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진지하고 심각한 르포르타주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한 사람의 오롯한 추억들, 사는 이야기들, 살아갈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듣고 싶을 때 '수필'이라는 장르로 다가가게 된다.

 

중학교 국어 시간,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필'이라는 장르를 진지하게 조금은 지루하게 배우고 한 문장, 한 문장, 줄을 긋고 이미 해석되고 분석되어 버린 한 메모광의 메모에 대한 천착과 한 의사가 쓴 아버지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그것을 둘러쌌던 그 분분하던 해석들은 날아가 버리고 그들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열네 살 독자의 생동하는 호기심과 함께 어우러져 남는다. 읽은 것들도 결국 추억이 된다.

 

나는 아이를 업는 데 서툴다. 요즘 나오는 아기띠들은 아이를 앞으로 안는 데에 더 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첫애를 낳았을 때 친정 엄마가 동네에서 산 처네는 지금도 순전히 할머니용이다. 나도 흉내를 내어 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허리도 못 펴겠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아이는 내 등을 줄줄 타고 내려온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국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재우기도 한다.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다. 예전에는 다 그렇게 키웠다고들 한다. 육아와 가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고달팠던 것이기도 하고 더 가능한 것들이 많기도 했던 시간. '처네'는 그런 면에서 어떤 그리움, 아련함을 불러일으킨다. 목성균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는데 우연히 그의 유고 수필집 제목 <누비처네>가 너무 좋아 그를 만나게 됐다. 그의 유년시절, 청년시절, 중년시절, 노년시절을 아우르는 이 방대한 수필집이 마치 한 인간의 생애를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잘 섞어 뭉근하게 끓여낸 것 같아 이 사소하지 않은, 소소하지 않은 이야기에 오랜만에 감동을 받았다. 그의 그 단아한 문장들, 마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듯한 묘사들, 귓전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들에 그저 아연하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 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누비처네 중

 

목성균은 이때 처지가 곤궁했다. 서울에 올라가 벌인 인쇄업은 어려웠고 차마 면이 서지 않아 첫애를 낳은 지 백일이나 지난 아내를 보러 고향집으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이러한 처지를 감안한 그의 아버지는 아이를 업고 근친을 갈 누비처네를 살 돈을 아들에게 소액환으로 보내 내려오기를 독려한다. 바로 그 누비처네에 아이를 업고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가는 길의 이야기다. 그의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았다,는 고백이 와닿는다.가난과 싸웠던 젊은 아빠는 마침내 아이 셋을 오롯이 키워내고 직장에서 퇴직 후에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는 노년에 등단했다. 글만을 위한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내고 그리고 썼다. 어린 시절 진외가의 개소주를 손주에게 먹이기 위해 친정길에 나섰던 할머니와의 추억들, 산림 공무원을 하며 오며가며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 중년이 훌쩍 넘어 아내와 여행 간 이야기, 손주들과의 아기자기한 한때. 그가 젊었을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업이었다면 갖지 못했을 이야깃거리가 많다. 불현듯 동인도회사의 회계원으로 수십년 간 일했던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이 떠올랐다. 그는 목성균과 달리 가정을 갖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생계를 위하여 매일 직장에 출퇴근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가 퇴직하던 날 그의 이야기는 초로의 사내가 썼다고 보기에 굉장히 발랄하고 사랑스럽다. 내게 아들이 있다면 이름을 '나싱투두'로 붙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하지만 찰스램이 회계원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이 없었다고 해도 찰스 램의 다감하고 아기자기한 에세이들이 가능했을까 하는 데에는 의문이 든다. 그러고 보면 레이먼드 카버가 돈을 벌며 막간을 이용하여 단편 소설을 써내고 목성균 작가가 문예창작가를 중퇴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나 직장에서 퇴직하고나서야 등단하고 찰스 램이 퇴근 후에야 글을 쓸 수 있었던 상황들은 무조건 비관시 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비근한 일상사가 농밀하게 배어 있는 그들의 글을 곁에 둘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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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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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던가. 학급문고라는 것이 있어 각자 집에서 가져온 책들로 작은 도서관을 꾸몄었다. 그 때 <여자의 일생>을 집어와 몇 번이나 읽어보려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의 문제였던지 아니면 고작 열다섯 언저리였던 나의 시선이 차분히 머물지 못해서였던지 이 책은 번번히 나를 비껴갔다. 통속적인 제목과 통속적인 여인네의 삶이 한창 세상 전체가 언제든 나의 손으로 조물딱 조물딱 하여 나의 꿈대로 변형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나의 치기와 어우러지지 못했다. 나는 아주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서글픈 수동적인 삶과는 공통분모가 찾아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던 것도 같다.

 

다시 새로운 여자의 일생을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낳은 내가 읽는다. 이백 년도 더 되는 시차. 시골 귀족의 외동딸 잔느. 수녀원을 막 나온 열일곱의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 환희를 투영한다. 그 설레임, 그 막연한 진동. 모파상이 그려내는 그 점액질의 본능적인 삶에 대한 무모하고 막연한 기대감은 내가 처음 <여자의 일생>을 펼쳐든 그때를 다시 살려낸다. 그러니 나는 가능했다면 이렇게 열일곱의 잔느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공상, 몽상. 가끔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폭우를 뚫고 푀플의 아름다운 가족 소유 저택에 도착한 잔느는 마침내 교구 신부의 소개로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근사한 남편감 쥘리앵 자작을 만나 사랑에 빠져든다.

 

황혼은 짧았다. 별들이 촘촘히 박힌 어둠이 펼쳐졌다. 라스티크 영감이 노를 저었다. 바다가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잔느와 자작은 나란히 앉아  작은 배가 뒤에 남기는 이 움직이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 생각도 않고, 망연히 앞만 바라보며, 감미로운 안온함에 잠겨 저녁 기운을 마시고 있었다. 잔느의 손이 의자에 기대 있는 동안, 자작의 손가락 하나가 우연인 것처럼 그 위에 놓였다. 그녀는 이 가벼운 접촉에 놀라고, 행복하고, 당황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p.58

이 가슴을 떨게 하던 사랑도 막상 결혼 생활과 만난 남편의 비열하고 치졸한 이기심과 타성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심지어 그는 아내가 함께 젖을 먹고 자매처럼 자란 하녀 로잘리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기까지 한다. 이후 태어난 아들 폴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잔느는 남편이 자신과 친구처럼 지냈던 백작부인과 외도를 저지르다 그녀의 남편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 앞에서도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이동식 오두막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현장을 발각당해 장사 같은 백작의 손에 의해 송두리째 오두막이 구르는 광경의 묘사는 비장하다고 하기에는너무 희화적이서 웃음이 터졌다.

 

사람 좋은 친정 부모님들과 다시 함께 하게 되는 잔느의 삶은 다시 아들 폴을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결혼 이후 그녀의 주체적인 삶은 간데없다. 때로는 종교에 광적으로 몸을 맡기기도 하지만 모파상의 시선에서 조명된 종교의 그 적나라한 허점에 대한 공박은 그것마저 허무한 허구의 것으로 귀결되게 한다. 한없이 사랑했던 친정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며 어머니가 생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추억의 상자에서 어머니의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잔느의 절망은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과거와 겹쳐져 결혼 생활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회의로 이어진다. 모파상이 그려내는 삶은 잔느에게 그 어떤 단 하나의 희망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아니면 '삶'이라는 그 자체가 어쩌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저만치 굴러가 버리고 마는 바퀴 이상이 아닌 것 같다는 자각에 울울해지기도 했다.

 

그녀가 애지중지 길러 낸 아들 폴의 응답은 더욱 가혹하다. 그는 일찌감치 창녀와 돈 안 되는 사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끊임없이 잔느에게 돈을 요구하고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을 마음으로 독립시키지 못한 무력한 어미는 아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그의 정부를 미친듯이 질투한다. 잠시 종교에서 멀어졌던 잔느는 신이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을 질투한다고 느낀다. 인간의 감정으로 현현하는 것이 신인지도 모른다,는 모파상의 덧붙임은 잔느가 다시 사제에게 돌아가 조언을 청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 판단하지 못하고 상황과 타인이 이끌어 가는 대로 그녀 자신을 방기함으로써 더한 비극으로 치닿는다. 말미에 다시 돌아오는 하녀 로잘리의 훈수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층 더 그러하다. 옛 주인의 심복으로 아들에게 더이상 휘둘리지 않도록 단속하는 하녀의 모습은 물론 잔느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잔느의 삶이 잔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강화하는 하나의 실증 같아 더욱 불쾌하다.

 

아들의 정부가 죽으며 남긴 손녀딸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종의 환희를 느끼는 잔느의 모습은 조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 옛날 바람난 남편을 통해서라도 둘째 딸을 얻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그 처절했던 잔느의 무모하고 서글픈 시도는 마침내 아들에게서 소득을 얻는다. 경쟁자였던 아들의 정부는 죽고 이제 다시 집착과 애정을 기울일 대상을 손에 얻게 된 것이다. 하녀 로잘리가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 모파상의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아프다. 꿈을 꾸며 노래를 부르던 소녀가 다 시들고 약해빠진 노파가 되어 또다른 생명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그것은 하나의 희망으로서가 아닌 또다른 비극의 매개체가 되어 안긴다.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과 기대도 모조리 짓밟아 버리는 데에 이렇게 능숙한 묘파가 가능한 작가는 두 번 다시 나올 것 같지 않다. 그것 또한 삶의 또다른 절망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화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둘러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너무 아프다. 정말 그렇다. 그는 '희망'을 '기만'이상으로 독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각오를 담보한다. 이후 당신은 정말 우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해서 역설적으로 더욱 더 열심히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바로 모파상의 미덕이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의 플롯은 이미 우리 삶에서 태동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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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4-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업이나 취업에 실패하거나 실연당한 사람은 모파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인간의 어두운 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끝까지 파헤치니까요.<여자의 일생>을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권해서도 안 되겠죠.

blanca 2014-04-14 10:50   좋아요 0 | URL
모파상이랑 에밀 졸라가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대단히 현실적이고 음울하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여자의 일생>이 제목부터가 좀 청승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읽어보니 과연 오늘날이 모파상의 시대에서 진보를 이룬 것인가, 아직도 비슷한 면이 많구나, 싶었어요. 인간의 본성은 어떤 진보나 발전의 틀을 갖다 대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어두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졸라도 그렇고 모파상도 그렇고 여성의 심리나 내면을 대단히 섬세하게 잘 그렸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4-04-14 17: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졸라는 혁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담기도 했지만 모파상은 그런 것도 없는 완벽한 비관주의적 사실주의 작가죠.그래서 졸라는 드레퓨스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섰나봐요.

여성작가는 남성심리 묘사가 서투른데 남성작가는 여성심리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 많죠.왜 그런지 예전에 곰곰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blanca 2014-04-15 09:54   좋아요 0 | URL
노자님 얘기 듣고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네요. 남성의 심리를 잘 그리는 여성 작가는 언뜻 떠오르지가 않아요.

302moon 2014-11-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읽으려다 포기했었어요ㅎ 저는 단편이 더 좋더라고요

blanca 2014-11-29 00:25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을 포기했던 기억이 ㅋ 나네요. 모파상의 단편집도 사실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주거 정리 해부도감 - 정리수납의 비밀을 건축의 각도로 해부함으로써 안락한 삶을 짓다 해부도감 시리즈
스즈키 노부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더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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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갑자기  여러 가지 일들이 함께 몰아닥칠 때 효율적으로 그 일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아직 서툴렀던 나는 전화를 받다 상사에게 불려가 일감을 받고 또 손님을 받다 우왕좌왕 하다 외근까지 나가고 나면 마치 세네 명은 일하는 것 같은 지저분한 책상을 잔해처럼 뒤로 했다. 그런데 유독 책상이 얼음알 처럼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대체로 그 사람들은 '일 잘한다'는 평까지 받고는 했다. 결국 모든 능력은 교차하는 것일까, 하는 부러움에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종종 그들의 책상을 탐방했다. 말 그대로 '각 잡힌 자리'였다. 저 사람들은 타고난 걸까? 그냥 그때 그때 정리를 잘 하는 걸까? 아니면 몰아서 하는 걸까?

 

아이를 낳고 정리에 대한 능력은 본격적으로 시험을 받게 된다. 게다가 연령대가 층이 지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장난감을 정리하지 않을 이유가 너무 많아진다. 그러니 '버리기'로 정리를 시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큰 아이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처분해야 하는 유아 블럭이 둘째 아이는 지금 당장 가지고 놀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가지고 놀 가능성이 다분하니, 이런 식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물이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정당해 보인다. 게다가 현관! 아이 자전거, 아기 유모차, 미처 정리하지 못한 택배, 신발들. 방문객들은 오른팔로 유모차 손잡이를 밀어야 우리 집에 입성할 수 있다. 내 공간을 이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게다가 '정리'는 아주  묘하게 인간의 자괴감을 자극한다.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내 공간조차 안전하게 확보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쉰다'는 개념은 이미 '정리된 곳'을 전제하기에 또다른 노동이 앞서야 한다.

 

그러니 정리에 대한 필요와 욕구가 생길 때마다 나는 마치 정리를 하듯 열심히도 정리책을 읽는다. 그런데 최근들어 나오는 대부분의 정리서적은 '버린다'는 개념과 맞물려 있다. 막상 그 앞에서 심히 망설여야 하는 사람은 또다른 스트레스 섞인 과제를 부여받는다. 물론 이러한 지침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쌓아놓기'에만 충실한 사람은 반드시 귓등으로라도 한번쯤은 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잘 버릴 수 없는 사람은 또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버릴 수 없는데 어쩌지? 또 다 내 잘못인가, 하는.

 

이 책은 백오십 페이지도 안 된다. 게다가 일러스트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 다 읽어내는 데에 두세 시간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수납의 묘약을 던져 주는 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저자는 정리의 달인인 주부도 아니고 전문적인 정리 수납 컨설턴트도 아닌 좀 뜬금없는 건축가다. 집을 짓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정리 이야기라. 그런데 그의 시각에서 보는 '정리'와 '집'에 대한 이야기가 꽤 참신하고 청량하다. 소방법 때문에 복도에 유모차를 놓는 것이 꺼려져 현관에 들여놓고 스트레스 받고 있는 나에 대한 변명거리도 던져준다. 이는 현관을 단순히 손님이 들어오는 공간이 아닌 항구처럼 여러 물건들을 적재하고 수납하는 공간으로 겸용 사용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설계에서 기본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무리한 확장으로 흙이 묻어 집안에 들여놓기 힘든 것들의 자리를 앗아가는 대신 미리 집을 짓기 전부터 봉당이나 달개집을 염두에 두는 통찰에 대한 이야기. 즉 처음부터 애초부터 우리가 살며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부터 '정리'와 만나자는 주장이다. 전창이 주는 눈부신 햇살이 벽을 생략해 각종 수납 공간을 파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나 빨래를 건조할 실내 공간, 부엌의 각종 쓰레기가 과도기적으로 쉬고 갈 공간을 미리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아일랜드 식탁이 가지는 단점 등에 대한 예리한 지적 등은 대단히 실용적이다.

 

물론 이미 부족한 공간, 이미 없는 자리에서 떠밀려난 것들에 대한 해결책은 아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리 강박으로 좀 과도한 죄책감을 양산해 내는 데에 물린 사람이라면, 혹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면 흥미롭게 금방 읽어내고 소장할 만한 책이다.

 

아기 유모차는 여전히 현관에 떡 버티고 있지만. 그 모습이 좀 덜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 책의 미덕일까, 하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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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2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2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둘째를 낳고 2008년 첫째를 키우면서 작성한 메모를 훑어본다. 낮잠 시간, 이유식량, 육아를 책을 보고 하려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여덟 살의 자리에 엄마, 아빠가 세상 전부였던 낯가림이 심한 아가가 기어온다. 영원할 것 같았던 모습은 다이어리에 희미한 흔적처럼만 남아있다. 아쉽고도 또 아쉽다. 더 여유를 갖고 융통성 있게 순간을 즐기며 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그리고 더 많이 적어두지 못해 기억이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은 것도 아쉽다.

1851년 3주 동안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을 돌보며 썼던 이 일기는 자기 충족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작품으로 상당히 매력적이고, 무표정한 듯하지만 아주 재미있어서 호손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상을 줄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손을 음울하고 괴로움을 많이 겪은 인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으며, 품질 높은 시가와 한두 잔의 위스키를 좋아하고, 장난기 있고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 <작가란 무엇인가> 폴 오스터 편 중 

 

너새니얼 호손이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근 3주 동안 다섯 살짜리 둘째 아들 줄리언을 돌보며 적은 육아 일기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후 세대의 작가 폴 오스터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폴 오스터의 파리 리뷰 인터뷰 내용 중 언급된 이 일기는 내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이 뒤이어 번역되어 무척 기뻤다. 폴 오스터의 이야기처럼 무언가 좀 음울하고 기기묘묘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작가가 삼십 대 후반 늦은 결혼으로 얻은 사랑스러운 아들에 대하여 어떤 기록들을 남겼을까 무척 궁금했다. 1851년 마흔 일곱이나 된 아버지가 다섯 살 아들을 삼 주 동안이나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놀아주고 먹이고 재웠을까, 하는. 사실 요새 같이 아버지의 역할이 강조되고 각종 정보도 많은 시기에도 아버지가 홀로 사내아이를 돌보기란 쉽지 않다.

 

 

 

 

 

아침 일곱 시, 아내가 줄리언과 나를 붉은 농장에 남겨두고 처형 엘리자베스와 첫째 우나, 막내 로즈버드와 함께 집을 떠났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 애늙은이가 하는 말.

"아빠, 애기가 가니까 좋지 않아?"

 

자, 이렇게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는 개구진 다섯 살 사내 아이를 온전히 돌봐야 하는 과업을 수여받았다. 다행히 줄리언은 아홉 시가 되기 전에 잠들고 일곱 시 즈음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수면습관과 혼자서도 잘 놀고 가끔 함께 놀아주면 더없이 신나하는 아주 사랑스럽고 애교많은 아이다. 아이는 풀 위의 이슬을 '요정들이 작은 주전자를 기울여 풀과 꽃에 물을 부었다'고 묘사한다. 아이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는 <백경>의 허먼 멜빌 아저씨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말을 타고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틈에 멜빌과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 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여유도 누린다.

 

아버지는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아이의 재잘거림을 때로는 거추장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아이를 있게 한 아내와 아이를 더없는 축복으로 여기며 함께 한 시간들을 하나 하나 눌러쓴다. 매일 아침 아이의 머리를 말고 우유를 가지러 가고 산책을 하고 방문객을 맞는 단조로운 생활들은 갈급하게 하루씩 줄어들고 아내를 오망불망 기다리며 아이를 온전히 맡기고 자유로운 시간을 기대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은 할 수 만 있다면 아이가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해 두고 싶어했던 바람과 맞물려 눈물겹게 아름답고 정겹다.

 

나의 육아일기. 아직은 내 손 안의 여덟 살 아이와 7개월의 아기.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비처럼 쏟아지던 그 수많은 자질구레함들과 아이의 은성한 언어들은 가뭇없어질 것이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고 시간이 빨리 갔으면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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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3-2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바로 그 책이었군요! 아하.

blanca 2014-03-27 10:49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책 상세 설명 뜨기 전에 사실 무슨 책인가 했는데 제가 기다렸던 바로 그 책이었어요!

다락방 2014-03-27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요!

2014-03-27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03-29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를 엮은 책은 묘한 매력이 있어서 저도 좋아해요.
저도 시간에 대해서 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이젠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어요.
하루가 지나가는 것도 아쉬워요. 나 오늘 뭐 한 거지? 하면서... ^^

blanca 2014-03-31 10:04   좋아요 1 | URL
페크님, 부모님들과 어제 시간을 보냈는데 그냥 그 흘러가는 시간도 너무 아까운 거예요. 게다가 벚꽃. 이런 아름다운 꽃들을 나는 아무리 길게 봐도 이제 오십 번 이상 볼 수 있을까, 하니 또 슬프고... 이상해요. 봄을 타는 건지. 요새 자꾸 울컥 합니다.--;;
 

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 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인데!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이런 이야기. 노년. 그것은 마치 대학살과 같다고 되뇌었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37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제 겨우 서른셋인,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드디어 등장한다.

 

 

 

 

 

 

 

 

 

 

 

 

 

 

 

"자신이 가지지도 못할 미래를 위해 개처럼 일한" 보험 외판원 아버지와 끊임없이 가족 전체를 통제하고 자기기만의 장치로 모정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대인 아이 앨릭스는 부모의 억압, 통제에 대하여 시종일관 시니컬하게 불평한다. 그런데 그 주체는 정작 이미 서른 셋까지 성장해 버린,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아직 미혼이고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앨릭스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신병 주치의임 직한 '선생님' 앞에서 부모가 강압적으로 수여한 '유대인 아이'라는 정체성의 그 얄팍한 모순과 자기기만적인 주술에 대한 처절한 공박과 순종적이고 온순하고 명철한 유대인 소년 뒤의 찌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아들의 간식 메뉴까지 통제하려는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느라 나오지 않는 앨릭스의 내용물까지 확인해 보려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통렬한 익살. 그 속에는 '부모'라는 거대한 권력, 아니 우리 인간들이 문명화된 것으로 위장한 수많은 금기, 억제, 규율이 어떻게 하나의 진실을, 삶을, 생동을 억압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예시가 있다.

 

반면 하류층 출신의 여자를 성적인 노리개로 자신의 억압된 욕망의 환타지의 대체물로 (그러나 대단히 신랄하게 정당화하며) 이용하는 앨릭스의 이야기들은 그가 자신을 하나의 희생물이라고 변명하며 정작 자신의 사회적 권력으로 한 여자를 억압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여하튼 참으로 찌질한 녀석의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곳에 선 지점에서의 고백들.

 

화제가 되었던 선정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앨릭스의 사춘기 시절 자위에의 탐닉에 할애한 장들은 이 책을 두었다 아이들이 갑자기 읽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의 수위. 차분하고 고즈넉하게 노년기를 읊조렸던 필립 로스 할아버지가 삼십오년도 더 전에는 이러한 앨릭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한 당혹감, 놀라움, 그러나 그 앨릭스의 불평들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어쩌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를 자신의 청사진대로 만들고 자신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들을 대신 달성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욕구를 하나의 '사랑'이라 위장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주 위험한 부모로의 역할에서 균형감을 찾아야 한다는 엄중한 가르침.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자신들만의 이너써클을 만들고 정작 유색인종에는 교묘한 무시를 일삼는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도덕적 기만. 그러니 토가 나오는 '공정한 척, 착한 척'에 대한 가차없는 까발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고 솔직해지기는 대단히 어렵다. 덜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의 사회화 과정인 것처럼 오인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앨랙스의 불평 앞에서 누구나 얼마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회당의 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러시아의 공산주의자가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선언하고, 어머니가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대우한다고 위선을 떨었던 검은 청소부와 함께 식탁에 앉겠다고 주장했던 소년은 그러나 서른셋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열다섯의 소년이다. 이러한 부모와 자식 간의 건강하지 못한 공생 관계, 애착, 집착은 사실 서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서구 사회에서도 유독 이방인적인 것으로 우리의 끈끈한 부모, 자식 관계와 겹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단일 민족에 대한 자부심, 다른 인종에 대한 이질감, 거부감, 학업적 성취에 대한 높은 평가, 성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금기, 억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신나는 성토의 장에서 앨릭스는 그 잘 길들여짊에 대한 대가로 얻은 것들을 향유하며 뒤켠에서 성적 비행을 일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억압, 금기, 순종에 대한 반역, 부모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중언부언 불평만 늘어놓다 판을 치워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마침표가 없는 이야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것들은 마치 예언처럼 빨리 찾아오는 환멸과 종말 앞에 설 때 결국 돌아온다.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귀결은 이러한 것. 서른 셋임에도 부모 앞에서 열다섯이었던 아이는 망각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전에 일흔 다섯이 되어 '무'에 묻혀 버린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고 만 것. 필립 로스는 말한다. "저는 분명히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무진장 애쓰는 그런 주인공과 닮았지요."('작가란 무엇인가' 중 인용)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 무용한 시도들, 그 자체를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성과나 답이나 마침표가 없는 그 도정에 필립 로스가 말하는 '진실'이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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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4-03-20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 페이퍼를 읽고 보관함에 담습니다. 비록, 오래전에 사둔 에브리맨도 아직 못 읽었;;;
어흠, ;;; 저도 블랑카님처럼 읽고, 또 느끼고 싶어요.^^

blanca 2014-03-21 08:56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에브리맨이랑 함께 읽으면 정말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하고 의아해지실 거예요.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에브리맨이 더 좋았어요. 군더더기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잘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가 있구나,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