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여름이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하는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공식 명칭은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14選)가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재작년, 작년 예전만 못한 타율에 절치부심했는지 이번에는 종수를 줄이고 집중하는 모습, 현재까지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합니다. 공개된 자료를 보니 선정기준은 네 가지입니다. 외부 CEO 추천 /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추천 및 내부 검증 / 2009년 이후 발간 / 인문교양의 경우 소설, 종교 관련 서적은 제외. (크게 문제 삼을 건 아니지만) 선정 기준과 방법이 뒤섞여 있는 듯한데,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명확한 기준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함께 발표한 '설문을 통해 본 한국 CEO의 독서 경향' 자료가 재미난데 최근 한국 CEO의 독서 화두는 이렇답니다.
자연, 인간, 사회와의 공존 25%│신(新)사업 및 사업확장을 위한 힌트 찾기 20.4%│마음의 평안과 희망 찾기 18.6%│전문적 교양지식 습득 18.1%│소통의 비법 발굴 14.6%
'자연, 인간, 사회와의 공존'이 1위. CEO라 하면 두 눈 부릅뜨고 효율성과 생산성 제고를 고민하며 사업확장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 떠올라 독서 경향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채롭습니다. 이런 설문이 반영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는 경제경영 7종, 인문교양 7종으로 다음과 같습니다.(<논어와 주판>과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은 같은 내용의 책입니다.)
[경제경영 7選]
[인문교양 7選]
앞서 말씀드린 CEO들의 독서 경향에 부응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 목록입니다. 여름휴가이니만큼 발상의 전환을 제시할 만한 강력한 목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류임을 철저하게 자각하며) Sorry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어보았습니다. Sorry가 워낙 해석의 여지가 많아 똑 부러진 설명을 해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아류인지라,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방패막이 삼아 제멋대로 선정해보겠다는 심보로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대상도서는 2010년 상반기 출간도서, 선정기준은 알라딘 인문MD의 의욕과 경제경영MD의 응원입니다. '자연, 인간, 사회와의 공존'에 관심이 많은 CEO를 위해 '노동자와 입장 바꿔 생각하기', '기업의 생존본능 다스리기'라는 주제로 각 5종, '마음의 평안과 희망 찾기'와 '전문적 교양지식 습득'을 갈구하는 CEO를 위해 '진짜배기 교양 쌓기'라는 주제로 5종을 선정해 총 15종입니다.
[노동자와 입장 바꿔 생각하기 - 만국의 노동자는 이렇게 삽니다!]
이달 초 최저임금이 4320원으로 일단 결정되었는데, 경영자 측에서는 작년 최저임금 4110원 동결을 주장하다 결국 회의장에서 나갔다고 합니다. 7월 3일 새벽에 표결했고 10일 동안 이의 제기 기간이라는데 아직 별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대로 가는 듯합니다.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하면 100만 원 남짓 되려나요. 마음이 허합니다. 그건 그렇고 매년 찾아오는 메이데이지만 올 5월에는 '노동자 일기'라 부를 만한 책이 여러 종 나왔습니다. 한겨레 기자들이 노동현장을 체험하고 '노동OTL'이란 기사로 옮겼던 <4천원 인생>, 노동 월간지 <작은책>이 창간 15돌을 맞아 그간 꾸준히 소개한 노동자들의 생활글을 모은 선집 <우리보고 나쁜 놈들이래!><누가 사장 시켜달래?><도대체 누가 도둑놈이야?>, 노동운동가 하종강 선생이 '여성'을 중심에 두고 풀어낸 <울지 말고 당당하게>, 르포작가 오도엽이 4년 동안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밥과 장미>를 기억합니다. 여기에 올 초 출간되어 조지 오웰의 프리퀼로 자리 잡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살짝 더합니다. 추천의 글을 쓴 박노자 선생의 표현을 옮겨둡니다. "오웰은 이 책에서 노동자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허락하지 않는 비참한 노동과 생활의 여건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져올 사회주의의 요체도 잘 설명한다."
[기업의 생존본능 다스리기 - 앞만 보고 가다가 큰코다칩니다!]
메세나,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말이 상식처럼 돌아다니는 요즘입니다. 기업의 본질이야 바뀔 수 없겠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수치와 성과보다 그들의 지향에 관심을 두어야겠습니다. 생색내기와 체질개선은 분명 다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기업'을 다룬 책 <착한 기업 이야기>와 <한국의 보노보들>을 추천합니다. 둘 다 한국의 사회적 기업 취재기라 할 수 있는데 '의미 있는 돈벌이'를 현실에서 실천,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의 의미 혹은 목적의 외연을 넓힌 본보기로 살펴볼 만합니다. 다국적 기업들의 브랜드 전략과 이면의 어두움을 드러내고 열린 소비자 네트워크를 제안하는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과 이미 여러 명의 노동자가 생명을 잃은 삼성반도체 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생활용품이 우리를 어떻게 병들게 하나>가 (물론 그분들이 읽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CEO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해주리라 굳게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마다 사장, 샐러리맨의 천국을 만들다>는 노동자들이 노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분들께 강권합니다. 생산성, 효율성이란 말을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 가둬두는 일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두 낱말 안에 자율과 창조를 불어넣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전해주는 책입니다.
[진짜배기 교양 쌓기 - 당신의 격조 높은 CEO 생활을 위해!]
드디어 마지막 주제 도서군요. 나름대로는 '실용적' 이유를 고려하여 선정했습니다. 우선 <인문 고전 강의>는 두 가지 수준으로 읽을 수 있는데 시간이 없고 폼은 잡고 싶은 분들은 이 책 한 권이면 어디가서 '가오' 잡기 좋습니다. 시간을 내 온고이지신을 실천하고자 고전 읽기를 시도해본 분이라면 이 책으로 체계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후 독서의 효율이 높아질 겁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원래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50명의 전기로 구성되었는데, 이 책에는 10명의 핵심 인물만 들어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이 책이 다이제스트란 말씀은 아닙니다. 10명 해서 744쪽입니다. CEO의 리더십, 공명심 충분히 이해합니다. 딱 요 정도를 기준으로 삼아주시면 역사는 발전하겠지요(아, 이런 표현 무책임한데, 그래도 이 정도 확신은 드려야 관심을 가지실 테니). <인간생태보고서>는 부제가 잘 설명하듯 인간에 대한 동물학적 관찰기입니다. <털없는 원숭이>의 최신판으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재미난 사례와 분석의 밑바탕에 깔린 저자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본능만 충족시키는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경우 우리가 거주하게 될 황량한 풍경을 그려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만이 자신의 본능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추천하는지 아시겠죠? <불가능은 없다>는 요즘 줄창 나오는 정주영 회장 광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루에 8시간 노동을 잠도 안 재우고 14시간, 16시간으로 연장해서 만들어낸 '불가능'은 원래 '불가능'인 거잖아요. '불가능'을 얘기하려면 최소한 투명인간, 텔레파시, 공간이동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왕회장님? 마지막 <르네상스 시대의 쇼핑>은 역사 도서인데 역사MD님의 카피가 기억납니다. '로마 시대에도 쇼퍼홀릭이 있었다.' 가격, 상품, 소비 등 근대적 쇼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를 잘 살펴본다면, 혹시 압니까. 지금도 써먹을 만한 생각씨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을지.
이거 해보겠다고 하고서 목록을 만든 지 1주일 만에 올리네요. 노벨상에 이그노벨상이 있고, 아카데미상에 골든라즈베리상이 있다면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에는 Sorry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의미를 발견한다면 당연히 의미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세를 불리고 힘을 모아볼 작정입니다. 그나저나 앞에 언급한 두 개의 상은 모두 노벨상과 아카데미상 보다 먼저 발표한다는데, 내년에는 분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