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 실습을 나가고 난 후 스스로 교사가 될 자질과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중학생 아이들과 생각보다 교감이 잘 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수업에 대한 열정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던가 확신이 안 선다. 아이들과 어쩌면 함께 했을 수도 있을 교실에서의 수업의 정경을 떠올리게 된다. 같이 읽고 쓸 수 있다면, 그 또한 지금은 짐작하기 힘든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어렵고 생각대로 안 되고 때로는 상처 받고 실망하고 무력감에 휩싸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은, 아니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십대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친 국어 선생님들의 이야기인데 이 둘의 현장은 외형적으로 사뭇 다르다. <우리들의 문학시간>은 과학고이고 <소년을 읽다>는 소년원이다. 한곳은 <코스모스>를 읽고 교사보다 더 쉽게 이해하는 아이들이 영재 교육을 받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열일곱 살까지 단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소년이 교사에게 인사하기 위해 간이 교실에 자유롭게 들어오지도 못하고 개인적으로 만화책도 소유하지 못하는 곳이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이들의 공통점은 십대라는 연령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각지 않게 이 두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감의 지대에서 두 공간의 십대들은 만난다. 좋은 글을 읽고 마음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편견은 와르르 무너진다. 윤동주의 시에 모두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년원 친구들은 줄줄 암송해 내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순수했다. 좋은 글 앞에서. 


<소년을 읽다>를 읽다 자주 가슴이 아렸다. 분명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가는 곳이다. 범죄에는 분명 피해자가 존재한다. 그들을 의식한다면 이 소년들의 국어 수업을 그저 낭만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독방에서 시엽서의 시를 암송하며 시간을 보내고 책의 감상을 나누는 시간에 '먹고사는 일의 급급함'을 발표하고 십대의 아이들이 택배 상하차를 다룬 이야기에 가장 크게 공감하는 풍경은 이 소년들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아이이고 싶은데 아이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을 감히 상상해 본다. 일찍부터 친절하지 않았던 세상, 소년이기 이전에 생활인으로서의 역할을 먼저 강요하는 곳에서 재판으로 넘어온 경계의 이편에서 저자는 아이들을 만난다. 저자 또한 자신 앞에 있는 이 소년들의 열중하는 눈망울과 그 뒤안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아이들에게 이러한 좋은 삶과 좋은 읽기를 가르치는 일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에 대한 불확실성과도 닿아 있는 이야기다. 이곳의 아이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지만 그 세상은 그 아이가 떠나왔던 이 곳에 오기 직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이것은 아이들이 좋은 삶을 사는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회복하는 데 분명 우호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암울한 전망과 현실로 여기에서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일은 어떤 관성처럼 아이들을 옭아맨다. 


금요일마다 만나서 소년들과 시를 외우고 책을 읽는 꽉 찬 시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에 쌓이고 있을까. 강 하구에 퇴적물처럼 조금씩 쌓이고 쌓이다가, 바다로 흘러가는 어귀에서 새로운 물길을 만나게 될까. 아니면 도로 옆에 쌓인 흙먼지처럼 풀꽃 위에 잠시 머물다가 , 휙 지나가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리고  말까. 사라져버리고 말까.

-서현숙 <소년을 읽다> 


실제 일 년 동안의 수업일기는 대단한 성취나 거창한 감동의 결말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극적으로 교화되어 근사한 성인이 되어 나타나는 장면도 없다. 대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해주어 감사하다며 선생님에게 커피 두 잔의 기프티콘을 보내오고 선생님 건강하라고 안부 전화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담담한 장면들의 울림이 한층 더 크다. 사람을 믿지 않았던 아이들이 자신들과 일주일에 한번 책을 읽고 때로 짜장면을 사주었던 선생님의 건강을 신경쓰고 누군가와 함께 선생님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기까지의 여정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읽는 일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나는 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안다. 그래도 무언가를 함께 읽고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을 나누며 교감을 나누며 그들의 기억의 한 자락을 점유하게 되는 일은 분명 헤아리기 힘든 질량과 질감을 가지는 시간일 것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부럽다. 그것이 세상의 풍파를 만나 깎이고 때로 스러진다 해도 거기 그렇게 한 구석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가지게 될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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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6-08 1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교생 실습하신 적이 있으시군요.
저는 오래 전 주일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저도 아이들 가르치는 건
정말 내일이 아니구나 했죠. 그래도 한 6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직접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가능했죠.ㅋㅋ
요즘 성경공부를 줌으로 하고 있었는데 정말 못할 짓이더군요.
근데 리더님이 참 열정 있으세요.
본인도 죽 쑤고 계시다는 걸 누구 보다 가장 잘 알고 계실텐데
저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텐데 끝까지 해 내시는 걸 보면서
저의 주일학교 시절을 돌아보곤 했습니다.
중요한 건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끝까지 해 내는 것이구나 반성하게 되더군요.

blanca 2021-06-09 11:19   좋아요 4 | URL
스텔라님, 6년이나 그 일을 지속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아, 요새는 다 줌으로 하는 분위기가 되어서. 그런데 이게 모여 하는 분위기랑은 또 다르더라고요.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많은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게 또 최선이라... 맞아요, 그런데 그 끝까지 해내는 게 진짜 갈수록 더 힘들어져요. 그런데 저는 갑자기 요새 아이들이 마음으로 예뻐요. 뒤늦게--;; 이걸 좀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페크pek0501 2021-06-18 1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때에 따라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저도 교생실습을 나간 적이 있는데 교사는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잡지사 기자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나중에 뒤늦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외로 적성에도 맞고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수업을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ㅋ 인생엔 정답이 없음, 인 것 같아요.

blanca 2021-06-22 13:17   좋아요 3 | URL
페크님, 잡지사 기자 일 하셨군요! 저는 막 마음으로 애들이 이쁘고 그러지 않아 그게 이십 대에 나는 교사가 되지 못할 이유라고 판단내렸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나이 들고 나니 고등학생도 예쁘고 대학생도 예쁘더라고요. ㅋㅋ 귀엽고 아기아기한 아이들 뿐 아니라 뭔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지금에서야 생기니...왜 이렇게 항상 타이밍이 어긋날까요. 뭔가를 할 수 있을 때에는 그게 싫고 참, 모르겠습니다.

초딩 2021-07-07 2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blanca 2021-07-08 08: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7-07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blanca 2021-07-08 08:3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얄라알라 2021-07-08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링크 타고 들어와서 이제서야 글 읽고 갑니다. 축하드려요^^

blanca 2021-07-13 15: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과커피 2021-09-22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넘 멋진글!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맛있는 글이네요~^^ 저도 주일학교등 2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뒤늦게 아이들이 그모습 그대로 예뻐요~

blanca 2021-09-23 11:36   좋아요 1 | URL
기대보다 너무 좋은 책들이라 감상에 젖어 봤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아이들을 대하는 일은 어떤 특유의 가치와 보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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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열네 명의 철학자의 지혜의 기차는 언뜻 가벼워 보일 수 있는 구성이다. 이런 유의 책은 지금까지 충분히 많았고 철학 측면에서도 삶 쪽에서도 그리 깊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 경우는 많지 않았으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충분히 시간을 내어 탑승할 만한 가치를 지닌 열차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스스로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반향은 우리 모두에게로 향해 있다. 동승인인 그가 입양한 열세 살의 딸 소냐의 지극히 십대다운 발언들은 자칫 사변적으로 흐를 수 있는 철학을 현실로 끌어오는 효과와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드디어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의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맨발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지저분한 거리에서 던진 질문들은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를 경험하고 사는 삶의 여정으로 확대된다. 은둔의 성자처럼 미화된 소로가 얼마나 삶에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제대로 모든 것을 경험하고 보는 것에 열중했는지 간디가 겉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정에 집중하여 마침내 이루어 낸 성과가 무엇인지 공자가 실용적인 친절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추구한 바가 무엇이었는지와 더불어 우리가 늙어가며 결국 건설적으로 물어남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지를 거쳐 마침내 몽테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의 종착점으로 향햐는 저자의 여정은 삶 그 자체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저자 자신의 에피소드들과 철학자들의 삶 속의 은근히 숙성된 그것들이 어우러져 지금까지 멀리서 모호하게만 보였던 철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문제들의 답을 찾아나가는데 하나의 안내서이자 지도로 치환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역시 에릭 와이너의 성취는 대미의 몽테뉴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가장 실제로 만나 맥주 한 잔을 나누고 싶은 철학자인 16세기의 철학자 몽테뉴가 이야기하는 죽음은 결국 우리가 이 열차에 올라탄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의 연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에릭 와이너와 함께 한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추구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무로 돌아갈 것임에도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삶은 여전히 유의미한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딱 떨어지는 답은 있을 수 없다.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거창한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 와이너가 생테밀리옹의 몽테뉴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가로질러 읽는 이들에게 꽂히는 불의 화살이다.


그에게 죽음은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재앙이 아닌 아름답고 불가피한 것"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걱정하지 마라. 때가 되면 자연이 전부 다 제대로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을 것이다. 괜히 걱정하지 마라."

-p.495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로 도착한 순간부터 그것이 비존재로 다시 돌아가는 그날까지 기꺼이 기억해 둘만한 이야기들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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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7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침과 죽음에 대한 철인들과의 성찰 아주 좋았습니다 ㅎㅎ

blanca 2021-06-07 14:07   좋아요 2 | URL
사실 그렇고 그런 책인줄 알아서 책을 차례대로 안 읽고 읽고 싶은 대목만 읽으려 했었거든요. 어느새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읽게 될 정도로 좋았어요. 그리고 사지 않고 빌린 걸 후회했죠. ^^;;;

2021-06-08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 문득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연상되는 작품은 어떤 배경이나 분위기일 수도 있고 문체일 수도 있고 이야기 그 자체의 얼개일 수도 있다. 김병운의 <한밤에 두고 온 것>은 연기자이자 퀴어인 '내'가 친구 대신 맡은 희곡 낭독 수업에서 만난 오십대 여성과 소통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다. 그 지점은 세상의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시선에 대한 것이다. 화자는 그녀의 과거 얘기를 통해 자신의 현재에서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세대를 가로질러 나눈 우정이 결국 성장을 유도하는 이야기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을 뒤로 밀어놓고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벌이는 사투가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깨닫는 시점이 온다. 그것의 대가는 결국 삶 그 자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주제는 다를지라도 세대와 성별을 가로지르는 소통이 소위 어떤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또 있다. 청년과 노인이고 수업은 도서관의 '시 윤독 모임'이었다. 어쩌면 가장 김연수다운 서정성이 그의 청춘과 만나 가장 만개했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스물다섯의 화자가 그 모임에서 만나게 된 희선씨와 암으로 요절한 그녀의 제자의 마지막 소원, 가닿지 못했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이야기는 여전히 청량하다. 삼십 대 초반에 읽었을 때와 지금 읽을 때의 느낌이 또 사뭇 다르지만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공명하며 작가의 저력을 실감한다. 마흔세살이 끊임없이 느끼게 되는 기시감에 대한 이야기, 그럼에도 우리가 기꺼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 어떤 것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는 절대 이해할 수도 그 의미를 포착하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천착이 현실에 기반한 것이라면 세월의 마모를 기꺼이 떨쳐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두 작가의 삶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이 와닿는다. 그 와중에 봄이 가고 초여름이 걸어온다. 이제는 알겠다. 이러한 나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할머니가 되어 추억할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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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묘한 책이다. 에세이집인데 우연의 빈도나 의미로의 집약도가 너무 높다. 마치 단편소설처럼. 이를테면 어머니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의 우연한 조우, 아버지의 죽은 전처의 오빠집에 가서 며칠 묵는 유년기의 이야기, 어린 시절 바쁜 부모 대신 자신을 돌봐준 고모의 목조 연립주택에서 독거 노인의 사체를 발견한 일과 우연찮게 어느 한 남자의 자살 과정에 개입하게 되는 이야기 등. 하나하나가 다 극적이고 밀도가 높다. 

















물론 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때로 극적이다. 심지어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펼쳐지기도 한다. 누구나 정리되고 잔잔하고 건전한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쉽게 수습하기 어려운 일들이 즐비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경우 또한 잘 없다. 생에서 펼쳐지는 일들의 가장 잔인한 점은 무작위적이고 때로 불합리하고 심지어 무의미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과거의 기억들은 그러나 편린처럼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예술적인 경지, 생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것이 소설가의 시선을 통과한 이야기라 그런 것인지 글쓰기를 위한 어떤 첨가나 삭제, 인위적인 의미 부여가 부연되어 일어난 일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좋았는데 너무 좋아서 의심이 갔다고나 할까. 모든 걸 다 실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 의문은 후기에서 풀렸다. 미야모토 테루 자신이 시원하게 고백하고 있다.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의 소재를 쓰자고 마음 먹었다. <중략> 이 이상 쓰면 창작의 영역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찰할 수 있었다.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그의 이야기들 모두를 과장된 자기 추억으로 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공명하는 울림이 있다. 산만하게 흩어지거나 공허하지 않다. 공황장애로 고생하다 소설가가 된 이야기, 어머니가 실패한 결혼으로 남기고 간  아버지가 다른 형을 나이가 훌쩍 들어 몰래 찾아가 이름을 크게 부른 후 도망간 이야기, 미야모토 테루의 아버지가 일하는 중국집 종업원에게 속아 가짜 비취 반지를 사게 된 고모가 한번 더 크게 속게 되는 에피소드, 어린 시절 동네 대학생 형이 데려가 준 강에서 형이 구해준 여학생이 우연히 함꼐 찍힌 사진에 얽힌 이야기 등은 모두 생의 실루엣을 어른어른 비추며 설명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우연의 교차와 직조,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뒤돌아보며 추출해 내는 의미들은 결국 생과 생명의 신비함과 그것의 줄기를 끊어내는 시간과 죽음의 무자비함에 느끼는 어떤 놀라움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것은 헤아리기 힘든 억겁의 시간 "삼천대천세계" 속 찰나에서 명멸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처연한 엘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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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 문지클래식 7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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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저기까지 아등바등 걸어가면 이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고 평지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가 있다. 친정 엄마는 나의 그런 믿음을 야멸차게 정정했다. 아니야, 사는 건 산 넘어 산이야. 나는 엄마의 비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엄마의 개별적 삶이고 그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비롯된 거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죽는 일은 그래,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내가 행하는 느끼는 모든 일들이 그 주어를 잃어버리는 풍경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박완서 작가의 얘기처럼 내심 나는 나의 불멸을 믿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바깥의 풍경이고 모든 무의미는 덜 노력하는 자의 불평처럼 때로 느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에서 제외하고는 도저히 연상할 수 없는 시간 틀 안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때로 안고 걸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의 두 발이 단단한 대지에 붙박힌 것처럼 때로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애는 없다. 죽음은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나의 삶에 실감을 끼워 놓으며 나를 옥죈다. 죽음 없는 삶은 없다. 예외란 없다. 그리고 죽음이 항존하는 삶은 그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진다. 그런데 애쓴다. 애닳아 한다. 


박상륭 소설가의 <죽음의 한 연구>는 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 형태일 뿐이다. 이 안에는 작가가 표방한 제목처럼 엄청난 사변이 녹아 있는 '죽음의 한 연구'가 한 도보 고행자의 행로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기독교, 불교, 무교, 민간신앙의 경계를 해체하여 거듭나고 있다. 그것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엔 없다구"다. 광대하고 심원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깨달은 삶과 죽음의 비의는 이야기의 틈새마다 비어져 나온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형식과 틀의 비극에 유형당한 우리의 비극적인 생의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래서 나와 나의 삶과 나의 종말을 듣고 보는 일이다.





은유의 향연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고을의 창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승려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의 죽음 이후로 수도를 위해 유리라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수도부 여인과 살림을 차렸으나 이마저 그를 그곳에 매이진 못하게 하고 연이어 읍으로 향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샘터의 존자와 염주 스님을 살해하고 스승을 압살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백하고 그것에 합당한 형을 받기 위해 떠나왔던 유리로 귀환하여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대략의 줄거리다. 그러나 그가 행한 살인은 실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탐욕과 편견과 아집을 끊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편협한 자아를 과감히 파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행위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항변하는 장면은 묘하게 아이러니한 느낌을 풍긴다. 작가는 우리의 해석의 틀마저 해체하려는 기지를 발휘한 것 같다. 이야기는 몽환적이고 비약적이어서 결국 전체가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난 하나의 은유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개아의 틀을 해체하고 인습과 습속, 종교의 경계도 허물고 마침내 '나'라는 자아의 허상까지 부수고 나면 도달할 그곳에 죽음이 당도해 와 있다는 결말은 거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철학

박상륭은 죽음 앞에서의 삶과 생의 무의미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폄하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쉬운 길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상의 덧없음을 결국 살아내며 체험해야 한다는 고행길을 택한다. 한없이 흔들리고 절망하며 걸어가는 노정의 끝의 깨달음을 삶의 책무로 자인한다. 불교에서의 업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서라도 우리는 그 업을 숙명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풀어내야 한다. "필멸의 윤회"는 우리의 "영생의 희원"과 충돌하지만 생이 삶다로우려면 그것은 숙명의 과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그래서 허무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성취적 결말로 자리매김한다. 박상륭 특유의 아름답고 서늘한 문장들은 어떤 예감처럼 그가 받아들이는 죽음을 결정체처럼 형상화한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안이자 안식이다. 그 안은 공허하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죽음의 한 연구>가 그 입구는 음험하고 지난해 보여도 그 출구로 나아가는 길이 매끄럽게 확장되는 것은 작가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보다 그것을 품고 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탄탄한 기반을 딛고 선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이야기가 자칫 현학적이고 사변적으로 흘렀을지 모를 한계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그 교감과 세상의 현상에 기꺼이 동참하는 그 기꺼운 역동성으로  극복된다. 죽음의 무게가 신분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것, 종교적 허위를 입은 탐욕 등의 간파는 예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문장들은 단 하나도 어긋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생과 죽음을 채집하는 어휘들은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라도의 방언들이 가지는 리듬감은 사람들의 말을 하나의 집단적인 제의 속 구슬픈 노래처럼 들리게 한다. 모두 다 정확히 하나하나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어떤 경계나 틀을 넘어 마음으로 건너가는 흐름의 강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운 체험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우리가 걸어간 그 길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심지어 그것이 쇠락으로 향한 것일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나름으로 충만하다. 


마지막 노래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나도 기꺼이 그의 목소리에 동참한다.

그래, 다시 그 세상에 태어났으면 싶다. 왕후며 장상 마님들의 태 속도 말고, 나를 낳았던 그저 그런 어미, 그런 어떤 옌네 태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싶고, 그래서 저 바닷가 모래가 번쩍이는 곳에서 모래집이나 쌓으며, 조수가 밀리고 밀려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지켜보고 앉았으면이나 싶다. 저 무염무애의 그러나 비천한 머슴아이, 학대와 멸시 속으로도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었던 사내아이. 바다의 음기로만 굳어진 조개 알을 씹어 비린내를 풍기며, 갈매기의 울음에 얼을 빼앗기던 별로 오래도 흐르지 않은 옛적에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다시 되었으면 싶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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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6-05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blanca 2021-06-05 18:43   좋아요 1 | URL
초딩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5 19:3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알려드렸듯이 뿌듯합니다
:-) 3만원도 확인하세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