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정리 해부도감 - 정리수납의 비밀을 건축의 각도로 해부함으로써 안락한 삶을 짓다 해부도감 시리즈
스즈키 노부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더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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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갑자기  여러 가지 일들이 함께 몰아닥칠 때 효율적으로 그 일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아직 서툴렀던 나는 전화를 받다 상사에게 불려가 일감을 받고 또 손님을 받다 우왕좌왕 하다 외근까지 나가고 나면 마치 세네 명은 일하는 것 같은 지저분한 책상을 잔해처럼 뒤로 했다. 그런데 유독 책상이 얼음알 처럼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대체로 그 사람들은 '일 잘한다'는 평까지 받고는 했다. 결국 모든 능력은 교차하는 것일까, 하는 부러움에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종종 그들의 책상을 탐방했다. 말 그대로 '각 잡힌 자리'였다. 저 사람들은 타고난 걸까? 그냥 그때 그때 정리를 잘 하는 걸까? 아니면 몰아서 하는 걸까?

 

아이를 낳고 정리에 대한 능력은 본격적으로 시험을 받게 된다. 게다가 연령대가 층이 지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장난감을 정리하지 않을 이유가 너무 많아진다. 그러니 '버리기'로 정리를 시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큰 아이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처분해야 하는 유아 블럭이 둘째 아이는 지금 당장 가지고 놀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가지고 놀 가능성이 다분하니, 이런 식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물이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정당해 보인다. 게다가 현관! 아이 자전거, 아기 유모차, 미처 정리하지 못한 택배, 신발들. 방문객들은 오른팔로 유모차 손잡이를 밀어야 우리 집에 입성할 수 있다. 내 공간을 이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게다가 '정리'는 아주  묘하게 인간의 자괴감을 자극한다.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내 공간조차 안전하게 확보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쉰다'는 개념은 이미 '정리된 곳'을 전제하기에 또다른 노동이 앞서야 한다.

 

그러니 정리에 대한 필요와 욕구가 생길 때마다 나는 마치 정리를 하듯 열심히도 정리책을 읽는다. 그런데 최근들어 나오는 대부분의 정리서적은 '버린다'는 개념과 맞물려 있다. 막상 그 앞에서 심히 망설여야 하는 사람은 또다른 스트레스 섞인 과제를 부여받는다. 물론 이러한 지침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쌓아놓기'에만 충실한 사람은 반드시 귓등으로라도 한번쯤은 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잘 버릴 수 없는 사람은 또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버릴 수 없는데 어쩌지? 또 다 내 잘못인가, 하는.

 

이 책은 백오십 페이지도 안 된다. 게다가 일러스트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 다 읽어내는 데에 두세 시간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수납의 묘약을 던져 주는 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저자는 정리의 달인인 주부도 아니고 전문적인 정리 수납 컨설턴트도 아닌 좀 뜬금없는 건축가다. 집을 짓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정리 이야기라. 그런데 그의 시각에서 보는 '정리'와 '집'에 대한 이야기가 꽤 참신하고 청량하다. 소방법 때문에 복도에 유모차를 놓는 것이 꺼려져 현관에 들여놓고 스트레스 받고 있는 나에 대한 변명거리도 던져준다. 이는 현관을 단순히 손님이 들어오는 공간이 아닌 항구처럼 여러 물건들을 적재하고 수납하는 공간으로 겸용 사용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설계에서 기본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무리한 확장으로 흙이 묻어 집안에 들여놓기 힘든 것들의 자리를 앗아가는 대신 미리 집을 짓기 전부터 봉당이나 달개집을 염두에 두는 통찰에 대한 이야기. 즉 처음부터 애초부터 우리가 살며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부터 '정리'와 만나자는 주장이다. 전창이 주는 눈부신 햇살이 벽을 생략해 각종 수납 공간을 파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나 빨래를 건조할 실내 공간, 부엌의 각종 쓰레기가 과도기적으로 쉬고 갈 공간을 미리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아일랜드 식탁이 가지는 단점 등에 대한 예리한 지적 등은 대단히 실용적이다.

 

물론 이미 부족한 공간, 이미 없는 자리에서 떠밀려난 것들에 대한 해결책은 아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리 강박으로 좀 과도한 죄책감을 양산해 내는 데에 물린 사람이라면, 혹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면 흥미롭게 금방 읽어내고 소장할 만한 책이다.

 

아기 유모차는 여전히 현관에 떡 버티고 있지만. 그 모습이 좀 덜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 책의 미덕일까, 하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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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2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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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2 13: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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