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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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이야기>는 장편의 이야기가 아니다. 책의 두께에 흠칫해서 서점에서 책을 들기 두려워하는 그대여, 클릭하기 망설이는 그대여,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변신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하나 하나의 단편을 재구성하여 오비디우스의 필체로 운율을 넣고, 이야기의 색과 움직임을 더욱 생생하게 부여해 놓은 책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변신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대성하고 있으면서 라틴문학의 걸작이다. 신화를 재미있게 접하는 지름길이 이 책을 읽는 것이다. 그뿐이랴. 그 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 안에서도 한 가지의 맥을 뚫는 주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변신’ 이다. ‘변신’이라는 코드로 신들의 역사와 영웅들의 역사와 인간들의 역사, 그 희로애락을 그려내는 작품. ‘변신’이라는 주제가 어쩌면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변신이야말로 인간사를 논하기에 인간의 감정을 논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시공을 초월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것도 그 증거가 아닐까.

변신. 얼핏 보기에는 그저 인간이나 신이 동식물, 무생물로 변했다고 해서 변신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산이라고 해 두자.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 않는가. 나 또한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또 다르다. 한순간 한순간을 놓고 보면 매번 다른 게 인간이다. 그렇다. 인간의 삶.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감정. 인간관계와 사회의 변화. 이 모든 것을 어우르는 자연. 이 책의 진미는 여기에 있다. 즉, 변신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 변신이라는 틀로 재구성하여 기존의 신화와는 또 다른 맛과 문학적 성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변신이야기의 진미 두 번째--바로 수려한 문체를 꼽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예술혼이 느껴지는 그 묘사와 문체는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사냥꾼인 악타이온은 정말 우연찮게 디아나의 알몸을 보았지만, 디아나의 분노로 사슴으로 변하여 자신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 이 간단하고도 잔인한 이야기가 뇌에서 그려지면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믿겠는가? 디아나가 옷을 벗고 목욕하는 -- 아름답고도, 성스러울 정도의 -- 모습이 그려지면서, 우연찮게 악타이온이 난입하게 되어 일어난 요정들의 아수라장. 디아나의 조용하고도 잔인한 분노. 강력하고도 조직적이며 각각의 개성을 지닌 그의 사냥개들. 그 사냥개들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인의 목에 사슴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는다. 세 장 분량의 책 내용을 읽었을 뿐인데, 마치 20분의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

아아, 아폴로의 아들이여.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파에톤아. 너의 아버지는 빛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너의 만용을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했다. 태양을 움직이는 마차는 인간이 조종할 수 없는, 신의 권한이거늘…. 아폴로는 가파른 길과 하늘의 빠른 축. 그리고 사나운 동물들과 말의 사나움을, 그리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끼기 때문에 자신의 염려를 알아차리라고 몇 번을 말하였던가. 너의 객기로 시작한 일을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후회하는구나. 말도 제대로 못 다루고, 길의 험난함과 동물의 위협을 이기지 못하여 너는 하늘과 땅, 바다에 괴로움을 주는구나. 신들의 울부짖음으로 윱피테르는 벼락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너의 죽음이 아폴로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겠느냐. 나는 아폴로의 슬픔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구나.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폴로의 마차를 타려는 파에톤처럼 얼마나 객기를 부려왔을까.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려는 것. 나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부려왔던 만용이 어쩌면 아폴로의 마차를 타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다 보면 느낄 것이다. 정신 없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장중한 세계가. 나를 그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 긴장감과 흥분. 김용택이 엮은 시집『시가 내게로 왔다』의 서문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퓌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결혼이 가슴에 오래 숨쉬고 있음에 나는 놀랐고, 마르스와 베누스, 쿠피도의 이야기는 나를 숨가쁘게 했다. 그 외의 여러 이야기들이 징그럽도록 나를 휘감는다.

이 책 속으로의 여행을 위한 두 가지 팁.
1. 책에도 나와 있고 주석 설명 또한 충분히 되어 있지만, 이 작품의 원전은 라틴어로 쓰여져 있다. 그래서 번역에도 우리가 익숙한 그리스식 영어식 이름이 아니라 라틴어 표기를 따른다. 처음에는 ‘뭐야, 이거 헷갈리잖아!’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단지 그 이유로 책을 펼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될 듯. 단지 그 이유만으로 오비디우스의 수려한 문체와 운율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깝지 아니한가? 수많은 등장인물의 이름은 자연스레 익숙해질 것이고 외워지지 않거나 생각나지 않는 이름은 그대로 두면 된다. 사실 이름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2. 하루 안에 독파하자! 라는 생각은 버리자.
물론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숨 쉴 틈 없이, 단편 하나하나가 당신을 그 장면으로 인도할 것이다. 차(茶)와 함께, 와인과 함께 음미하면서 이 책을 즐기다 보면, 얼마 읽지 않았는데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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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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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여, 너는 학대하고 있구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짧고, 네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 하거늘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2장 6절)

: 그래. 나는 항상 나의 친구들. 주변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눈높이에서 나의 행복을 찾으려 했지. 그 과정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모른 체하고, 너무 비하하며 지냈지. 나를 존중하라! 그래. 이제부터 나를 먼저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자.




「이제 더 이상 헤매지 마라. 너는 네 작은 비망록도, 고대 로마인들과 헬라스인들의 행적도, 노후를 위하여 제쳐놓은 그들의 저술의 발췌본들도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목표를 향하여 서둘러라. 그리고 헛된 희망을 버리고, 네 자신이 염려된다면 아직도 그럴 수 있을 때 네 자신을 돕도록 하라.」(3장 14절)

: 시간이 없지. 이 세기를 살아오면서 더욱 그렇게 느끼고 있지. 그러나 21세기여서가 아니다. 그건 핑계다. 바로 산다는 것이 괴로우니까 타협하려고 그렇게 중얼대는 것이다. 2000년 전의 황제도 그것을 느꼈구나. 황제는 2000년 후에 살고 있는 나에게 말하는구나. 목표를 향하여 서둘러라.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망상을 버리도록.




「어떤 행동도 아무 계획 없이, 또는 기술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원리에 따르지 않는 방법으로는 행하지 마라.」(4장 2절)

: 계획이 없는 삶. 원리 원칙에 따르지 않는 삶. 여태까지의 내 삶이다. 당시에는 내가 원하던 방법대로 하면 후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후회를 했었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원리에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다.




「내면을 보라. 어떤 사물이든 그 특질과 가치를 간과하지 마라.」(6장 3절)

: 첫인상. 외면으로부터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일침이다. 물론 나도 외면만으로 판단하여 오해한 적은 없는지 다시 한번 반성 중이다. 외면이 주는 즐거움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깊은 즐거움은 되지 못한다.




「미래의 일로 불안해하지 말라. 그리로 가야 한다면, 네가 지금 현재의 일에 쓰고 있는 바로 그 이성으로 무장하고 그리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장 8절)

: 그렇지. 내가 왜 불안해했을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성도 현재에서 미래로 달리고 있는데,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왜 그랬을까? 정신의 나약함 때문이다. 정신의 힘을 더 키워야 한다.




「인간들은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니 가르치거나 아니면 참아라.」(8장 59절)

: 누가 뭐래도 내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 유아독존으로 살아간다는 것. 좋은 뜻이지.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때 더 아름답다는 것을 위한 전제조건은 아닐까.




「이제 더 이상 선한 사람은 어떠어떠해야 하는지 토론하지 말고, 그런 사람이 되라.」(10장 16절)

: 맞는 말이다. 우리는 몰라서 좋은 사람이 못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을 위해 어떤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고, 또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것까지 알고 있다. 그렇게 머리로는 말로는 뭐든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머릿속으로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도 실천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차이가 너무 깊어지면 절망스러운 법이니까. 내가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 어떠어떠하고 있는지 말하는 것이 더 좋은 모습이 아닌가?




「지배적 이성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기에 하는 말이다. 나머지는 네 뜻에 달려 있든 없든 모두 유골이며 연기다.」12장 33절

: 이성. 이것이야 말로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증거이지. 데카르트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Cogito, ergo sum!’ 그래. 내 이성을 바로 잡고 행동하는 것이 진실이며, 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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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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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 단편집으로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접해봤다.

 

짧은 생을 영화처럼 살다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단편마다 빛나고 있었고, 우리가 전설이나 성경에서 접해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감각적인 작품도 있었다. 이 단편집은 일본문학에 관심이 있는 내가 아직도 이 작가의 소설을 안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 잠깐 회의를 느끼게 해 줄 정도로 뛰어났다.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의 중고등학생 국어교과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작품이라고 알고있다. 사람들을 불신하는 왕에게 ‘믿음’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이야기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메로스는 친구를 보증인으로 두고 3일간의 기간을 받아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겠다고 간청한다. 사람들의 불신을 널리 알릴 기회라고 생각한 왕은 이 제안을 허락한다. 주인공 메로스는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여동생을 시집보내러 간 것이다. 일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지만, 소용돌이치는 불신의 강을 건너 죽기위해 달린다. 마침내 돌아온 메로스는 왕에게 자신을 처형하라고 말한다. 왕은 감동하여 친구와 메로스를 풀어주었다. 원래의 이야기에 다자이 오사무만의 색을 입혀서 새로운 느낌으로 이야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후지산 백경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중 하나이다. 나는 일본여행을 하면서 후지산을 시부야의 선샤인 시티 전망대에서 먼발치에서 봤던 적이 있다. 일본인이 산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산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후지산에 대하여 많은 애증을 표현한다. 어쩔 때는 저속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다 바라보게 되는 후지산의 모습에 반하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처음에 일본여행 갔을 때는 ‘아, 후지산이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다시 일본에 가게 되면 나도 다자이 오사무가 표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기대를 하게 될 정도이다. 

 

굴곡 많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는 아직 인생의 쓴 맛을 보지 못한 갓 스무살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일단 처음에 봤을 때는 다자이 오사무는 세상을 싫어하는 것 같았고,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한탄을 늘어놓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왜 세상을 이다지 부정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

작가의 단편 소설들을 보면 작가가 꿈 꿔왔던, 작가가 생각해온 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단편 소설의 아름다움을 창작해 낸 계기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서, 자전적 이야기가 이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해준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껴온 고통을 승화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냈으니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마저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가끔씩 이야기가 그리워 져서 다시 이 책을 잡게 만드는 소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이게 매력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단편집은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게 한 소설이었고, 그래서 내게는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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