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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걸작선 - <오이디푸스 왕> 외 3대 비극작가 대표선집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2월
평점 :
저주(詛呪). 이것은 오이디푸스家, 그리고 우리 자매에게 불어닥친 갖은 불행을 표현하는데 딱히 맞는 말이 없어 새롭게 맞춤된 단어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제침으로써 불행을 자초했다. 그런 아버지를 한사코 만류하던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스스로 눈을 찔러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스스로 볼 수 없게 된 아버지에게는 이전에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사람들-아버지의 나라의 백성들이었던 그들-은 아버지에게 닥쳐온 이 불행 덕분에, 조국에 닥쳐온 새로운 위기에서 벗어날 어떤 힘을 아버지가 가졌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된 불행일 수도 있다. 그렇게 불행은 또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어, 싹틔우고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어 또 다른 씨앗을 퍼트리고 있었으니, 이 몹쓸 유기적인 운명이여!
우리 자매보다는 나이가 많고, 해서 아버지는 두 오빠는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업으로 인해 평생을 놀림감이 되어 살다가 시집도 제대로 못갈 수도 있다며, 두 딸의 장래를 걱정하며 외삼촌에게 아비 노릇을 부탁하면서 길을 떠났다.
밭도랑을 베개 하고 죽을 놈! 이 속담 또한 그런 불운한 아버지의 남은 삶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속담일 수도 있다. 제집에서 고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괴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죽어라, 흔히 남을 저주하는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업자득인 불행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렸다.(이상 <오이디푸스 왕>)
그렇게 눈먼 아버지가 세상을 떠도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언니는 아버지를 따라 길잡이가 되고 먹을거리를 동냥하기도 하면서 함께 세상을 떠돌았다. 동생인 나는 오빠들이 있고 외삼촌이 왕의 자리를 대신하는 도시에 머물며 추이를 살피, 틈을 내어 짧은 기간이나마 아버지와 언니와 동행하며 고통을 함께 하기도 했다. 모진 운명은 두 오빠들에게도 비껴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초한 불행이었음에도 방황하는 당신을 나 몰라라 하는 두 아들, 곧 오빠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하루하루의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다고 느낄 때는 그것이 마치 그들 때문에 비롯된 일인 양 증오하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마땅히 수고를 해야 할 그 녀석들은 계집애들처럼/ 집 안에서 집이나 지키고 있고, 그 녀석들 대신/ 너희 둘이서 이 불운한 아버지의 짐을 지고 있구나"(<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342~344행)
그랬다.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특히, 언니는 소녀가장이었고, 효녀 심청을 떠올리게 했다. 바람(願望)이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못하면 실망한다. 마침내는 미워하게 된다. 원망(願望)이 채워지지 못하면 원망(怨望)이 되는 것. 아버지는 오빠들에게 일종의 원망(怨望)을 가지고 있었다. 헤어진 이후에 닥쳐올 이별의 슬픔 때문에 사랑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처럼 바라는 것이 있으면 실망도 하게 된다. 또한 어쩌면 그것은,
"줄곧 고달픈 방랑길에서 이 늙은이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며 때로는 먹지도 못한 채/ 맨발로 험한 숲속을 헤매기도 했고, 때로는/ 억수 같은 비와 타는 듯한 햇볕에 심한 고생을/ 하기도 했지. 그런데도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다면/ 집 안의 안락함 따위는 대수롭게 않게 여."(<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347~352행)
기는 언니와 나, 특히 큰 딸인 언니가 고맙고 미안해서 건네는 아버지 나름의 애정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믿고만 싶었다. 그런데 집에 남은 두 오빠들은 사악한 경쟁심에 사로잡혀 왕권을 장악하려고 다투고, 나중에 태어난 둘째 오빠가 왕위를 빼앗고 첫째 오빠를 조국에서 추방하는 일이 벌어져 가문의 오랜 저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나는 이 소식을 길 위에서 방랑하는 아버지와 언니에게 전해야 했다.
염치도 없이 큰오빠는 자신이 왕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길위의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를 찾아오고, 아버지는 "오히려 너는 친족의 손에 죽고, 너를 내쫓는 자를 죽이게 될 것"이라며 노여움을 드러내고 저주의 말을 퍼붓었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길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이를 적극 만류하거나 보살피려 들지 않았던 두 아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딸들이 아들들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마당에 당연히 왕권은 장남인 자기 몫이었다고 하는 큰 오빠의 말을 귀에 들어올리 없다. 차남이 장남을 그것의 차지했다고 하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릴 수가 없다. 결국 큰오빠는,
"여기 계신 아버지의 저주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너희들이 혹시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나를 모욕할 것이 아니라 나를 묻어주고 장례를 치러."
달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들 곁을 떠나가지요. 이 말이 또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고 그 말이 유언이 될 줄이야. (이상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결국 두 오빠들은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 끝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런데 조국을 위해 싸웠던 둘째 오빠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으나 반기를 들었던 "조국의 배신자"인 큰오빠는 매장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매장을 시도하는 자에게는 사형으로 다스리겠다는 외삼촌이자 왕인 크레온의 명령 내려져 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우린 모두 가족인데,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애도할 수 있는 권리마저 앗길 수 있다는 것이. 친족의 슬픔도 달래지 못하면서 이웃과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언니는 결코 국법을 따를 것 같지 않다. 법을 무시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에 맞서다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도 비참하게 죽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도. 해서 저는 언니에게 호소하는 거예요!
"우린 명심해야 해요. 첫째, 우리는 여자들이며,/ 남자들과 싸우도록 태어나지 않았어요./ 다음, 우리는 더 강한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만큼/이번 일은 물론이고 더 괴로운 일이라도 복종해야.."-<안티고네> 61행~64행.
한다고. 언니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지요. 어쩌면 제가 여자이니까, 계집 어쩌고 하는 그런 타령이나 하느냐고 몰아부치고 싶었을 거예요. 물론 저도 그분은 내가 원치 않더라도 나의 오라버니이고, 그분의 시신이 새떼의 반가운 먹이가 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때로는 차갑게 사태를 바라봐야 할 때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분이 친오빠라고 해도.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인 언니마저 잃을 수는 없어요. 제가 그렇게 잘못 되었나요? 저도 도시의 뜻을 거역할 힘이 없는 저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어요.
비로소 우리의 아버지와 두 오빠와 언니를 낳은 어머니(이오카스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이런 말을 하는 제 자신이 그리고 우리 집안 얘기가 부끄럽고, 어쩌면 그 저주의 씨앗을 깡끄리 앗기는 것이 저주를 끝내는 길이라고 생각할 때 있어요). 모르고서 한 일이다. 그러므로 뭔가를 저지렀다고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서 평범한 행복을 찾자! 어머니는 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요. 아버지가 저지른 죄는 그것이 모르고서 한 일이므로 씻김을 받을 여지가 없지 않았지요. 그리고 테바이의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그 일에 대해 그토록 냉혹하게 죄를 묻지는 않았어요. 아버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고 그 순간 우리 집안은 더 이상 평범한 가정의 행복이란 꿈속에서조차 꿈꿀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이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언니(안티고네)는 천상 그 아버지의 그 딸인가 봐요. 형제끼리 맞서 싸우는 것만은 피해 달라, 언니와 내가 그렇게 매달렸건만 큰오빠는 끝내 군대를 거두지 않았고 전사하고 말았지요. 그것도 동생으로부터. 큰오빠도 어쩔수없는 그 아버지의 아들인가봐요. 또한 작은 오빠도 큰 오빠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요. 사람은 강인하면서도 나약한 존재라, 사노라면 때론 넘을 수 없는 벽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제가 그리도 잘못되었나요? 한편 두렵고 한편 야속하지만 외삼촌(크레온)이 언니에게 하는 말을 공감할 지경이예요,
"...지나치게 완고한 마음이
가장 쉬이 꺾인다는 것을, 불에 지나치게 달군
가장 단단한 쇠가 가장 쉬이 부러지거나
부서지는 것을 너는 보지 못하였느냐"(<안티고네> 473~476행)
아주 틀린 말은 아니예요. 맞설 힘이 없는 제가 천상 여자일 수밖에 없어서 그럴까요. 그러나 외삼촌(크레온) 또한 쉽게 자기 주장과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여자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해요. 여자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자, 라고 하는 제 말이나 여자(계집)한테 굴복할 수 없다고 하는 외삼촌이나 어쩌면 보통사람들인 모양이예요.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스스로와 우리 가정에 내재된 저주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탐하는 것 아니냐며 외삼촌을 거칠게 몰아부쳤어요. 그래요 당시로서는 그것은 오해였어요. 그때 외삼촌은,
"..동등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도, 두려움 없이 발 뻗고 자기보다는/ 두려움 속에서 통치하기를 더 바랄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튼 나는 통치자로 행세하기보다는 통치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생각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오이디푸스 왕>, 584~589행)
라고 말씀하셨지요. 테바이의 시민들은 당시의 외삼촌을 참 합리적이었다고 기억해요. 그리고 우리 가족들도 인정해요. 그리고 왕권을 쥘 생각이 추호도 없다면서,
"아직은 이익이 되는 명예 대신 다른 명예를/ 바랄 만큼 나는 마음이 눈멀지 않았어요."(594~595행)
라고 고백했지요. 어부지리라고 해야 할까, 우리 가족에 닥친 불행 덕분에(?) 왕좌에 오른 삼촌은 지금,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에 꼭 맞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요. 그때 '아직은' 이라고 했던 그 뜻이 이런 것이었나요? 이익이 되는 명예, 그 이상의 명예라는 것이 누이의 아들의 장례마저 못 치르게 하고, 친족의 도리를 하는 다른 조카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그렇게까지 해서 찾아지는 그런 명예였나요? 당신이 당신의 자식과, 당신의 아내이자 그 자식의 어미인 여인마저 잃으면서까지 찾고자 한 명예는 무엇인가요? 언니를 사랑하고, 그러므로 언니의 목숨을 살려보려고 언니의 약혼자인 하이몬은 국왕인 아버지, 당신에게 말해요.
"...겨울철 급류가에서 굽힐 줄 아는 나무들은/ 그 가지들을 온전히 보전하지만,/ 방황하는 나무들은 뿌리째 넘어지고 말지요./ 마찬가지로 돛의 아딧줄을 당기기만 하고/ 늦춰주지 않는 사람은 배와 함께 넘어져/ 융골을 타고 항해를 계속하게 될 거예요."(<안티고네> 712~717행)
제발 이쯤에서 멈춰 달라고, 당신의 아들은 당신(크레온)이 제 언니(안티고네)에게 했던 당부를, 비유만 달리하여 들려주고 있잖아요. 한 발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지를 못한다고 해놓고, 정작 자신은 그래야 할 때에 그러지 못하는.. 해서 중('스님'들에게는 죄송)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이 아직도 설득력이 있나봐요.
--------- 여기까지, 나머지는 직접 읽으면서 상상하세요. 이스메네의 독백 형식으로, 이 집안에 닥친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보았는데, 소포클레스의 비극 중에서도 오이디푸스 가에 관련된 세 편의 비극을 읽는데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분도 리뷰에서 말씀하셨고,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발표시기)로 살피면 <안티고네>가 전기, <오이디푸스 왕>이 중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말기 특히, 소포클레스가 죽음을 앞둔 노년에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발생과 진행을 시간별로 정리하면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안티고네>입니.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자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대사도 없이 그냥 말미에 등장하여,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가 마지막으로 두 딸과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며 한탄하는 장면에 잠시 등장할 뿐이지요. 또한 <안테고네>에 오이디푸스 왕은 등장하지 않고요. 이 세 편의 비극이 전설과 신화에 기반하여 창작된 비극이지만, 반드시 세 편의 이야기 모두가 전설과 신화 그대로의 원전을 따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다른 이의 비극이나 다른 저작에서 이스메네의 큰 오빠의 장례가 무리없이 치러기지고 하니까), 참 흥미롭지요.
닥쳐올 미래를 예견하는 말은 곧 예언이 되고, 말이라는 형식으로 발화된 그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지며 그것이 불행한 사태일 때 그것은 곧 저주의 실행인데, 앞서 이미 발표된 작품에서 실행될 저주를 뒤에 발표하는 작품에서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어쩌면 구상 단계에서는 순행하는 시간을 따라 각본을 맞춘 것인데, 가장 극적이라고 생각하는 대목부터 무대에 올리지 않았나 질문하게 됩니다. 비록 7편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아쉽지만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서 소개한 세 편을 전후맥락을 이해하고 감상하신다면 꽃중의 꽃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