일이 일어나요.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 의미 있는 사실만 뽑아내요. 이런 해석, 편집의 차원이 전제되어야 사실이 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재현의 능력이 전제가 되어야만 창조가 가능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피카소가 기본기가 잘 되어서 창조적인 작업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생각해보세요. 현대미술에서 재현은 이미 끝난 문제잖아요. 사진기가 재현하잖아요. 수공업자가 되어야만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2부에서 공간의 편집도 중요하게 다루시는데, 편집 역시 어떤 목적에서 하느냐가 중요할 텐데, 공간의 문제로 들어오면 지식의 편집과는 다르게 물적 공간을 전제하기 때문에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잖아요.

 

물론 그런 면이 있죠. 하지만 그렇게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집 인테리어를 왜 해요? 그게 효율과 상관이 있나요? 우리에게는 어떤 욕망이 있어요. 그걸 부정하면 안 돼요. 저는 현실의 즐거움, 실현 가능한 행복을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행복하고 재미있어질 수 있는 공간의 편집에 대해 안다는 건, 말씀하신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고, 또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거라고 봐요.

 

에디톨로지가 현실에서 구현되고 발현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개인 차원이 우연적 결과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런 개인이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 차원에 대한 고민이 궁금해지거든요.

 

중요한 건 맞아요. 그런데 제 경험상 그건 운이에요. 제가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제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저는 행복한 심리학과 교수가 되고 싶었을 따름인데, 꼬이고 꼬이면서 이렇게 된 거예요.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말씀하신 사회 차원에서의 조건은 투쟁하고 싸워서 얻어내야 할 영역이에요. 그건 기본권의 문제라고 봐요. 그런데 나한테 왜 그런 목소리를 안 내느냐, 이런 목소리도 있는데, 저는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기본적인 전제가 갖춰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갖춰졌을 때 방향에 대한 이야기도 여전히 필요하거든요. 마치 예술가들이 우리가 또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걸 할 수 있어야 지금 조건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변화를 위한 힘을 모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적어요.

 

네. 큰 이야기는 정리가 된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기술적인 부분에서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의 가능성과 유연성을 높이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조언 그리고 언어, 중요하지만 많은 이가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인데요.

 

네, 좋습니다. 우선 언어. 저는 쉰부터 일어 공부했어요. 그래서 <보다의 심리학> 번역도 했어요. 관심이 있으면 하게 되어 있어요. 문화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죠. 관심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를 포기하는 거예요. 그게 외국어가 아니라 해도 무엇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언어가 필요한 거니까요.

 

 

 

 

관심을 끝까지 추구하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군요. 지금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곳까지 가면 만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런 말씀인 거죠?

 

맞아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 진짜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되요. 그리고 편집의 가능성과 유연성에 대해서는 기록이 첫째 조건이에요. 습관으로 만들어야 해요. 데이터베이스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에요. 기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갤럭시 노트를 권하는 게, 기록에 있어서 기가 막혀요. 검색해서 나오는 모든 결과를 이미지로 잘라서 바로 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할 수 있거든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도구가 어디 있어요. 친구한테 좋은 글이 와요. 그럼 그냥 잘라내서 저장하면 돼요. 그걸 저장하는 도구는 에버노트구요. 이렇게 데이터를 쌓다 보면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도 생기고, 이걸 관리하기 위해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거든요. 이 메타언어에 익숙해지면 내 이야기를 사람들이 재미나게 듣기 시작해요.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엮어서 이야기하니까요. 이 책도 그 결과죠. 이걸 쓰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축적했겠어요. 데이터를 축적하다 보면 기존의 지식 영역이 설명하지 못하는, 담아내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데, 이걸 엮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에디톨로지도 그런 과정의 결과이고요.

  자기의 관심을 끝까지 추구해나가면 내 현실의 문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고, 그걸 과감하게 뚫고 나갈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요. 교수직 따위야 이런 마음도 생길 수 있고요. 제가 유학 다녀왔을 때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요. 저도 교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좌절했는데요.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서 내 진정한 관심을 추구하다 보니까 교수직 따위야, 누구나 관둬, 누구나 은퇴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교수는 정년이 길어서 나쁜 직업이에요. 정년이 길면 새로 시작할 수가 없어요. 빨리 끝나면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데, 교수는 그러질 못해요. 정년이 길어서. 그래서 은퇴한 교수가 제일 불쌍하다고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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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을 만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을 보면 된다. 어지간히 성실한 독자가 아니라면 책으로 나오는 그의 글을 다 읽기에도 숨이 벅찰 테니, 책 이외의 공간에서 그를 마주하는 일은 오히려 사치스럽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회의 주요 저자이면서도 그에 대한 서점의 인터뷰는 한 차례도 없었다. 그저 글에 집중하시도록 배려하는 게 나았을까.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이지만, 그의 일상, 읽기와 쓰기 그리고 대선을 앞둔 최근의 생각까지 차례로 살펴보면, 그를 귀찮게 해서라도 이런 자리에 불러내는 게 의미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미는 충분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뿌듯하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속는 셈 치고 첫 질문과 답변까지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 인터뷰는 인물과사상사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으며, 단독 인터뷰를 기념(?)하여 강준만 저작을 모아 이벤트도 마련했다. 도서를 한 권이라도 사면 고급 플래너를, 운 좋아 당첨이 되면 강준만 교수 친필 사인본을 받을 수 있으니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강준만 저작전 바로 가기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21108_kangjm

 

 

강준만의 일상


보통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말씀해주세요.

전엔 주로 밤에 일을 하는 올빼미족이었습니다만, 언제부턴가 체력 저하를 느끼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강의, 책 읽기, 글쓰기 등이 저의 주요 생활입니다만, 매일 거르지 않고 개근하는 게 저녁 먹기 전 집 근처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하는 것이죠. 일단 목표는 식스팩 만들기입니다만, 나이가 먹은 탓인지 예전처럼 근육이 잘 붙질 않습니다. 대학 시절 학교 앞 육체미체육관(70년대 초반엔 주로 이렇게 불렸습니다)에서 운동할 땐 조금만 해도 근육이 만들어지곤 했는데, 세월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출퇴근 하는데, 왕복 1시간 거리입니다. 가는 길에 덕진공원의 호수가 있어 걷는 코스가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매일 축복받은 삶이라고 느낄 정도죠. 

 

공식적으로는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걸로 아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핸드폰 쓴 것도 올해부터인데, 특별한 이유를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 전 솔직히 언론이 유명인사들의 한두 줄 트위터 메시지를 정치 뉴스로 다루곤 하는 게 영 못마땅합니다. 주요 용도가 자극적인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일종의 ‘갈등 상업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죠. 아마도 제 아날로그 감성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맡고 계신 수업의 이름과 내용을 알려주세요.

이번 학기는 모두 ‘국제’네요. 국제커뮤니케이션, 글로벌미디어론, 국제커뮤니케이션 연구(대학원) 세 과목입니다. 문화간 커뮤니케이션(intercultural communication) 중심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인 한국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은 왕성한 해외지향성이라고 보기 때문에, 한국이 ‘문화간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메카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부터는 학생들의 리포트를 책으로 내기로 했습니다. 책을 낸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콘텐츠로 승부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야심작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벌써 일부 학생들은 책에 실을 정도의 품질을 기하기 위해 리포트를 서너번 고쳐쓰고 있는 중이죠. 방학중에 제가 편집 작업을 해서 내년 개강일에 학생들이 책을 받아볼 수 있게끔 하려고 합니다. 전 독보적인 책이 되어야 한다고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나중에 책 나오면 행여 학부 학생들이 쓴 책이라고 깔보지 마시고 질을 평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바깥 세계를 보는 눈은 학생들의 눈이 더 정확하다는 게 제 소신이거든요.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으시고 관련 저작도 내셨는데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시는지. 음악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최근에 본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면 함께 알려주시길.

한꺼번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넓은 의미의 대중문화로 보자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자연·동물 다큐입니다. 영화, 드라마, 가요의 취향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있다기보다는 주제 중심이죠. ‘찌질이’라고 흉볼까 염려됩니다만, 러브 스토리, 그것도 가슴 저미는 실연(失戀)이나 비련(悲戀)이 좋습니다. 

 

가사 분담을 어떻게 하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외모의 느낌은 집안일 전혀 안 하실 것 같습니다.(웃음)

매일 아침 집 나갈 때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합니다. 아내가 커피 생각난다고 말하면 즉시 뛰쳐나가 사올 정도의 실천은 늘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 뿐이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전주에서 생활하신다고 들었는데, 전주에서 추천할 만한 맛집이나 꼭 들러보면 좋겠다 싶은 곳을 추천해주신다면.

제 단골 국수집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찾기가 매우 어려운 작은 집이라서. 전주 하면 많은 분들이 꼭 한옥마을을 들러보시죠. 인사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게 타 지역에서 오신 분들의 한결같은 감상평이더군요.

 

 

강준만의 읽기와 쓰기

 

집필을 위한 기획이나 구상은 주로 어떤 때에 떠올리시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이어가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제가 집필하고 있는 책의 주제는 세계적인 미디어업계의 거물들에 관한 인물론입니다. 인물 중심으로 글로벌 미디어들을 탐구해보는 거죠. 예컨대, 페이스북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재미없고 딱딱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마크 주커버그 중심으로 풀어가면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주커버그 뿐만 아니라 처음에 페이스북을 같이 시작한 더스틴 모스코비츠와 에두아르도 새버린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이게 아주 좋은 분석의 소재가 됩니다. 구글도 구글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는 IT 이야기일 뿐이지만, 구글 3인방인 세르게이 브린-래리 페이지-에릭 슈미츠 중심으로 풀어가면 구글의 정체성과 본질이 보입니다.
  제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나 하고 생각해봤더니, 이유가 복합적이더라구요. 학교에서 하는 강의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아날로그 인간이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디지털 문화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는 자기계발 욕구, 스스로 탐구하면서 느끼는 재미 등등. 집필을 위한 기획이나 구상의 한 사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슨 장기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주로 이런 식으로 해나가는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낸 <교양영어사전>도 지난해 교환교수로 미국에 1년간 머무르면서 떠오른 생각이었구요.  

 

‘엄청나다’는 표현이 궁색할 정도로 많은 글을 써오셨고 또 쓰고 계십니다. 하루에 한 글자도 쓰지 않는 날이 1년에 며칠 정도 되십니까. 더불어 글을 주로 어느 시간대에 쓰시는지 알려주신다면.

하루에 한 글자도 쓰지 않는 날이 의외로 많습니다. ‘발동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일단 준비 작업 끝나면 그때부터 발동 걸려서 써대는 식이죠. 집에선 소파에 누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습니다. 텔레비전 켜 놓구요. 전 휴식이라고 생각하지요. 재미있는 장면이나 이야기 나오면 텔레비전 보고, 아니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고. 책 읽으면서 제 책을 위해 써먹을 거리들을 그때그때 챙겨놓는 식이지요. 옆에 노트를 준비해놓고 키워드 중심으로 어디에 무슨 내용이 있다는 걸 표시해둡니다. 그리고 그걸 컴퓨터에 입력해놓지요.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나면 본격적인 글쓰기 작업에 들어가는 식입니다. 예전엔 밤에 글을 많이 썼습니다만, 요즘엔 늦어도 밤 1시엔 자고 오전 7-8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장서 구입이나 자료 구입에 어느 정도 비용을 쓰시는지, 그리고 서가 관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공간 문제 때문에 예전에 비해 많이 줄였습니다. 월 100만 원? 서가 관리의 한계를 자주 절감하곤 합니다. 시간이 너무 들어가니 제대로 못한다는 뜻이지요. 디지털 시대에 내가 이래도 되나? 이거 미친 짓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취미’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정당화하곤 하지요.

 

독서를 하실 때에는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남기기도 하시나요?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내용과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어느 책이건 책 끝에 하얀 여백이 한두장 있습니다. 제 책들은 대부분 그곳이 지저분합니다. 키워드 중심으로 어디에 무엇이 있다는 걸 다 표시해두기 때문이죠. 노트에 따로 적었더라도 나중을 위해 책 뒤 여백에 그걸 일일이 표기해두곤 합니다. 밑줄 긋는 건 물론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책 여기저기에 써두곤 하죠. 책을 곱게 모시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문학과 비문학, 집필에 필요한 독서와 (이런 게 가능하다면) 취미로서의 독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요.

모든 독서의 취미화를 추구하지요. 재미없거나 별거 아니다 싶은 부분은 속독하곤 합니다. 그러나 취미로서의 독서를 말씀하신 뜻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실은 소설 잘 안 읽습니다. 스타일리스트가 될 수 없는 제 한계라고 생각하지요.

 

혹시 전자책을 보신 적이 있나요? 활용하신다면 어떤 점이 편리한지 혹은 불편한지 느낌을 알려주시고, 사용하지 않으신다면 사용하실 계획은 없으신지 알려주세요.

작년에 미국에 있으면서 아마존 골수 팬이 되었는데, 킨들을 쓸까 말까 하다가 한국의 전자책 진도가 더딜 걸로 생각해 결국 종이책을 부여잡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종이책보다 전자책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지만, 우린 시간이 좀 더 걸리겠죠? 국내에서 대세가 기울어 불편하게 되면 ‘전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펴낸 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을 하나 꼽아주신다면 그리고 (뻔한 질문이지만) 무인도에 단 한 권의 책만 가져가야 한다면, 어떤 책을 챙기실 건지.

‘애착’의 개념 정의가 문제네요. 다 애착이 간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좀 진한 느낌으로 말한다면 애착이 가는 책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애착을 느낄 만한 책을 쓰지 못한 것 같은 느낌, 아니 어쩌면 영원히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책을 실용적으로 대하는 발상 때문인 것도 같고,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가장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기질 때문인 것도 같고 잘 모르겠네요. 무인도에 단 한 권의 책만 가져가야 한다면, 무슨 책이건 불쏘시개로 쓰기에 유리한 두꺼운 책? ^^

 

 

 


 

 

 

 

 

 

 

 

 

 

 

 

그리고 강준만의 생각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 그리고 작가를 한국, 해외로 나눠서 꼽아주신다면.

왜 이런 질문을 곤혹스럽게 생각할까? 스스로 물었지요.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인간관 때문인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이런 점, 저 사람은 저런 점이 좋고, 전 늘 이런 식이지, 종합해서 누구냐고 물으면 늘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연애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월간 <인물과 사상>은 ‘저널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인물 인터뷰 형식에서도 새로운 시도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선생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 같은 잡지인데, <인물과 사상>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에 대해 그간의 흐름을 간략히 짚어주시고 이후의 전망도 들려주신다면.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네요. 다만, 이번 대선 관련해서 여러 정치인과 논객들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새삼 ‘인물과 사상’ 생각을 했지요. “아니 저 분은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 못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지요. 예컨대, 늘 정당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발언을 수도 없이 했던 분이 ‘무소속’을 무슨 죄악인 양 여기면서 ‘정당 민주주의’의 수호신처럼 행세하시는 걸 보고서 쓴 웃음을 짓곤 했지요. 그런데 어떤 인물에 대해서건 우리 사회엔 종합적인 인물 평론이 없어요. 전 ‘인물과 사상’을 통해 그런 일을 하자는 뜻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결국엔 시장 논리에 밀려 예전처럼 왕성하게 지속되진 못했지요. 한동안 ‘인물과 사상’을 좋아해준 독자들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카타르시스 효과를 우선시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그래서 그 효과가 떨어지는 인물론엔 비교적 관심이 없었고요. 하지만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 일을 다시 왕성하게 해보고 싶네요. 

 

소위 논객의 시대가 끝났다, 는 말들이 많지만, 여전히 선생님과 격론을 펼친 논객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판에서는 한 발짝 물러나 계신 느낌인데요. 관련한 시대 상황의 변화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개인적인 소회를 들려주신다면.

실은 한 발짝이 아니라 두어 발짝 물러나 있지요. 제가 <안철수의 힘>이라는 책에서 소개한 “멘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탄 멘티들”이라는 논지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되겠네요. ‘멘토’ 대신 ‘논객’이란 말을 넣어도 무방한데, 이런 내용이었지요.
  “나는 일부 정치적 멘토들의 경우엔 겉으론 리더인 것 같지만 실은 편가르기 구도의 졸(卒)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멘티들이 멘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멘토들은 멘티들에게 진한 감동과 더불어 행동을 하게끔 자극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마저 멘토가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을 잘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 멘티들은 이미 듣고 싶은 메시지를 자신이 갖고 있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멘티들은 멘토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내다가도 멘토가 자신이 애초에 갖고 있었던 구도나 틀을 넘어서는 발언을 하게 되면 하루 아침에 무시무시한 적으로 돌변해 돌을 던질 수 있다.”
  이건 제 경험담이지요. 논객은 치어리더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 역할도 소중하긴 한데, 전 제가 치어리더였다는 걸 깨닫고선 흥미를 잃었지요. 다만 논객의 의미를 넓게 잡는다면, 이젠 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예컨대, “멘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탄 멘티들”이라는 논지도 저의 다른 방식의 논객 역할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김대중 죽이기>와 <노무현 죽이기>의 출간과 두 대통령의 당선으로 “강준만이 죽이면 그 정치인은 산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철수의 힘>인데요. 대선에 대한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전망의 방식이 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또한 “멘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탄 멘티들”이라는 논지의 연장선상에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른바 ‘시대정신’이라는 말을 쓰는 분들마다 각기 다른 의미로 말씀을 하시니 혼란스럽긴 합니다만, 어떤 특별한 시대적 상황은 정치인이건 지식인이건 한 개인이나 집단의 통제 밖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론으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한국정치, 이대론 안된다”는 대전제에 만인이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개탄의 수준을 넘어섰던 적이 있었던가요? 그 수준을 넘어선 것처럼 보였던 시도도 없진 않았지만, 그건 정략이나 한풀이를 앞세웠던 탓에 실패로 돌아갔구요. 이런 시대적 상황이 안철수를 만들고 키운 게 아닐까요? 그런 시대적 상황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는 가운데, 저는 그걸 시대정신으로 보는 쪽에 선 것일 뿐이지요.

 

 


 

 

 

 

 

 

 

 

 

 

 

 

<안철수의 힘>에서 안철수를 지지하는 세 가지 이유를 증오시대의 종결자, 공정국가 실천자, 패러다임의 변환자로 꼽으셨는데요. 그때는 안철수 후보가 아직 출마를 선언하기 전인데, 선거 운동이 시작된 지금 시점에서도 그 생각이 유효하신지요?

김지하 시인 말씀이 떠오르네요. 김 시인께선 ‘지난 7월에는 안철수 후보가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라는 질문에 “그때는 잘 몰랐다”며 “정작 후보가 돼서 하는 걸 보니 근 열흘 동안 아무것도…, 깡통이야”라고 비난했다지요. 그러면서 “무식하단 뜻이 아니다”라면서 “처음엔 뭐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어린애”라고도 했다는 말씀 말입니다. 저는 김 시인의 말씀을 존중합니다만, 내심 “아 이렇게 보는 눈이 다를 수 있구나!”하고 좀 놀랐지요.
  하지만 ‘깡통’이니 ‘어린애’니 하는 말에 너무 주목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출마 선언 이후의 안철수에 대해 실망한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인 바, 그런 분들의 생각을 좀 거칠게나마 대변하신 걸로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볼 때에 그런 분들은 안철수에게 확실하게 ‘준비된’ 무언가가 있기를 바랐던 거 같아요. 전 그게 엄청난 과욕이자 착각이라고 보는 거구요.
  맞아요. 안철수는 어린애지요. 우리는 보통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을 말할 때 “어린애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러지요. 그런 점에서 안철수가 어린애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상론엔 두가지가 있지요.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과 실현이 어려운 이상이지요. 정치의 정상화는 후자지 전자는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원하는, 엄청난 빽이 있는 이상입니다. 실망을 한 분들은 팔짱 낀 자세로 그 이상으로 가는 일정표를 평가해보겠다는 자세였던 것 같아요. 전 그런 자세가 모든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보는 데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전 안철수 후보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는 쪽이지요. 조국 교수가 평소 말하곤 하던 ‘정치적 근육’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면서 앞으로 국민과 같이 더불어 해나갈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쪽에 기대를 거는 편이지요. 안 후보 비판 가운데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게 많은지 아실른지 모르겠네요. 예컨대, 준수한 용모를 가진 어느 신문 논설위원님은 각종 방송토론회에 단골로 출연하시면서 안 후보의 ‘청와대 이전’ 검토를 최대의 망발이라며 줄기차게 공격하시던데 그 분은 신문도 안 읽나봐요. 청와대를 ‘후진국형 권위주의 공간’으로 규정하면서 확 뒤집어 바꿀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높았는데, 그땐 잠자코 계시다가 이제 와서 그러시는지.

 

대선을 앞두고 2013년 체제 등 새로운 시대를 구상하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오늘 한국의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승자 독식으로 인해 악화된 내부 갈등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안철수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설사 그가 대통령직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그가 던진 메시지에 우리 모두 계속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우리 정치권은 승자 독식이 반복되기 때문에 결국 증오의 악순환에 빠진다"며 "여(與)나 야(野) 누가 이기면 국민의 절반이 절망한다"고 말했지요. 또 그는 “상대방을 지지하는 국민 절반을 적으로 돌리고, 국민을 반으로 갈라 놓는, 낡은 프레임과 낡은 체제로는 아무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오늘 한국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유권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아무리 잘못된 관행일 망정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따르기 마련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용기와 패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용기와 패기를 치기(稚氣)로 돌리면 일순간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우리 대한민국이 그렇게 안주하길 바라진 않겠지요? 지도자에 대한 신뢰 못지 않게 우리의 국민적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가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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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최고 인기 교양강좌를 책으로 옮긴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의 저자 이상원을 만났다. 인터뷰 준비로 책을 살피면서 뭔가 기발한 교수법과 학습법을 기대한, 여전히 글쓰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나를 돌아보았다. 인터뷰 때 만난 그 역시 비슷했다. 꾸미거나 치장하는 말이 없었다. 질문은 거리낌 없이 그의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있는 그대로 답변으로 튀어나왔다. 그를 만나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글쓰기 수업을 대하는 태도를 들으며 "글은 한 번 쓰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소통의 출발점이자 너와 나,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는 과정의 일부'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수업에서 글을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며 낮은 자세로 학생들의 글을 마주하는 이상원의 인문학 글쓰기 강의를 만나보자.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바탕으로 인문학스터디_인문학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실제 글을 쓰고 함께 읽는 형식의 모임으로 2월 1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합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20112_inmunstudy11

 

 

 

인문학 글쓰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나?

 

책 서두에 6년 전부터 강의를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가 여러 대학에서 학부대학 등 새로운 교양 교육 과정을 만들면서 글쓰기 강좌를 연 시기인데요. 대학 글쓰기 교육의 초창기부터 함께하신 셈인데요. 처음 시작하셨을 때와 지금 글쓰기 교육의 환경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한데요.

글쎄요, 관련한 책은 많이 나왔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해요. 여전히 학술적 글쓰기라 불리는 논리적, 논증적 글쓰기에 치중한 수업이 대부분이거든요.

 

선생님 수업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인데요.

네, 제가 이단아 같은 느낌도 들어요. 그래서 자주 스스로 묻게 되죠. 잘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 혼자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강의하시는 학교의 수업은 인문학 글쓰기, 사회과학 글쓰기, 과학기술 글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역할이 어떻게 구분되어 있나요.

사실 이름은 다르지만 세 가지가 모두 학술 글쓰기의 하나로 큰 차이는 없어요. 다만 애초에 그렇게 나눈 이유는 수강생의 전공 차이가 아닌가 싶어요. 이공계 전공생들이 과학기술 글쓰기를 듣고, 사회과학 글쓰기는 사회과학적 접근을 필요로 하는 전공생들이 주로 들으니까요. 다만 인문학 글쓰기는 누가 듣는지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글쓰기 수업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듣는 사람에 따른 구분인 듯해요. 물론 다른 두 글쓰기는 상대적으로 양식이나 논지 전개 방식 등이 정해진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가르쳐주고 학생들이 여기에 맞춰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거죠. 그런데 인문학 글쓰기는 좀 다른 듯해요. 미운 오리 새끼 같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철학 글쓰기와 어문학 분야의 글쓰기도 상당히 다르잖아요.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은 듯해요.

 

그럼에도 인문학 글쓰기란 강좌를 맡은 초기부터 나를 소개하는 글, 감상 에세이, 주제 에세이 세 가지의 글을 쓰고 함께 읽는 워크숍 형태의 커리큘럼을 구상해서 수업에 적용해오셨잖아요. 초기부터 이런 방식의 수업에 확신을 가지셨던 건가요?

2006년부터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 수업을 진행했어요. 그때 수업이 학생들이 번역한 원고를 서로 읽어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글쓰기 수업을 맡기 전에 모의수업을 했는데, 여기에서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평가가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거죠. 이후에 상황에 따라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큰 방향에서는 변화가 없었어요. 고민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번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시면서 글쓰기를 가르치시고, 번역을 하시면서 번역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개인의 경험으로나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나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을 듯한데요.

개인적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게 말이죠. 제 글쓰기 수업을 보면 글을 쓰고 고치는 일 못지않게 ‘읽기’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거든요. 다른 친구들의 글을 읽어줘야 하니까요. 결국 열심히 읽기라는 게 제가 번역을 하고 번역 수업을 했던 경험에서 오는 것 같아요.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는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저는 이게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이런 면에서 수업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겠지요.

 

 

학생들이 만드는 자유로운 글쓰기 수업

 

학생들에게 글쓰기 과제를 주실 때 주제나 소재를 주지 않고 자유롭게 골라서 쓰게 하시잖아요. 오히려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한다거나 부담스러워 할 것 같은데요.

물론 처음에 주제를 스스로 잡아서 쓰라고 하면 우왕좌왕하죠. 실제 글을 쓰기 전에 기획 발표를 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때까지도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 친구들의 관심사가 다양하거든요. 게임이라든지 만화라든지 자기가 심취한 분야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 글을 써볼 기회는 가져보지 못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걸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고, 이런 도전 자체가 글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공부하고 생각해요. 글쓰기의 중요한 단계이기도 하고요. 대학에서 글쓰기 과제는 대개 주제나 범위가 정해지잖아요. 그래서 그렇지 않은 글쓰기도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유롭게 진행을 하면, 학생들이 써오는 글쓰기의 주제가 정말 다양하겠네요.

네, 주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요. 솔직히 깊이라는 면에서는 얕은 부분도 있죠. 그런데 이 글은 그 학생이 살아가면서 쓸 수많은 글 가운데 한 편이고, 그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시도이기 때문에 저는 이 부족함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에서 예로 든 오렌지주스나 초코 과자에 대한 글을 깊이 있게 끌고 가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써보는 경험 자체가 소중하니까요. 깊이 못지않게 접근의 다양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글쓰기의 주제뿐 아니라 수업의 흐름도 무척 자유로운 듯한데요. 교사로서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까요? 그런 마음이 드는데 참는 편인지 아니면 그런 마음 자체가 크지 않은지 궁금한데요.

아, 저는 그런 마음이 크지 않은 편이에요. 앞에서 혼자 떠드는 걸 싫어해요. (웃음) 일방통행이잖아요. 물론 뒤에 앉아 있어도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럴 때도 주로 참는 편이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때 공백을 메우기 위해 끼어드는 편이에요. 그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힘들진 않아요. 저는 학생들이 절 잊어버리길 바라요. 다만 제가 앉아 있는 이유는 학생들이 수업에 제때 와야 한다는 정도의 의무감을 전해주는 거죠. 그 다음은 학생들 몫이고요.

 

앞서 잠깐 나온 부분인데, 글쓰기 주제를 미리 발표하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요.

하나의 글쓰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글 주제를 발표하는 게 아니라 앞선 글을 다듬어가는 과정에 새로운 글쓰기 주제 발표가 맞물리는 거죠. 사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과정인데요. 학생들이 주제에 대한 생각을 갖고 글쓰기에 들어가도록 해주는 역할도 있고, 서로의 글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어서 좋은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을 합니다. 다른 글쓰기 선생님들께서도 ‘이건 괜찮은데’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결국, 글쓰기는 소통이다

 

학생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댓글을 주고받게 하시잖아요. 오프라인 수업과 온라인 공간에서의 의견 교환이 잘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보통 게시판 문화에서는 좋지 못한 모습도 자주 보게 되는데요.

일단 익명성이 배제된 온라인 소통이라서, 배설하는 식의 댓글을 남기게 되면 다음 수업에서 글쓴이가 그 친구에게 물을 수밖에 없거든요. 왜, 무슨 의도로 이런 댓글을 남긴 건지 말이죠. 그런 면에서 책임과 압박감이 있지요. 그냥 ‘잘 읽었습니다’ 정도의 댓글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 의견을 전개할 정도의 분량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업 시간에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이 있기 때문에 게시판 내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소통하는 경우도 있어요. 댓글을 통해서 잘못을 확인하면 금세 글을 수정하고 바뀐 내용에 대해 다시 댓글로 남겨두기도 하거든요.

 

글을 고치는 일이 정서적으로 쉽지 않은데 게시판에서 그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인다면, 상황을 지켜보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꽤 즐거운 일일 듯하네요. 글쓰기 분량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는데요. 선생님 수업에서는 분량 제한은 없지만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주시잖아요. 그런데 의아했던 게 감상 에세이나 주제 에세이보다 나를 소개하는 글의 최소 분량이 적은 점인데요. 아무래도 자기 이야기를 쓰는 글이니 할 말들이 더 많을 듯한데요.

최저 분량을 정해놓으면 물론 생각의 폭이 제한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학생들 가운데 30% 정도는 최저 분량을 훨씬 넘겨서 써요. 글의 분량에 제한을 둔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짧아지는 부분만 경계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고쳐 쓰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수업을 하다보면 거의 고치지 않는 친구들도 있어요. 의견은 경청하되 최종 판단은 자기 몫인 거죠.

 

선생님 글쓰기 수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 선생님께서는 둘의 차이를 경험해본 세대시잖아요. 차이를 느끼시나요?

저는 학부 때까지는 손으로 쓰고, 대학원 때부터 컴퓨터를 활용했는데요. 너무 악필이어서 컴퓨터가 아니라면 번역을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지 둘의 차이랄까 손으로 글쓰는 일의 의미랄까, 이런 부분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다만 글쓰기 계획을 하는 과정에서 마인드맵핑을 할 때는 손으로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니터 앞에서는 하기 힘든 작업이니까요. 그런데 문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손으로 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필사를 강조하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실제로 해보지 못해서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드는 공력에 비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싶어요. 물론 아예 문장을 만들지 못하는 정도라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수업 평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우선 첨삭이 없다는 부분이 의아한데요. 많은 분들이 글쓰기 수업을 듣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강사가 조목조목 짚어주기 때문일 텐데요.

제 첨삭이 없다뿐이지, 저는 실제 첨삭이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서로 첨삭을 해주고 있으니까요. 제가 첨삭한다고 했을 때 이야기할 부분은 학생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거의 다 나오거든요. 만약 안 나온다면 제가 개입해서 한두 마디 더할 수도 있고요. 제가 첨삭을 안 하는 부분은 비판받을 여지도 있을 텐데, 첨삭이 일방향 소통이 되거나 제가 제시하는 정답을 보여주는 데 그친다면 오히려 제가 생각하는 수업의 방향과는 배치될 수도 있으니까요. 당연히 첨삭을 꼼꼼히 해주시는 선생님들의 노고는 칭찬받아 마땅하지요. 다만 전체 수업의 그림에서 이런 선택을 한 거라는 변명 아닌 변명이에요. (웃음)

 

수업의 평가는 절대평가인데요. 다행입니다. (웃음) 세 가지 글을 써내는 일에서 낙오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상대평가였다면 채점자 입장에서는 난감할 듯하거든요. 물론 절대평가라 해도 기준은 있을 터인데,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글 세 편을 제때 썼는지, 친구들의 글에 댓글을 제대로 달았는지는 양적 지표로 나오는 것이고요. 수업 시간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제가 판단하는 부분이지요. 그게 다죠 뭐. 출석도 수치로 나오는 거고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면 A+나 A0를 받는데, 절대평가 수업이라서 A0를 받은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많아요. 할 수 없어요. 싸워야죠 뭐.

 


모든 글은 귀하다

 

나를 소개하는 글, 감상 에세이, 주제 에세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어떤 글을 읽을 때 가장 즐거우세요?

다 재미있죠. 비교는 어렵고요. 각자 다른 재미지요. 나를 소개하는 글은 기발한 내용이 많은 데다,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글을 읽고 실제 강의실에서 얼굴을 마주하기 때문에 둘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어요. 감상 에세이는 서로 다른 경험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재미있어요. 영화라든지 여행이라든지 하는 내용이니까요. 마지막 주제 에세이는 내용을 두고 논쟁이 많이 벌어져요. 이렇게 각자 재미가 있는 거죠.

 

본문에서 학생들의 글 일부분을 직접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본문과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느낌은 덜했거든요. 그리고 뒷부분에 학생들의 글을 일부분이 아니라 통으로 보여주시는데 이렇게 배치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일단 밀접한 연관성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는데, 우선 저는 보여주고 싶었어요. 말로만 설명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실제 어떤 글을 쓰는지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앞부분에는 일부분만 보여주기 때문에 전체를 보여주자는 생각에 뒷부분에 따로 글 전체를 넣은 건데, 여기에는 다른 생각도 하나 있어요. 이 책이 단순히 글쓰기 강의를 보여주는 걸 넘어서 요즘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읽어보셨겠지만, 상당히 감동적이거든요.

 

한 학기 수업으로 마무리가 되는데요. 학생들이 이후에는 각기 다른 글쓰기를 경험하게 될 텐데,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선생님의 수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각자 다른 인생 경로가 펼쳐질 텐데요. 공부를 해나갈 학생들은 주로 주제가 정해진 글쓰기를 경험할 텐데, 그렇더라도 내 글을 읽는 사람을 미리 생각해보는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읽을 사람들을 배려하는 시도를 하게 될 거라 기대해요. 회사에 들어가서 기획서를 쓴다거나 하는 친구들에게는 형식과 내용의 기발함이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자유롭게 글을 쓸 친구들에게는 자기 글을 두고 일종의 합평을 해보았다는 경험이 앞으로 글을 쓸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주제 에세이나 감상 에세이를 소설로 쓰는 친구들도 있거든요.

 

결국 읽는 이를 미리 생각해본다는 점이 중요한 부분이군요. 책에서 가장 와 닿았던 말이 “모든 글은 귀하다”였거든요. 우리는 늘 다른 이의 글을 평가하는데, 선생님 글쓰기 수업은 거기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때문에 모든 글에 이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깨달음이기도 해요. 저도 논문을 썼고,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읽기도 하는데,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이걸 읽는 태도도 달라졌어요. 글쓴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결과이기 때문에 존중해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학생들도 서로의 글을 그렇게 대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주는 것 같고요. 자기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글이라도 열심히 읽어주고 내가 왜 동의할 수 없는지 찾아보는 게 그 글에 대한 합당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이런 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인 것 같아요.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 질문이 남았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추천해주셔도 좋고, 선생님 강의를 들을 학생들에게 추천해주셔도 좋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제일 처음 글쓰기에 영향을 주신 분이 이오덕 선생님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 글을 처음 읽었는데, 그야말로 꾸밈없는 글을 강조하신 분이시잖아요. 제가 하고 있는 많은 생각이 선생님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 학생들은 책 이외에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여러 곳에서 생각을 찾거든요. 그래서 뭘 하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생각을 이어가면 좋겠어요. 이걸 내가 왜 좋아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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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올해의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 '나는 꼼수다'가 제일 위에 오르지 않을까 싶다. 바람이라면 잦아들 때도 되었건만 엄청난 취재와 자료를 바탕으로 뿜어내는 가공할 예지력에 이제 나꼼수 열풍은 메가톤급 태풍이 되어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다. 관련하여 나꼼수 멤버들이 출간한 책도 큰 호응을 얻고 있는 바, 알라딘에서는 이들 네 명을 차례로 인터뷰하기로 작정했다. 지난 10월 28일 김어준 총수의 인터뷰를, 11월 24일 김용민 피디의 인터뷰를 각각 진행했고, 오늘 김총수, 내일 김용민 피디의 인터뷰를 차례로 공개한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다른 두 분의 인터뷰도 진행할 예정이다. 물론 이전 두 인터뷰와 동일하게 트위터로 실시간 중계를 할 예정이다.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린다. 

(인터뷰 녹취에 트위터리언 @81231004 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사진은 총수의 거부로 따로 찍지 않았습니다.) 

총수님께 축하드릴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그러게 왜 다들 저한테 축하를 하는 건지.

<닥치고 정치>가 전 서점에서 종합 1위를 했는데요. 스티브 잡스 자서전 때문에 2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아, 알라딘에서는 하루를 더 견뎠네요.
알라딘에서 제일 먼저 1등하고 제일 늦게 내려왔네요. 잡스는 우리에게 기회를 줬기 때문에 약 2주 정도 양해할 생각이 있어요.

나꼼수의 영향도 있지만 어쨌든 이 책의 성공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텐데, 총수가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요.
제 사진이죠. 하하하.

사진 하니 마지막 문장(“나는 잘생겼다! 크하하하)도 떠오르네요. 사진과 관련해서 트위터에서 질문이 하나 올라왔는데 셔츠가 좀 커 보인다네요.
아 멋을 몰라서 그런다고 전해주세요. 나름의 스타일.

딴지일보가 온라인 미디어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고 나꼼수도 새로운 흐름의 중심에 있는데, 총수님은 의외로 SNS를 안 하시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책에 다 써 있는데요. 천성이 게을러요. 좀 길게 얘기하자면, 물론 SNS가 일상에서 전혀 만날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냈고 실시간으로 소통하게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두고 웹상의 트친들과 소통하느라고 리얼 스페이스, 현실 세계에서의 상대하고는 대화가 끊어져요. 일종의 디지털 분리 불안이죠. 그게 안 하게 된 절대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그런 요인도 하나쯤은 있다는 거죠.

역시 면 대 면이 좋다는 말씀인가요?
나는 직접 만나는 게 좋아요. 천성이 그래요. 그리고 그게 일종의 트렌드이기도 하잖아요. SNS가 가진 장점도 많고 그 장점 때문에 유행한 것도 있지만 유행 때문에 하기도 하잖아요. 전 유행에 둔감해요. 남들이 다하기 때문에 싫어, 이런 건 아니에요. 그런 트렌드가 재미있으면 같이 가죠. 그런데 트렌드이기 때문에는 안 가요. 트렌드에 뒤처지는 게 불안을 주거나 무섭거나 내가 낙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어요.

솔직히 ‘바빠서’, 뭐 이런 간단한 답변도 기대했습니다만
내 주변은 거의 다 트위터를 하는데 그들이 에너지를 너무 쏟아요. 나는 거기에 에너지를 나눌 여력이 없어요. 물론 나는 꼼수다를 해서 제가 알리고 싶은 걸 트위터를 통해서 알릴 필요도 있겠지만 그런 이득만큼이나 손해가 크다, 내가 이걸 하면서 뺏기게 된 에너지가. 그리고 트위터를 통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공박해서 이해시키고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설득 가능한 대상과 싸우는 게 아니다, 지금. 우선순위가 달랐던 거죠.
 
언젠가 하실 날도 오겠죠?
트위터를 하든 자기 블로그를 가지고 있든 누구나 오해를 받잖아요. 누구나 자기를 있는 그대로 남한테 설득할 수 없어요. 이해시킬 수도 없고. 그러면 이런 걸 하게 되면 자기를 이해시키고 싶은 욕구가 막 솟구쳐요, 모두가. 사람들이 제일 못 견디는 게 오해거든요. 그리고 그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자기에게는 대단히 큰, 거기에 매달려서, 이해는 가지만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경우가 많아요. 트위터에 열성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의 핵심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거거든요. 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생각이 없어요. 오해에 대해 반응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모두에게 이해시키려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트위터에 대한 필요가 없는 거죠. 지금은. 앞으로 영원히 안 하겠다는 거는 아니고 현재 상황에서는 해서 얻는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크다. 뭐 그런 종합적인 생각이에요. 해명, 변명, 이해시키기, 그런 게 싫어요 전. 귀찮고.

독자 리뷰 가운데 내용 관련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 도입부인데요. 좌파 우파 이야기하시면서 일종의 진화심리학 같은 설명을 하셨는데,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게 이런 무학의 통찰에 이르기 위해 어떤 수련이 필요한가인데요. 이전 인터뷰에서 부모님의 교육이 남달랐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만.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부모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분은 철저하게 방목해주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금기가 없었다는 거고요. 여행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다 보니 사람이 사는 데 지켜나가야 할 규칙이라는 게 대단히 단순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하필 내가 한국에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하필이면 사모아에서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짐바브웨에 태어나잖아요. 우연히 그렇게 태어나서 그 공간적 시간적 제약 속에서 사는 거죠. 지역과 시간에 따라 적용되는 특별한 규칙이 있거든요. 여행을 다니다 그렇게 특수해 보이는 규칙들이 대부분 사소하고, 또 결국 사람 사는 데 통하는 규칙은 대단히 단순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저는 그게 상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람 사는 곳에 으레 통하는 상식, 그 상식의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가 지켜야 할 보편 상식이 복잡한 게 아니거든요. 그걸 제외하고는 그 주변에 존재하는 무수한 이론, 개념들은 그냥 하나의 참고사항이다, 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니까 애초에 금기가 없었던 데다가 여행을 다니면서 얻은 깨달음이 더해진 거군요.
네, 그렇게 껍데기가 사라지는 거고. 그럼 진짜 본질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이 이어진 거죠. 오로지 이 사건의 본질이 뭘까, 이 현상이. 이렇게 생각하는 게 훈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운 좋게 몸에 쌓인 거죠. 그러다 보니 좌파, 우파에 관한 무수한 책들과 설명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거고요. 그가 마르크스라 한들, 마르크스는 인간이 아니냐 씨바. 다만 상당히 똑똑하고 명석했던 인간이다. 하지만 그도 그 시대에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이죠. 마르크스도 뻘 소리 많이 했어요. 그렇다고 그가 멍청하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이상하거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당대의 천재는 맞는데 그 사람의 이론도 한 사람의 이론인거고, 그래서 그 사람의 이론도 하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모두가 각자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별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이군요.
모두 그렇게 비슷한 정도의 가능성을 두고 그냥 상황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건 청소부 아저씨건 저한테는 똑같은 사람이에요. 지위가 그 사람은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청소부 아저씨가 더 위대해, 이러면 오바고. 계급장 떼고 보면 다 인간이니까. 근데 그걸 의식적으로 계급장을 떼고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계급장 떼고 단어를 빼고 이론을 빼고 있는 그대로 현상이 뭔지 그렇게 보도록 생겨 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좌우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던 거죠. 최초의 출발은 똥 누다가 였던 거 같아요. 무슨 책을 보다가 좌파가 어떻고 길게 썼는데, 맞는 얘기들도 있지만 불완전한 얘기들도 있고 틀린 것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뭐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이런 게 아닐까? 그러니까 무학이라고 하는 거고요.

결국 직관과 통찰이라는 말씀이군요. 시작은 화장실에서...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과학적 발견이나 철학적 사유나 그런 게 대단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엄정한 과학적 추론을 통해 탄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아요. 굉장히 놀라운 과학적 발견들은 대부분 직관과 통찰에 의해 발견이 되었어요. 이러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거죠. 중간에 엄청난 논리적 갭이 있는데 이러지 않을까 생각하고 거꾸로 그걸 자기 직관과 통찰로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게 많다는 거죠. 그 직관과 통찰이라고 하는 게 인간에게 있는 굉장히 강력한 무기인데 이것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이성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꼼수는 2013년 2월에 종방이라고 말씀하셨고, 닥치고 정치 본문에서는 문재인 이사장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두 가지의 접점은 결국 내년 대선이잖아요. 이 책을 쓰실 때와 지금의 시점 차이가 있는데, 변화된 지점이 있을까요.
없어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만나보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인상 비평하는 걸 즐기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하죠. 어떤 사람들은 개그맨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입만 살아서 나불댄다고 생각하고. 입이 나불대라고 하고 있는 거지. 씨바. 안철수랑 박원순이 나온다고 해서 대선이 바뀔 것도 없어요. 안철수가 나올 거라고 생각도 안 하고. 말만으로는 부족해요. 직접 만나보고, 그 사람이 나온 길을 보고, 했던 말들을 종합해보고, 했던 선택들을 봐야지. 말은 자기를 잘 못 표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상황에 따라서 그 말을 해야 해서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말을 가지고 말꼬투리를 잡거나 이러니까. 말도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직접 들었을 때 말과 보도된 말을 들었을 때 전혀 달라요. 그러니까 저는 그 사람을 만나보고 판단해요. 특히 정치는. 문재인 이사장은 그렇게 만나본 사람 중에 최고라 이거죠. 개인적으로.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세대 정치의 뚜렷한 반영이 보였잖아요. 나꼼수의 지지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적극지지층인 2, 3, 40대에 대한 전략이 하나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 여전히 나꼼수를 모르고 또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략이 있을 텐데요. 듣지 않는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게 기본 태도일까요?
아니요, 듣고 있는 사람도 신경 안 써요. 우리의 일관된 철학입니다. 이걸 듣는 사람들, 지지하는 사람들의 요청도 수십만 가지예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니 우리가 생겨 먹은 대로 갈 거예요.

나꼼수 역풍과 검찰 조사 등 앞으로 공권력, 정치권에서의 압력들이 더 거세질 것에 대해 어떻게 예측하고 대응할 계획이신지.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고요. 다 예상한 바고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도 다 나름의 계획이 있습니다. 앞으로 재밌는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항상 예상한 대로만 움직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트위터로 올라온 몇 가지 재밌는 질문들이 있는데요. 주진우, 김용민, 정봉주 이 세 분이 대선출마하면 셋 중에 누구를 지지할 거냐 하는 질문입니다.
바보짓은 하지 말라 그래.

만약에 각하 퇴임 시에 나꼼수가 막방을 한다. 그러면 이후에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
계획 없어요. 저는 항상 혹시 내가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는 스타일이지, 무려 1년 4개월 후의 계획을 지금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나 이건 말할 수 있어요. 잘할 거다.

지금까지 진행된 나꼼수 방송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화가 있다면요.
지나간 건 생각 안 해요. 다음 걸 더 재밌게 어떻게 할까 생각하죠.

가장 존경하는 정치 지도자가 있다면. 국내외 가리지 않고.
저는 사람이 사람을 존경할 일은 없다고 봐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무시하거나 존중하거나. 그런 거죠 뭐. 사람끼리 뭐 존중씩이나 해. 다 불완전한 사람끼리.

김총수께서는 남자의 포스를 꽤나 풍기시는데, 본문에서 서른 중반에 남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남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애를 많이 해봐야 해요. 연애를 해야 자기가 찌질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점에 가니까. 자기가 찌질한 걸 알아야 안 찌질해져요. 자기가 찌질하다는 걸 모르면 찌질해져요.

본인이 연애하면서 했던 찌질한 짓도 있나요?
저는 연애하면서 거의 찌질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연애를 하다가 도망가거나 내가 더 유리하려고 사기를 치거나 그런 게 찌질한 거거든요. 아니면 상대를 내 뜻대로 하려고 억지를 부리거나. 그래본 적이 없어요. 제가 해보지 않았지만 그런 경우를 많이 봤죠. 연애 상담의 90%는 그거예요. ‘나 안 찌질하지?’ 자기가 찌질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거예요.

나중에 더 나이 들면, 배 나오고 지성 있는 아저씨들이 있는 불친절한 바를 운영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대략의 개업 시기는 언제일까요?
가카 퇴임 후에 생각해보죠. 지금 가카랑 노느라 바빠요.

창업 멤버에는 나꼼수 멤버들도 다 포함이 되는지?
나중에 생각해 보겠다니까요. 지금 네 명은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모인 거지,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나중에 한 번 해야지, 여기까지 생각했지.

총수 본인이 생각해도 이건 좀 저질인데, 저급한데 이렇게 생각해본 욕망이 있는지.
제 상상에는 금기가 별로 없어요. 다만 상상대로 하지 않죠. 행동으로 옮기면 반사회적이거나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상상에서는 뭘 못해요. 이런 상상도 하고 저런 상상도 하고 다 하는 거지. 

다음 정권에서 정부에 들어간다면 국정원장이 제격일 듯한데 어떤가요.
공무원이잖아요. 하기 싫어요. 공직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은 부담이 안 되는데 그에 따르는 의무들 그건 귀찮아요.

교통방송 사장도 공직인가요?
그건 박원순 시장 당선 직후에 사석에서 선언했어요. 교통방송 포기한다. 우리한테 밥 한 끼만 사라. 이렇게. 서울시청 식당에서 밥 한 끼만 사라. 그걸로 퉁 쳤어요.

최근에 김용민 신간과 정봉주 의원 신간이 나왔고. 연말까지 나꼼수 관련 책들이 연달아 나올 텐데, 대개 반기는 편이지만 한편 너무 빨리 소진되는 게 아닌가 싶은 우려의 시선도 있습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딱 한 권씩만 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들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잖아요. 사실 김용민은 오래전부터 계속 책을 써왔어요. 그동안 안 팔렸을 뿐이지. 그런데 그게 갑자기 이것 땜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는 거죠. <조국 현상을 말하다>도 나꼼수와 상관없이 나온 거예요. 제 책만 오로지 나꼼수와 어느 정도 관련해서 나온 거고. 정봉주 의원은 선거에 출마할 거니까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많이 나온 게 아닌데 그렇게 보일 수 있죠. 누가 그렇게 꼼꼼히 상황을 챙기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들에게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용민이는 벌써 예전부터 써놓은 책이 몇 권이 있는데. 오히려 일부러 안 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일까봐. 걔는 쓸데없이 많이 쓰거든요. 재미도 없는데. 나꼼수 관련해서는 용민이도 한 권, 저도 한 권인 거예요. 참, 그리고 이런 것도 있죠. 출판사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으니까. 다 거절해도 되는데. 그간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도 있죠.

벌써 다음 책 기대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글쎄 다음은 생각하지 않는다니까요. 제 장점은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들은 계획부터 세우잖아요. 계획이 안 될 경우를 상정하고,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할지 상정하고, 그리고 그게 실패할 경우 내가 어떻게 변명할 건지 고민하고, 졸라게 생각해요. 그리고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막 힘들다고 하고, 안 될 수도 있다고 하고, 보호막 치고, 그러다 자기가 설득돼. 그러고 안 하죠. 그런 사이클이 졸라 많죠. 저는 그냥 하는 스타일이에요. 하고 싶다. 하자.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이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이 다음이 오면 생각하면 되죠.

나꼼수 콘서트는 방송을 듣거나 책을 본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무엇보다 큰 의미는 고맙다는 부분이에요. 물론 실용적인 의미로는 서버 비용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미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의미만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했을 거예요. 분명히 고마운 부분이 있어요. 티셔츠도 팔아주고 계속 유지되도록 응원도 해주고. 이런 유대가 있죠. 그 유대에 대한 연대의식. 유대감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면 되요. 그러나 계속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이것만 하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거거든요. 또 할지 안 할지는 몰라요. 계획이 없기 때문에.

FTA 관련해서. 노무현 대통령을 언급한 광고가 나왔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FTA, 이번 정권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런 식의 광고인데요.
비겁한 광고죠.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FTA에 이미 독소조항이 있었어요. 그것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현실화된 것이죠. 물론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이 빠졌으면 좋았겠죠. 그게 정부가 할 역할이었고. 왜냐면 당시 시민사회에서 몇 가지 독소조항 이야기하면서 과거 멕시코의 사례를 볼 때 미국 국회에서 비준을 받으려면 이런 조항들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예상했단 말이죠. 우리 정부가 협상력이 있었다면 그런 조항들이 안 들어가도록 만들었겠죠. 물론 그때 당시만 해도 예상이었기 때문에, 그중  일부는 예상에 그쳤고 일부는 실제 포함된 거죠. 노무현 FTA와 이명박 FTA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요. 같은 점에 대해서는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입장을 밝혀야 할 부분이 있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있는 거고요.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시작했던 FTA에서 사실, 제 개인적으로 볼 때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과오는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가 뭔지 체감을 하지 못했다는 건데요. 그 당시만 해도 용어로만 존재했지 그게 어떻게 사회를 양극화 시킬 것인지 거기에 대한 이해가 없었거든요. 그건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긴 해요. 하지만 노무현 정부만의 잘못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정부니까 책임져야죠. 그걸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임기가 많이 남지 않았을 때였어요.

FTA 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이해가 부족했다는 말씀인가요?
당시만 하더라도 노무현 정부의 발상은 이런 거였거든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 FTA를 체결하지 않은 OECD 국가는 두 군데밖에 없었어요. OECD국가였나 아니면 WTO 체제 국가였나 헷갈리는데, 둘 중 하나예요. FTA 자체가 악은 아니거든요. 협정일 뿐이죠. 그러니까 그게 상호 이익의 균형에 맞는가. 그리고 우리 쪽 불이익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 권리를 침해하진 않는가. 우리가 불리할 경우에 그것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지 FTA 협상 자체가 악은 아니에요. 통상 협정이고 어느 나라와도 맺을 수 있죠. 그 균형을 맞추느냐 못 맞추느냐의 문제인 거죠. 지금 FTA를 반대하는 쪽은 FTA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정교하게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보이죠. 거꾸로 따지면 미국한테 FTA가 악인가요? 미국한테 유리하니까 한 거잖아요. 협정이 악일 순 없어요, 조건이 악할 수 있는 거지. 그 조건을 따져내는 데 있어서 협상을 담당했던 우리 측 관료들이 대단히 친미적이었고, 실제 미국에게 협상 당사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했고. 또 그것을 노무현 정부가 통제하지 못했고. 그러니 노무현 정부의 책임도 있고 우리 정부 관료 자체가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들이라는 근본적인, 태생적인 한계도 그 안에 있는 것이죠. 어쨌든 노무현 정부 FTA의 최초의 출발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있는데 다른 국가들과 경쟁을 하는 와중에 우리가 보다 좋은 조건으로 미국과 협정을 맺어서 그 시장을 선취하자, 이런 발상이었던 거죠. 저는 그 발상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FTA 얘기가 너무 긴데? 씨바.

그래도 마무리는 해주셔야.
어쨌든 노무현 FTA와 이명박 FTA가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책임질 부분이 있고 이명박 정부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 그 두 개가 분리되어야 하고 노무현 정부의 인사들이 답할 부분이 있고 현재 이명박 정부가 책임지고 답할 부분이 있다. 이렇게 정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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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ly 2011-12-1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무현과 그의 정부가 신자유주의가 뭔지 체감하지 못해서 FTA를 추진했다라고 하는 이 어이없는 분석의 기초는 무엇일까?
그럼 노무현 이전의 정권들은 모두 박정희식 국가자본주의나 케인즈주의식 경제정책을 추진했단 말인가?
신자유주의가 계급의 문제인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그의 의식에 다시 한번 아찔함을 느낀다.

jdh8479 2012-01-11 08:06   좋아요 0 | URL
탈규제적 개방의 폐해가 얼마나 클지 모르고 추진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가 잘못된 점을 늦게 깨달았다고 얘기하는 것인데, 글을 제대로 정독하면 알 내용인거 같고요.
당신의 논리를 그대로 빌어 신자유주의만이 '계급'의 문제라는 어이없는 분석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계급'의 문제와 그 사고 프레임을 이용한 사회주의적 해석방식은 박정희식 국가자본주의는 노동계급
을 착취한 체제일 따름이며 케인즈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폐해를 개량한 것일 뿐이라며 비판하지 않습니까? 요컨데 '어느 체제'에서든 '계급'의 프레임으로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 '신자
유주의'의 문제점을 '계급'의 해석방식으로 깨달았다고 새삼스러워 할 것도 없는 거지요.

cncjs 2012-01-0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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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과학과 사회가 한데 엮여 있다는 건 상식이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지식의 확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황우석일 게다. 어찌 되었든 그 이후 관련 도서들이 꾸준히 나오며 나름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최근 알라딘 과학 분야에는 아예 과학사회학(STS)가 따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과학의 언어>, <한국의 과학자 사회>, <부정한 동맹>, <셀링 사이언스> 등 이 분야 도서를 꾸준히 출간한 궁리에서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이란 재미난 책을 새로 펴냈다. 과학과 사회과 다투거나 삐지거나 등돌린 열세 가지 주제를 재료 삼아 '두 문화'의 즐거운 만남을 시도한다. 아래 내용은 궁리 출판사에서 출간 직후 저자 강윤재 교수와 나눈 인터뷰다. 자연과학출판인회의와 알라딘이 함께하는 '과학책이 세상을 구한다' 캠페인 8월 이달의 과학책 선정에 더해 아래 내용을 함께 올린다.

이달의 과학책 페이지 :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110803_science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은 과학과 종교, 과학과 전쟁, 과학과 여성 등 사회적 맥락에서 과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좀더 이야기해주세요.

이 책은 과학을 외톨이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사회와 더불어 사는 친구로 이해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흔히, 과학 하면 사회와는 무관하게 세상에서 고립된 무인지경으로 생각하기 쉽잖아요. 과학자란 홀로 진리를 찾아나선 구도자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 과학과 과학자의 모습은 ‘과학의 황금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것입니다. 과학의 사회적 쓰임새가 획기적으로 커진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과학에 대한 이해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과학 그 자체에 몰두하여 과학의 본질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망을 폭넓게 조망하여 과학의 다양한 모습을 접할 때 우리는 보다 더 과학의 참모습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과학과 관련된 13가지 주제가 실려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쟁점들도 있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도 있습니다. 역사적 쟁점은 주로 과학의 성격을 둘러싼 것이라 할 수 있고, 현실적 논쟁은 과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은 과학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수년간 수업을 하면서 가다듬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주제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취하고 있는 관점은 논쟁을 진위(眞僞)의 문제가 아니라 대칭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쟁에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대개의 경우 승자는 왜 이겼는지, 패자는 왜 졌는지를 설명해주는 접근방식을 취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서로의 주장을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가급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모든 논쟁에는 찬반이 있기 마련인데, 사실은 두 입장 모두 나름의 옳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위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고 대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법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 논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 짓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고, 과학의 참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과 사회, ‘두 문화’의 갈등 문제는 그 기원이 언제쯤으로 거슬러올라가는지요?

‘두 문화’라는 개념이 학술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50년대에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인 영국의 스노우(C. P. Snow)가 케임브리지 리드 강연에서 한 연설에서 유래했습니다. 그의 강연은 현재 <두 문화>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두 문화의 경향이 유독 강한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반과 이과반을 선택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교육과정은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창조력이 요구되고 종합적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이 때, 따라서 특정한 한 분야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융합과 결합이 중시되고 있는 이 때, 문과와 이과를 일찍 선택하는 교과과정은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취지와 정반대로 반쪽짜리 전문가만 양성해내는 셈입니다. 조속한 시정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책이 잘못된 교과과정에 따른 여러분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두 문화’의 갈등이 아니라 과학과 사회의 생산적 만남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같은 장르를 낳고 있습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활동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르는데, 이 잣대를 과학자에게 적용하는 순간 혼란스러워짐을 느낍니다. 자주 드는 사례가 핵무기 개발 관련한 것인데요, 과학자는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까지 져야 하는 걸까요?

본문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사실 그 답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 여부가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기원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더욱이, 과학이 아니라 핵무기처럼 기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더욱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은 기술의 개발 자체는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고, 오직 그 사용자에 의해 사회적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기술의 개발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기술은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자는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술이 다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칼은 비교적 가치중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나 의사가 사용하면 매우 유익하지만 강도가 사용하면 흉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칼을 만든 기술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자폭탄은 경우가 다릅니다. 원자폭탄은 결코 좋게 쓰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과 건물을 파괴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이런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애국과 인류애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가치중립성을 이유로 댈 수는 없습니다. 또한 원자폭탄이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서는 그 개발에 참여한 과학기술자들도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태에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철면피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양심적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참고로, 독일의 과학자들은 비인도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피해자가 내 가족이거나 이웃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책임이 있기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반대를 외쳤던 것입니다.


‘연금술사 뉴턴’ 편에서는 경제학자 케인스가 소더비 경매에서 뉴턴의 미출간 원고들을 사들여 살펴보다가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천재 과학자가 30대에 들어서 연금술과 <성경> 연구에 몰입했다고 해서 조금 어리둥절한데, 그렇다면 과연 뉴턴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일까요. 아니면 시대의 산물일 뿐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책을 읽어보시면 궁금증이 다소 풀리실 텐데요. 중요한 것은 개인과 시대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개인은 시대를 선도하지만, 시대의 물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요지는, 개인과 시대를 분리해서 어느 것이 먼저냐는 문제는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별 볼일 없는 저도 이 시대에 살면서 어느 짧은 순간에 이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뉴턴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과학이나 과학자에 대해 얼마나 큰 허상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뉴턴을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천재로만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17~18세기 영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흑사병이 창궐하고 기독교가 굳건한 사회를 살면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실망하고, 슬퍼했을 사람이었을 텐데, 왜 우리는 그의 보통 육체는 보지 않은 채 그의 위대한 정신만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왜 유독 뉴턴에 대한 신화가 많은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뉴턴이 현대과학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위대할수록 그 아버지 또한 위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뉴턴을 시대를 초월한 위인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뉴턴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뉴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회가 뉴턴의 이야기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마치 유신시대에 성웅 이순신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우상화는 그 순수성을 잃고 결국은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를 옥조여오는 것이지요. 절대적 권력이 부패하는 것처럼 절대적 과학도 부패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과학이 아니라 균형을 갖춘 현실적인 과학입니다.


현대로 와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 기후 변화, 우주 개발 등 좀더 다양한 곳에서 과학과 사회의 갈등폭이 커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합리적 판단이 과학에서만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합리성을 크게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으로 나눕니다. 이 때 과학적 합리성이란 최적의 선택을 위해서 전문가가 인도하는 과학(지식)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사회적 합리성이란 사회적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현대사회에서 최고의 지식은 역시 전문가에서 오기 때문에 그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고요, 후자는 그래도 인류 최고의 제도는 민주주의이니까 과학기술의 문제에서도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가령, 유전자 변형 식품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전문가들은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안전성의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식품이 기존의 식품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민단체들은 최악의 경우 이런 식품이 인류의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인류에게 치명적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과학적 합리성은 전문가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허용여부를 선택할 때 최선이라고 보는 반면, 사회적 합리성은 그 피해가 인류 전체에 미치는 만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의견을 충실하게 반영한 선택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느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절충적 입장이 현실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들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토론회와 모임에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갈고닦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교수님이 과학자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첨단무기를 개발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무기는 자칫하면 인류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럴 때 애국과 인류애 중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민족주의자이긴 합니다만 인류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군대 있을 때 사격은 잘 했지만 첨단무기는 왠지 느낌이 섬뜩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섬뜩한 느낌은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3>와 같은 영화를 보시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무인정찰기는 물론 정찰개 로봇과 곤충 로봇 등 수많은 전투로봇이 선보이고 있는데요. 저는 과학자들에게 소리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인류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어!!!”


앞으로 또 어떤 책들을 집필하거나 번역하고 싶으신지요?

앞으로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싶습니다. 물론 과학책도 번역하고 싶고요. 특히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하는데, 위험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위험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정리해줄 필요가 있는데,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그런 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과 사회 문제를 다룬 책들 중 독자들에게 더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요?

국내학자가 쓴 책과 번역된 책 합쳐서 꽤 많은데요. 아마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출판된 책 위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골렘>과 <닥터 골렘>을 추천합니다. 골렘이란 유대교에서 나오는 인간의 피조물인데, 평소에는 인간 주인의 말을 잘 듣지만 가끔 화가 나면 주인을 해치기도 합니다. 과학이 바로 이런 골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과학의 참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적 과학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과학과 사회운동의 사이에서>와 <시민과학자로 살다>(조금 오래된 책인데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명의 느낌>, 과학과 사회의 어두운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한 동맹>, 전염병과 현대문명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염병의 세계사> 등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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