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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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던가. 학급문고라는 것이 있어 각자 집에서 가져온 책들로 작은 도서관을 꾸몄었다. 그 때 <여자의 일생>을 집어와 몇 번이나 읽어보려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의 문제였던지 아니면 고작 열다섯 언저리였던 나의 시선이 차분히 머물지 못해서였던지 이 책은 번번히 나를 비껴갔다. 통속적인 제목과 통속적인 여인네의 삶이 한창 세상 전체가 언제든 나의 손으로 조물딱 조물딱 하여 나의 꿈대로 변형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나의 치기와 어우러지지 못했다. 나는 아주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서글픈 수동적인 삶과는 공통분모가 찾아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던 것도 같다.

 

다시 새로운 여자의 일생을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낳은 내가 읽는다. 이백 년도 더 되는 시차. 시골 귀족의 외동딸 잔느. 수녀원을 막 나온 열일곱의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 환희를 투영한다. 그 설레임, 그 막연한 진동. 모파상이 그려내는 그 점액질의 본능적인 삶에 대한 무모하고 막연한 기대감은 내가 처음 <여자의 일생>을 펼쳐든 그때를 다시 살려낸다. 그러니 나는 가능했다면 이렇게 열일곱의 잔느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공상, 몽상. 가끔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폭우를 뚫고 푀플의 아름다운 가족 소유 저택에 도착한 잔느는 마침내 교구 신부의 소개로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근사한 남편감 쥘리앵 자작을 만나 사랑에 빠져든다.

 

황혼은 짧았다. 별들이 촘촘히 박힌 어둠이 펼쳐졌다. 라스티크 영감이 노를 저었다. 바다가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잔느와 자작은 나란히 앉아  작은 배가 뒤에 남기는 이 움직이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 생각도 않고, 망연히 앞만 바라보며, 감미로운 안온함에 잠겨 저녁 기운을 마시고 있었다. 잔느의 손이 의자에 기대 있는 동안, 자작의 손가락 하나가 우연인 것처럼 그 위에 놓였다. 그녀는 이 가벼운 접촉에 놀라고, 행복하고, 당황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p.58

이 가슴을 떨게 하던 사랑도 막상 결혼 생활과 만난 남편의 비열하고 치졸한 이기심과 타성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심지어 그는 아내가 함께 젖을 먹고 자매처럼 자란 하녀 로잘리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기까지 한다. 이후 태어난 아들 폴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잔느는 남편이 자신과 친구처럼 지냈던 백작부인과 외도를 저지르다 그녀의 남편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 앞에서도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이동식 오두막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현장을 발각당해 장사 같은 백작의 손에 의해 송두리째 오두막이 구르는 광경의 묘사는 비장하다고 하기에는너무 희화적이서 웃음이 터졌다.

 

사람 좋은 친정 부모님들과 다시 함께 하게 되는 잔느의 삶은 다시 아들 폴을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결혼 이후 그녀의 주체적인 삶은 간데없다. 때로는 종교에 광적으로 몸을 맡기기도 하지만 모파상의 시선에서 조명된 종교의 그 적나라한 허점에 대한 공박은 그것마저 허무한 허구의 것으로 귀결되게 한다. 한없이 사랑했던 친정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며 어머니가 생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추억의 상자에서 어머니의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잔느의 절망은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과거와 겹쳐져 결혼 생활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회의로 이어진다. 모파상이 그려내는 삶은 잔느에게 그 어떤 단 하나의 희망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아니면 '삶'이라는 그 자체가 어쩌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저만치 굴러가 버리고 마는 바퀴 이상이 아닌 것 같다는 자각에 울울해지기도 했다.

 

그녀가 애지중지 길러 낸 아들 폴의 응답은 더욱 가혹하다. 그는 일찌감치 창녀와 돈 안 되는 사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끊임없이 잔느에게 돈을 요구하고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을 마음으로 독립시키지 못한 무력한 어미는 아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그의 정부를 미친듯이 질투한다. 잠시 종교에서 멀어졌던 잔느는 신이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을 질투한다고 느낀다. 인간의 감정으로 현현하는 것이 신인지도 모른다,는 모파상의 덧붙임은 잔느가 다시 사제에게 돌아가 조언을 청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 판단하지 못하고 상황과 타인이 이끌어 가는 대로 그녀 자신을 방기함으로써 더한 비극으로 치닿는다. 말미에 다시 돌아오는 하녀 로잘리의 훈수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층 더 그러하다. 옛 주인의 심복으로 아들에게 더이상 휘둘리지 않도록 단속하는 하녀의 모습은 물론 잔느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잔느의 삶이 잔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강화하는 하나의 실증 같아 더욱 불쾌하다.

 

아들의 정부가 죽으며 남긴 손녀딸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종의 환희를 느끼는 잔느의 모습은 조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 옛날 바람난 남편을 통해서라도 둘째 딸을 얻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그 처절했던 잔느의 무모하고 서글픈 시도는 마침내 아들에게서 소득을 얻는다. 경쟁자였던 아들의 정부는 죽고 이제 다시 집착과 애정을 기울일 대상을 손에 얻게 된 것이다. 하녀 로잘리가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 모파상의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아프다. 꿈을 꾸며 노래를 부르던 소녀가 다 시들고 약해빠진 노파가 되어 또다른 생명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그것은 하나의 희망으로서가 아닌 또다른 비극의 매개체가 되어 안긴다.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과 기대도 모조리 짓밟아 버리는 데에 이렇게 능숙한 묘파가 가능한 작가는 두 번 다시 나올 것 같지 않다. 그것 또한 삶의 또다른 절망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화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둘러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너무 아프다. 정말 그렇다. 그는 '희망'을 '기만'이상으로 독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각오를 담보한다. 이후 당신은 정말 우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해서 역설적으로 더욱 더 열심히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바로 모파상의 미덕이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의 플롯은 이미 우리 삶에서 태동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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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4-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업이나 취업에 실패하거나 실연당한 사람은 모파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인간의 어두운 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끝까지 파헤치니까요.<여자의 일생>을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권해서도 안 되겠죠.

blanca 2014-04-14 10:50   좋아요 0 | URL
모파상이랑 에밀 졸라가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대단히 현실적이고 음울하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여자의 일생>이 제목부터가 좀 청승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읽어보니 과연 오늘날이 모파상의 시대에서 진보를 이룬 것인가, 아직도 비슷한 면이 많구나, 싶었어요. 인간의 본성은 어떤 진보나 발전의 틀을 갖다 대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어두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졸라도 그렇고 모파상도 그렇고 여성의 심리나 내면을 대단히 섬세하게 잘 그렸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4-04-14 17: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졸라는 혁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담기도 했지만 모파상은 그런 것도 없는 완벽한 비관주의적 사실주의 작가죠.그래서 졸라는 드레퓨스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섰나봐요.

여성작가는 남성심리 묘사가 서투른데 남성작가는 여성심리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 많죠.왜 그런지 예전에 곰곰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blanca 2014-04-15 09:54   좋아요 0 | URL
노자님 얘기 듣고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네요. 남성의 심리를 잘 그리는 여성 작가는 언뜻 떠오르지가 않아요.

302moon 2014-11-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읽으려다 포기했었어요ㅎ 저는 단편이 더 좋더라고요

blanca 2014-11-29 00:25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을 포기했던 기억이 ㅋ 나네요. 모파상의 단편집도 사실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