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다산과 연암이라는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로 18세기 지성사를 새롭게 그려낸다. 두 사람의 사상적 지형뿐 아니라 최근 저자가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의역학의 관점에서 다산과 연암의 기질적 특성까지 한데 아우르며 이야기를 펼쳐내는 터라, 기존의 사상사와는 다른 새로운 그림이 펼쳐질 거라 기대해본다. 고미숙이 왜 이 둘을 함께 묶었는지, 어떤 의문을 품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려 했는지를 저자 서문을 통해 살짝 엿보기로 하자. 참고로 이 책은 6월 14일 금요일에 출간되고, 예약판매 기간에 구매한 독자에게는 다산과 연암 머그컵 세트를 드린다.

 

 

예약판매 이벤트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30523_two

 

 

 

 

입구 : 그들을 둘러싼 세 개의 ‘미스터리’

 

하나,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몇 번을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이다. 그들은 왜 한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았는데 말이다. 당파 혹은 학맥이 달랐기 때문일까? “형적이 드러남을 꺼려서 서로 소문은 들으면서도 알고 지내지 못하며, 신분상의 위엄에 구애되어 서로 교류를 하면서도 감히 벗으로 사귀지는 못”하는 그런 관계였던 걸까? 하지만 둘은 그런 장벽 따위를 훌쩍 뛰어넘은 대문호 아닌가. 게다가 박제가・정석치・이서구 등 둘의 절친한 벗들이 겹친다. 그럼 이 사람들이 양다리 혹은 들러리에 불과했단 말인가? 무엇보다 둘의 ‘사이’엔 정조대왕이 있었다. 정조가 누구던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고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부를 정도로 지적 자신감이 충만했던 ‘호학군주’ 아닌가. 사대부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고, 사대부들보다 더 많은 글을 썼던 제왕. 그래서 ‘문체반정’이라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필화사건’을 주도한, 다시 말해 문체와 권력의 긴밀한 맥락을 간파했던 인물이다. 그때 연암은 문풍을 타락시킨 배후조종자로 찍혔고, 다산은 정조의 이념적 나팔수였다. 이 정도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감을 충분히 느꼈을 텐데…… 몰랐을 리는 없다. 절대로! 그럼에도 그들은 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사대문 안 종로통을 수없이 오갔을 그들의 발걸음은 왜 번번히 엇갈렸을까? 대체 왜?

 

 

 

 

 

 

둘, ‘노 코멘트’에 담긴 뜻은?
무척 궁금하긴 하나, 저 질문은 그다지 심오한 편은 아니다. 일단 전제에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친밀할 거라는, 그래서 깊은 교류를 주고 받았을 거라는, 아니 그랬으면 참 좋겠다는 우리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동시대의 톱스타들은 서로 친할 거라고 간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정서적 거품’이 개재된 것이다.
  거품을 빼고 둘의 동선을 체크해 보자. 연암과 다산의 나이차는 25세.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연암이 한창 청년기의 방황을 겪고 있을 때, 다산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였다. 연암이 거리에서 벗들과 어울려 중년을 통과하고 있을 때, 다산은 과거의 문턱을 넘기 위해 분투하는 수험생에 불과했다. 연암의 명성과 의론이 장안을 뒤흔들고 있을 때, 다산은 성균관 태학생으로 정조대왕이 제출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니 당연히 엇갈렸을 수밖에. 하지만 이 또한 성급한 판단이다.
  이 시대는 세대간 장벽이 그닥 높지 않았을뿐더러 학술과 문장을 통한 상호교류가 왕성했던 시절이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에다 한참 어린 나이에도 연암을 찾아가 ‘사우관계’를 맺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다산은 왜 연암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꼭 제자가 되진 않더라도 당대 최고의 문호인데 한 번쯤 찾아가 내공을 가늠해 보고 싶지 않았을까……, 당파와 학맥이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 법한데 말이다(원래 반대편 진영에 있는 대가에게 더 호기심을 느끼는 법 아닌가).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서로 엇갈리던 둘의 동선이 마침내 교차하는 시점이 온다. 연암이 쉰이 다 되어 늦깎이로 ‘생계형 관직’에 나섰을 때, 그때 다산은 ‘왕의 남자’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이때 둘의 궤적은 사뭇 중첩된다. 문체반정과 수원 화성 축조, 천주교 사태 등 정조의 치세를 장식하는 주요 사건들에 둘은 직・간접으로 연루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더 놀랍게도 서로에 대해 ‘노 코멘트’ 했다. 연암의 글 속에 다산의 흔적은 없다. 다산의 글 속엔? 아주 없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어 20여 가지의 환술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 이치를 안다면 지사의 말이 망령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참 까칠하다. 연암을 마치 동시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에도 더러 『열하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연암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데다, 인용한 부분도 하나같이 수레와 벽돌 등 기술지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다산의 ‘박람강기(博覽强記)’라면 『열하일기』는 물론이고 『연암집』 전체를 통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생략되었다. 특히 연암의 기발한 상상력과 호방한 문체에 대해서는 완전 노 코멘트!
  연암은 다산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다산은 연암에 대해 ‘차갑게’ 언급했다. 이 침묵과 냉대의 저변에 흐르는 기류는 대체 무엇일까?

 

 

 

 

셋, 이렇게 ‘다를’ 수가!
여기서 잠깐 되짚어 보자. 이 냉랭한 기류가 미스터리가 되려면 어떤 전제, 아주 강력한 전제가 필요하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둘은 만나야 하고, 서로 지적 교감을 해야 한다는, 혹은 그랬을 거라는! 왜? 연암과 다산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문장가요 경세가니까. 유사 이래 연암보다 더 탁월한 문장은 없었다. “그의 문장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김윤식)하다. 한편, 다산은 방대하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정인보)다. 한 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양적으로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이런 대단한 인물들을 동시에 배출했다니, 18세기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눈부시다. 그러니 둘을 연결하고 싶은 욕망이야 지극히 당연하다.
  알다시피, 18세기에는 연암과 다산 이외에도 수많은 별들이 각축했다. 홍대용과 박제가, 이덕무와 이가환, 이옥과 김려 등등. 그런데 연암과 다산은 물론이고 이들까지도 몽땅 동질화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실학파’라는 범주가 그것이다. 실학이란 조선후기에 일어난 지성사의 새로운 조류를 지칭하는 담론이다. 이 개념의 등장과 더불어 연암과 다산은 그 자장 안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 담론적 배치는 대략 이렇다.
  조선후기 실학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으로부터 비롯한다. 성호는 중농학파, 그 뒤를 잇는 연암그룹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설파한 중상학파, 그리고 다산은 이 양대 흐름을 집결한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라는 게 기존의 통설이다. 연대기적으로야, 성호-연암-다산으로 이어지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시간적 선후가 논리적 선후를 결정짓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담론의 배치에 담긴 건 두 가지 욕망이다. 하나는 역사를 연속적 선분으로 잇고자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역사는 더 나은(혹은 더 많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 연속성과 진화론!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한 표상이기도 하다. 다산학의 방대한 스케일은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기에 딱! 알맞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겐 늘 연암과 다산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있다. 욕망이 표상을 낳고 표상은 다시 욕망을 키워 가는 과정을 충실히 반복한 셈이다.
  하지만 보라! 둘의 초상화를. 둘은 참 다르다. 한 사람은 거구에 비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작고 단단하다. 내뿜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신체적 차이만큼이나 둘의 인생궤적 또한 판이하다. 당파나 이념의 차이는 차라리 부수적이다.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등의 차이는 마치 평행선처럼 팽팽하다.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 이 질문은 ‘그들은 왜 만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보다 훨씬 심오하다. 후자는 그들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전제하지만, 전자는 그들의 차이와 이질성에 주목한다. 이 질문은 두 가지 효과를 불러온다. 하나는 경이로움이다. 동일한 연대기 안에 이렇게 상이한 기질과 벡터를 지닌 천재가 공존했다니, 진정 놀랍지 않은가. 조선왕조는 물론이고 전 세계 지성사 그 어디에서도 이런 팽팽한 맞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권위로부터의 해방이다. 연암과 다산이 하나의 이미지로 오버랩되면 무지하게 엄숙해진다. 엄숙주의는 권위를 낳고 권위는 차이를 봉합한다. 거기에서 우상이 탄생한다. 그런 식의 우상화는 연암과 다산, 모두를 박제화시켜 버린다. 고로, 가차없이! 타파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연암과 다산의 생애를 하나의 평면에서 동시적으로 조망해야 하는 이유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연암과 다산은 따로 논의되었다. 그렇게 연결하려 애쓰면서도 왜 늘 따로(!) 이야기한 것일까. 혹시 둘이 지닌 불연속성과 이질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아가 그걸 감당, 아니 직면하기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모든 질문들이 그렇듯이, 연암과 다산이라는 화두는 결국 우리 자신의 발밑을 겨눈다. 즉, 이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꼼짝없이 가두고 있는 인식의 봉인 — 특히 차이의 봉합과 전통의 우상화에 대한 — 을 해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솔직히 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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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맛우유 2013-07-17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구입했는데 기대되네요... ^^

푸른희망 2013-07-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고미숙님 책은 다 사서 보고 싶어요.. 제대로 읽지도 못하면서 사 놓으면 너무 뿌듯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