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그 후에도 그가 사후에 누리는 고가의 그림값과 정당한 예술적 평가와 존경에 접할 때마다 그 소리가 나왔다. 
                                                                                                         -『우리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중 

박수근이다. 박완서가 『나목』이 여성월간지 소설 모집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된 것도 결국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만난 가난한 화가 박수근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수룩하게 덩치만 큰 화가는 미군들이나 그들의 연인과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단돈 4달러를 받아 생활했다. 그의 <빨래터>가 최근 사십오억 이천만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은 그래서 감탄과 더불어 비감어린 씁쓸함을 꼬리처럼 달게 된다. 그가 생전 반도호텔 화랑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그림 팔렸어요?"를 외쳐댔던 것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호텔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한 구실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얘기를 고등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고 대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 순간 박수근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예술가의 신산한 삶 전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참 먹먹했었다. 그 후로 나는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애잔한 슬픔을 느낀다. 죽고 나서 수많은 위작 논란에 시달릴 만큼 또 미술품 경매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는 뉴스의 중심에 설 만큼 경외받고 있는 그의 현재가 과연 그의 소외당한 삶 전체를 위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니 나도 박완서의 '제기랄'에 동조할 수밖에.  

 박수근 <빨래터>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많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우리가 써버린 돈을 다시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전혀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중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언제나 그것을 완전하게 화폭에 담아내기를 소망했던 사내. 결국 그 별로 직접 가 닿고 싶었던 그. 삶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끝까지 사랑하고 죽음까지 내맡겼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이 편지의 바로 이 대목.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테오는 시대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필요없다고 오기어린 대거리를 내던지듯 답장한다. 반 고흐는 미술계에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자리잡은 화가다. 우리는 반 고흐를 모르거나 그의 그림을 부정하는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에게 반 고흐는 예술에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불편한 강박마저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생전에는 경제적 고충에 너무 치여 물감과 종이마저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비참한 나날들을 보냈음은 주지하지 않는다. 그를 온전히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생계까지 해결해 주었던 테오마저 그의 사후의 명성과 보상을 누리지 못하고 형을 따라 몇 개월 안 되어 죽어버린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그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그를 탄핵한 글과 재판기록만으로 자신을 평가할 것을 우려한 대목은 다산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이 가지는 미래적 의미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생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자찬묘지명 중 

 

 

 

 

 

 

 

 

 

하늘이 내린 재능을 반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그들의 예술적 학문적 성과의 탑은 드디어 우리를 굽어 내려다볼만치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탑을 삶의 고충들과 악전고투하여 만들어 낸 당사자들은 비참하게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이제서야 환호작약하는 우리들. 화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다음 세대에게 말을 건넨다는 고흐의 자기암시적인 얘기도 언제나 한 발 늦는 우리의 심미안의 그 허술함을 감싸주지는 못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을 살게 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붓을 잡을 수 있게 한다면. 이제 우리는 온 몸으로 지지해 주고 온 맘으로 후원해 줄 수 있을 터인데.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오고 후회는 언제나 절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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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타까운 일이죠. 시대가 이해해주지 않았던 이들이 어찌 고흐와 다산 뿐이겠습니까마는...
40세의 박완서를 등단시킨 '나목'을 읽는 내내 박수근 화백이 가슴 아팠지요.

blanca 2010-02-08 22:31   좋아요 0 | URL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순오기님 말씀처럼 사후에야 겨우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현재진행형일거구요. 그런데 유독 저 세 사람은 더 짠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일 것 같아요^^;;

잘잘라 2010-02-0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얘긴지는 몰라도..
제가 김추자 노래를 들으면서 늘 하는 말,
"와우~ 정말 대단하다. 그 시대에 어떻게 저런 노래를!!!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흠.. 그런데먈야. 난 이런 생각이 들어. 만약에,
김추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김추자는 그냥 가수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어."
님의 글을 읽으니 또 김추자 노래를 듣고싶네요.

blanca 2010-02-09 13:59   좋아요 0 | URL
바닷가식당님 안녕하세요. 배경의 꽃과 예쁜 소녀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맞아요. 어쩌면 다 그 시대에 태어나 그런 노래를 부르고 그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쓴게 나름대로 운명이고 또 결핍들이 그것들에 녹아 더 좋은 것들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추자는 그 멋진 춤솜씨만 기억하고 노래는 안들어봐서 아쉽네요. 기회가 되면 들어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보다 정약용은 더 행복한 남자였죠.정조 집권기 때는 젊은 관리로서 위세도 꽤나 부렸지 않습니까?

blanca 2010-02-10 23:01   좋아요 0 | URL
예.그건 그런 것 같아요. 고흐는 단 한 번도 전성기라는 걸 가져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18년 간의 유배 생활, 산 자식보다 죽은 자식이 더 많았던 것. 정약용도 말년이 참 비참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라...(이렇게 얘기하면 꼭 친밀한 지인처럼 들리지만^^;;) 좀 편향됐던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요일 오후 두시 대형서점 풍경. 수많은 책표지에 떨어지는 그 수많은 무심한 시선들. 그 시선들은 약간의 설레임과
아주 약간의 책 그자체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또  익명의 옆사람들에 대한 무해한 호기심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메뚜기처럼 서가 사이를 요령좋게 뜀박질하는 아이와 책 표지를 동시에 챙기느라 분주해서 그 대열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많은 책들. 그래서 되레 개별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 수 없고 그저 반지르르한 표지만으로 자신을 호소해야만 하는 그 가벼운 한계. 그 속에서 나를 이끌던 이 책. 프랑수와즈 사강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슬픔이여 안녕''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나서 적잖이 실망했었다. 줄거리 대신 가벼운 그 솜사탕 같은 느낌만 남았고 나는 사강을 그 시대의 패리스 힐튼 정도로 기억하게 되었다. 파티걸. 과대평가된 미모의 작가. 그러니까 문단계에도 항상 젊고 도발적이고 사랑스러운 요정을 필요로 하니까. 열아홉살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스피드,마약, 도박에 중독되어 수많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전부였다. <중략> 문학은 모든 것이었다. 최선의 것, 최악의 것, 운명적인 것이었다. 일단 그것을 알고 나면 해야 할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p.204 

이런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그녀가 도박에, 스피드에, 그리고 운명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자신을 변호하는 책은 아니다. 그녀는 변호하지 않는다. 합리화하지 않는다. 도박과 스피드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악덕과 무모한 광기의 대명사가 아니라 섬세한 사려깊음과 미덕과 용기로의 이끌림을 포함한다는 얘기가 그녀의 매력과 맞물릴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아주 위험한 동조를 자아낸다. 기약 없는 사랑과 의미 없는 무분별에 도착되어 있는 그녀의 얘기는 빌리 홀리데이, 테네시 윌리엄스, 오손 웰스, 장 폴 사르트르에게 가 닿는다. 특별하고 의미있는 추억들은 그녀만의 청량하고 달콤한 문장들에 둘러싸여 하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아름다운 오마주가 된다. 특히나 정확히 삼십년 전 같은 날에 태어난 사르트르가 죽기 일 년 전 그녀와 가진 아름다운 추억은 너무 아름다워 기억의 갈피짬에 꼭 끼워두고 싶어진다. 

사르트르는 이미 그녀와 재회했을 때 실명 상태였다. 이 사려깊은 맹인과 이 아름답고 도발적인 젊은 작가가 열흘마다 저녁 시간을 함께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사강이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를 여섯 시간에 걸쳐 녹음하여 건네 주었다는 얘기. 사르트르는 그 녹음 테잎을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별. 영원한 이별. 둘이 만났을 때 그 둘을 제외한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는 그들의 그 충만한 시간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기억의 창고를 제외하고는. 

때때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답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벼락 맞은 남자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나는 1935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이 지구에서 그 없이 삼십 년을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p.192  

 

독서에 대한 얘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프랑스인들이 밟는 고전적인 독서의 경로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카뮈의 '이방인', 랭보의 시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며 그 지점마다의 그녀의 깨달음과 추억들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흔히 저지르는 오류인 연애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미화된 영상에 대한 집착이 아닌 상대방의 진정한 본성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야 함을 책과 독자의 관계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책에 경도되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흠뻑 빠지게 되니까. 그래서 특히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책에 그 사람에 경도되어 있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그 행위에 중독되기 마련이니까.  

사춘기 소녀가 무신론자의 그 아슬아슬한 공포 속에서 기우뚱대다 기댄 어깨는 카뮈였다고 한다. 솔직히 카뮈가 대머리였다면 그렇게 '반항인'에 깊이 경도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대목은 무척 귀엽다. 산비탈 위 하얀 설원 위에 앉아 카뮈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 안에 편하게 기대는 그녀의 모습은 영롱하다. 누구나 독서에 얽힌 특히나 유년이나 사춘기 시절에는 더더욱 소중한 추억들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그녀의 추억은 더 강렬하고 더 의미있는 표지자 같다.  

나는 사강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파티걸이 아닌 문학 그 자체를 아주 진지하고 사려깊에 받아들이는 예술가로서 기억하게 되었다. 다시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열아홉살 그녀가 하고 싶었던 그 얘기가 사실은 그 시대의 달콤한 꿈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연을 가지고. 

나는 지나치게 나 자신으로서 강렬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누군가가 내 대신 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존재가 완벽하게 느껴지도록,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책을 통해 읽을 필요가 있었다.-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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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 그녀는 우리 여고시절 에밀 아자르와 더불어 열광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한때 유행처럼 지나친 작가라 그후 다시 찾지는 않았는데 이 페이퍼를 보곤 솔깃하네요.
님이 쓰는 글들은 어찌 그리 맛이 나는지...너무 좋아요.^^

blanca 2010-02-07 19:24   좋아요 0 | URL
근데 순오기님 저는 왜 여즉까지 에밀 아자르를 몰랐나 몰라요. 어디 갔다 온건지^^;; 순오기님이 너무 좋다니 제가 더 좋네요^^;;

후애(厚愛) 2010-02-08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방문해 주시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blanca 2010-02-08 13:52   좋아요 0 | URL
이렇게 또 친절하게 와주셨군요. 이미 반나절이 지나갔는데 지금부터 행복하게 지내겠습니다.^^ 후애님은 지금 취침중이시겠죠?(아마도 시차가) 행복한 꿈 꾸고 계시기를....

gimssim 2010-02-0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책이 새로 나왔군요.
고백하자면 먼 옛날 사강에 열광한 건...아마 그녀의 보이시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나 싶군요.
나이들어 읽는 <슬픔이여 안녕>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은 또 어떨까? 기대가 됩니다.

blanca 2010-02-08 22: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중전님. 반갑습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짧은 머리, 그리고 당돌한 행동들. 전형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이쉬한 모습인 것 같아요. 안그래도 제가 너무 뭘 몰랐을 때 대충 읽고 평가한 것 같아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책이더라구요.
 
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그 집은 우리를 볼 줄 아는 눈과 마음과 혼이 있었다. 그 집에는 합의, 요청, 깊은 공감이 있었다. 그 집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는 집의 신뢰를 얻어 은총과 축복의 평화 속에 살았다. -마크 트웨인 p.128  

죽어있는 사물의 틈새 마다 삶의 숨결을 불어넣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살아서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는 그래서 집을 예사롭게 보고 지나갈 수가 없다. 특히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것의 역사를 부려 놓는 서재에 대하여 가지는 그 소망과 애정의 깊이는 한정없다. 아름답고 특별한 서재를 가진 이들의 사연과 더불어 그것을 염탐하는 재미는 황홀하다.  

『보그 이탈리아』의 편집장을 지냈던 저자의 글과 『엘르 인터내셔널』등에 사진을 싣는 작가의 사진이 만나 이루어낸 공동성과는 아슴푸레한 추억의 그리움이 감싸는 반짝이는 사연들의 향연이다. 버니지아 울프, 마크 트웨인,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을 제외하면 생소한 작가들이지만 그들의 독특한 서재와 각각 말미에 실린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만나는 지점에 서는 것은 안온하고 유쾌했다. 더불어 새로 알아가는 작가들의 생애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축약된 그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부록으로 얻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서재가 인상에 남는다. 바다를 면한 통유리창 앞에서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봄직하다. 하지만 그의 서재가 뇌리에 박힌 것은 친구 파졸리니와의 '두 집 살림'덕택이다. 

두 친구는 집을 반쪽씩 차지했다. 파도의 리듬처럼 이해,우정,애정이 갈마드는 짧은 시기가 시작됐다.-p.446 

연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친구와 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영역과 인생을 존중해 주는 일은 특별한 지향처럼 받아들여진다. 나의 절친한 친구와 각자의 연인을 둔 채 함께 읽고 쓰고 한다는 것은 각자의 인생이 평행선처럼 나란히 놓여지며 때로 교차하는 일이라 어렵고도 특별히 충만된 삶이다. 모라비아는 이 친구 파졸리니의 죽음으로 비극을 맞게 되지만. 

항상 하늘색 종이에 글을 썼다는 버지니아 울프와 한 때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집,서재를 같이 놓고 비교해 보며 읽는 재미도 가질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의 배경이 된 카사카무치의 집 사진을 같이 펼쳐 놓고 작품의 배경을 받아들인다면 생생하고 절절한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들이 가고 남아 그들의 펜끝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마침표 만큼 허전하고 아쉬울 그 공간은 때로는 연인이, 때로는 자식들이 남아 그들의 삶 자체로 갈무리하고 있다. 과거로 흘러간 이야기들은 언제나 한 겹의 환상이 덧씌워져 꿈처럼 아득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삶이 꺼지고 남은 그 잔영이 드리워진 그들의 서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서재에서 시작하고 끝났을 그들의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사랑이 전해져 와 그들의 문장들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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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외국 작가들의 집,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이라니 관심이 확 쏠리네요.^^
서해문집에서 나온 '작가의 방'에서는 우리나라 대표작가 6인(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의 서재를 보여주지요.

blanca 2010-02-06 23:5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이 얘기하신 비슷한 책을 읽었던 것도 같은데 작가 이름들을 보니 다른 책이군요. 솔깃합니다. 이런 류의 책은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괜히 흐뭇해져요. 언젠가는 저도 아담한 서재를 꼭 가지고 싶어요.

순오기 2010-02-07 16:56   좋아요 0 | URL
작가들의 서재는 정말 부러움의 절정이지요.^^
 
독이 되는 부모
수잔 포워드 지음, 김형섭 외 옮김 / 푸른육아 / 2008년 10월
구판절판


우리는 가족의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나 정치적 이상, 종교에 대한 충성심은 가족에 대한 충성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충성심을 갖고 있다. 이 충성심은 가족체계와 부모,부모의 신념에 우리를 종속시킨다.-182쪽

독립된 인격체가 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킴과 같은 어른들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남의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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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니앤 2011-11-29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겨서 사보앗는데 실제, 그다지 잘 읽히지는 않는 책이엇어요~ ㅎㅎ
 

" 너 어떻게 이런 말을 일기에 쓰니? 동생보고 이런 용어를 쓰고. 너 정말 혼나야 되겠다!" 

초등학교 2학년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일기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 집중되는
관심에서 소외되는 것이 서운해 과격한 용어를(사실 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주목을 받고 싶은 욕심에) 동원해
동생을 저주하는 일기였던 것 같다. 중년의 넉넉한 체구의 담임선생님은 그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되바라진 나를 한껏 성토했다. 한참을 야단맞고 돌아선 나는 이미 너무 상처받아서 그 순간을 기억 속에 영원히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울었던 것도 같고 아니었던 것도 같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원했던 반응 대신 돌아온 호된 질책은
여덟살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생채기를 냈다는 것이다. 나는 동생을 정말 미워했던 것이 아니고 나도 좀 봐달라고 나도 좀
쓰다듬어 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하는 서툰 표현을 내뱉은 것 뿐이었다. 그 일로 나는 아주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몹쓴 아이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책에 아주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다만 그녀의 담임선생은 나의 담임선생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초등학교 오학년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저자는 일기에 온갖 과격한 욕설은 다 동원하여 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토로했다. 신규발령을 받아 부임한 담임선생님은 되레 그 일기장에 꼬박꼬박 상을 주었다고 한다.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내가 적었던 그 모든 욕이 실은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은 사랑에 대한 분노'여서,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그 욕들은 "제발 나를 좀 사랑하고 보살펴줘요"라는 외침이었다.  

만약 그 때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에 대해, 일기 쓰는 방식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야단을 치셨다면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그 후 단 한 줄도 일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쏟아내는 길을 찾지 못해 반항된 행동이나 폭력으로 그 억압들을 분출했을지도 모른다. 험악한 욕으로 점철된 일기장을 묵묵히 지켜봐주시는 선생님의 용인과 격려 속에서 나는 아마도 생각과 감정을 저어함 없이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을 훈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때 그 선생님이 가슴 저리도록 고맙게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다. -김형경 <천 개의 공감> 중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참으로 슬펐다. 물론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어떤 악의적 감정을 가지고 나에게 야단을 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처지에 있었다고 가정해도 담임선생님 만큼은 아닐지라도 김형경의 담임선생님 같은 묵묵한 관용을 베풀 수 있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누군가가 특히나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분출할 때 우리는 과도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감정 속에는 우리 자신의 거부하고 싶은 감정들의 찌꺼기와 아이다움에 대한 기대가 붕괴하는 충격적인 순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그 감정 자체를 부정하라고 그 감정 자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라고 강요하기 쉽다. 그러나 감정은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정해야 하는 당위의 대상으로 건져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며 ,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판결을 내릴 수 있지만, 마음속의 행위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감정에 대해 판결을 내리거나 , 상상을 검열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로와 정신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 하임 G. 기너트 <부모와 아이 사이> 중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는 자녀 교육서라기 보다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의 심리치료서 같은 느낌이다. 어떤 형태로든 부모에게 과도하게 종속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일보전진을 독려하는 책이다. 알콜중독자, 성적/정서적/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극단적인 부모유형들의 제시가 가슴깊이 와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부모에 대하여 느끼는 솔직하고 적나라한 감정에 대한 직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깊다.누구나 부모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심리적인 억압기제를 발동시키는데 이게 후일 성장하여 대인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더 무서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솔직한 것이 미덕이 아닌 사회 속에서 은연중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의 표현을 미리부터 억압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 감내하고 자신을 속이는 기술을 미리부터 연마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인지. 
 

그 때 그 선생님이 " 그래. 지금 당장은 동생이 태어나 너한테 관심이 오지 않아 슬프고 화가 나지? 당연히 그럴 거야. 하지만 그런 화나는 감정을 그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니까 그런 표현은 쓰지 말자. 알았지?" 이렇게만 얘기해 주셨어도 나는 마치 얼음땡 놀이에서 누구도 땡을 해주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추운 데에 그렇게 오래 서있는 듯한 그 무서운 소외감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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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5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2-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동 관련 서적을 보면 꼭 저를 뒤돌아보게 되요. 지금의 나도 다시 보이고. 그래서 더욱더 탐독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보면, 어른은 하찮게 스쳐지나가는 그 감정들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생사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그나저나 독이 되는 부모'표지, 정말 무섭습니다. 저 저렇게 무서운 표지는 처음 봐요. 그래서 더더욱 보관함으로.

blanca 2010-02-05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은 저를 바로잡기 위해서^^;; 읽다 보면 저의 어린 시절을 많이 되돌아 보게 되고 뒤로 짚어 나가면서 저를 치유하는 느낌이랄까. 그렇죠. 표지가 조금--;; 자꾸 들여다 보게 되고 야단치는 엄마보다 방관하는 아빠의 차가운 눈빛이 더 가슴아픈 느낌이 드네요. 이 책 표지를 자꾸 딸아이가 유심히 보고 모라고 중얼대는데. 치워놓아야 될 것 같아요.

저절로 2010-02-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어기요~땡!!!!

blanca 2010-02-05 20:52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의 땡! 고마워요! 지금 생각해도 사실 참 서운해서요. 어지간히 제가 상처를 받긴 받았나 봅니다.

라로 2010-02-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거 읽으면 뭐해요? 실천이 안되는 一人 여깄습니다.ㅠㅠ

blanca 2010-02-05 20:54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이런 책 열심히 읽고 오늘 하루만도 딸아이한테 몇 번이나 소리지르고. 참.... 매일 반성하는 일기라도 적어서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0-02-0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열심히 읽으려고는 하는데 실천을 잘 못해요.ㅠ.ㅠ

blanca 2010-02-06 15:00   좋아요 0 | URL
읽는 동안은 그래도 두 번 화낼거 한번 화내고 그렇게 되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육아서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씨가 팬싸인회에서 "자녀들을 옭아매지 말라"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그냥 상투적인 효도 타령보다 신선해서 눈에 들어왔어요.

blanca 2010-02-06 15:01   좋아요 0 | URL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녀들을 옭아매게 되는 것 같아요. 장성해서도. 그러지 않으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데 참 쉽지 않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