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그 후에도 그가 사후에 누리는 고가의 그림값과 정당한 예술적 평가와 존경에 접할 때마다 그 소리가 나왔다. 
                                                                                                         -『우리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중 

박수근이다. 박완서가 『나목』이 여성월간지 소설 모집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된 것도 결국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만난 가난한 화가 박수근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수룩하게 덩치만 큰 화가는 미군들이나 그들의 연인과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단돈 4달러를 받아 생활했다. 그의 <빨래터>가 최근 사십오억 이천만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은 그래서 감탄과 더불어 비감어린 씁쓸함을 꼬리처럼 달게 된다. 그가 생전 반도호텔 화랑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그림 팔렸어요?"를 외쳐댔던 것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호텔의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한 구실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얘기를 고등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고 대학교 때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 순간 박수근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예술가의 신산한 삶 전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참 먹먹했었다. 그 후로 나는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애잔한 슬픔을 느낀다. 죽고 나서 수많은 위작 논란에 시달릴 만큼 또 미술품 경매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는 뉴스의 중심에 설 만큼 경외받고 있는 그의 현재가 과연 그의 소외당한 삶 전체를 위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니 나도 박완서의 '제기랄'에 동조할 수밖에.  

 박수근 <빨래터>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많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우리가 써버린 돈을 다시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전혀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중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언제나 그것을 완전하게 화폭에 담아내기를 소망했던 사내. 결국 그 별로 직접 가 닿고 싶었던 그. 삶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끝까지 사랑하고 죽음까지 내맡겼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이 편지의 바로 이 대목.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그림이 팔리지 않는걸. 테오는 시대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필요없다고 오기어린 대거리를 내던지듯 답장한다. 반 고흐는 미술계에서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자리잡은 화가다. 우리는 반 고흐를 모르거나 그의 그림을 부정하는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에게 반 고흐는 예술에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불편한 강박마저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생전에는 경제적 고충에 너무 치여 물감과 종이마저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비참한 나날들을 보냈음은 주지하지 않는다. 그를 온전히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생계까지 해결해 주었던 테오마저 그의 사후의 명성과 보상을 누리지 못하고 형을 따라 몇 개월 안 되어 죽어버린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그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그를 탄핵한 글과 재판기록만으로 자신을 평가할 것을 우려한 대목은 다산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이 가지는 미래적 의미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생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자찬묘지명 중 

 

 

 

 

 

 

 

 

 

하늘이 내린 재능을 반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그들의 예술적 학문적 성과의 탑은 드디어 우리를 굽어 내려다볼만치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탑을 삶의 고충들과 악전고투하여 만들어 낸 당사자들은 비참하게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이제서야 환호작약하는 우리들. 화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다음 세대에게 말을 건넨다는 고흐의 자기암시적인 얘기도 언제나 한 발 늦는 우리의 심미안의 그 허술함을 감싸주지는 못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을 살게 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붓을 잡을 수 있게 한다면. 이제 우리는 온 몸으로 지지해 주고 온 맘으로 후원해 줄 수 있을 터인데.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오고 후회는 언제나 절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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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타까운 일이죠. 시대가 이해해주지 않았던 이들이 어찌 고흐와 다산 뿐이겠습니까마는...
40세의 박완서를 등단시킨 '나목'을 읽는 내내 박수근 화백이 가슴 아팠지요.

blanca 2010-02-08 22:31   좋아요 0 | URL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순오기님 말씀처럼 사후에야 겨우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현재진행형일거구요. 그런데 유독 저 세 사람은 더 짠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일 것 같아요^^;;

잘잘라 2010-02-0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얘긴지는 몰라도..
제가 김추자 노래를 들으면서 늘 하는 말,
"와우~ 정말 대단하다. 그 시대에 어떻게 저런 노래를!!!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흠.. 그런데먈야. 난 이런 생각이 들어. 만약에,
김추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래서 김추자는 그냥 가수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어."
님의 글을 읽으니 또 김추자 노래를 듣고싶네요.

blanca 2010-02-09 13:59   좋아요 0 | URL
바닷가식당님 안녕하세요. 배경의 꽃과 예쁜 소녀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맞아요. 어쩌면 다 그 시대에 태어나 그런 노래를 부르고 그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쓴게 나름대로 운명이고 또 결핍들이 그것들에 녹아 더 좋은 것들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추자는 그 멋진 춤솜씨만 기억하고 노래는 안들어봐서 아쉽네요. 기회가 되면 들어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보다 정약용은 더 행복한 남자였죠.정조 집권기 때는 젊은 관리로서 위세도 꽤나 부렸지 않습니까?

blanca 2010-02-10 23:01   좋아요 0 | URL
예.그건 그런 것 같아요. 고흐는 단 한 번도 전성기라는 걸 가져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18년 간의 유배 생활, 산 자식보다 죽은 자식이 더 많았던 것. 정약용도 말년이 참 비참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라...(이렇게 얘기하면 꼭 친밀한 지인처럼 들리지만^^;;) 좀 편향됐던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