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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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전을 다 씹어 먹으면 그 단어들을 다 외울 수 있어. 그 사람은 정말 다 씹어먹었다니까.

 

정말 한번 한 장만 먹어볼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가 종이를 장난으로 가끔 먹어보기도 했지만 사전의 그 얇은 지질의 종이를 몇 백장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으니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친구와 맞바꾼 영어 사전을 부지런히 찾았다. 그러면서 사전은 내 손에 길이 들어 모르는 단어를 어느날 한번에 펼쳐 찾는 그 사소한 행운에 놀라기도 했다. 이제 모르는 영어 단어가 나오면 대신 인터넷 검색을 한다. 편리하기도 하지만 그 손으로 내가 찾던 단어를 지목하며 그 주변부의 숱한 단어들을 우연히 맞닥뜨리는 그런 묘한 경험은 과거가 되었다. 딱 내가 궁금한 그 단어만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세계는 점점 더 내 본위로 좁아져 간다.

 

사전을 만든 사람들. 듣기만 해도 설명하기 힘든 묘한 친근감, 경외감이 든다.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과는 또 다른 지점에서 끌어당긴다.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모든 어휘를 다 설명하려 했던 그 지난한 시도와 여정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하나 하나 정복해 나가며 가능한 최대치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과정이었다. 19세기 중반 시작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은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보낸 작가들이 문학 작품에서 사용한 어휘의 인용문 수집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돈을 받거나 어떤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닌데도 수많은 지원자들이 속출했고 물론 중간에 그만둬 버리거나 책임감 없이 행동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그 지난한 편찬 과정에 무보수로 동행한 많은 이들이 있었고 언어학자보다 더 심도 있고 적확하게 그 어휘가 최초로 쓰인 문학 작품을 찾아 인용하여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완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원봉사자 닥터 마이너와 사전의 편찬 작업을 전두 지휘했던 편집인 제임스 머리의 우정이 있었다. 그 둘은 닮은 외모, 비슷한 연배였지만 국적도 성격도 삶의 여정도 천양지차여서 사전 편찬이라는 공통된 화두가 없었다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전의 자원봉사자와 편집인으로 만난 둘은 서신 교환으로만 접촉하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나서야 서로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의날실과 씨실에 파고든 공적인 역사보다 더 끈질기고 드라마틱하고 비참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적인 연대기가 얽혀 있다.

 

충실하게 사전의 편찬 역사에 동행했던 자원 봉사자 닥터 사이먼에게는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다. 그는 상류층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 북군의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후에 정신병이 발병하여 전역한 후 건너간  런던에서 망상에 사로잡혀 가난한 한 집안의 가장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로 그는 사회와 격리되어 정신 병원의 수용소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여기에서 그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로 얻은 독특한 자유와 장서로 영국의 영어 사전 편찬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장서를 동원하여 성실하게 본인이 직접 만든 작은 어휘집에 제임스 머리가 요청한 어휘들의 용례를 충실히 수집해 주옥 같은 자료를 정기적으로 꾸준히 보내게 된다. 끊임없이 성적 망상에 사로잡히면서도 그의 성실함, 언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천착의 깊이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완성하는 데에 혁혁한 역할을 하게 된다. 편집인 제임스 머리는 이 성실하고 명민한 자원 봉사자에 대한 깊은 경탄과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되고 그가 정신병자에 살인까지 저질러 감금되다시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면회와 서신 교환을 중단하지 않고 심지어 노년기에 접어든 닥터 사이먼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충실한 친구의 역할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70년도 넘는 세월에 걸쳐 50만 개가 넘는 어휘의 정의와 역사, 용례를 담아 내어 '영어'의 위상을 재정립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이런 두 사내의 우정과 상호존중, 신뢰가 있었기게 가능한 것이었다. 저자는 더불어 닥터 마이어가 죽인 젊은 아버지 조지 메리트의 잊혀진 삶을 추적하고 이 책의 제사를 그에게 바침으로써 이 익명의 희생자가 될 뻔한 사전 편찬의 사연에 숨어 든 한 남자를 살려낸다.

 

일어났던 모든 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일들. 윌리엄이 런던에 건너가 살인을 저지르고 수용소에 감금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우리 앞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편지를 제임스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사전 작업에 활용하지 않았다면, 혹은 후에 그의 무서운 배경을 알아차리고 그와의 접촉을 끊었더라면, 그 작은 하나의 가정들이 모여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슬 고리마다 저자의 사려 깊고 세심한 시선은 가 닿아 그 모든 퍼즐 조각들이 맞춤하게 맞아 떨어져 그려 낸 그림을 그려낸다. 한 가여운 남자의 죽음, 그리고 두 남자의 편견과 계급을 뛰어 넘은 우정을 가로질러 마침내 그 모든 언어들의 태어나 자라 살고 죽은 그 유장한 역사가 남게 된 것이다.

 

사전을 다 먹어버리고 마침내 그 모든 언어를 다 머릿속에 넣어버렸다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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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6-2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다시 새로 나왔나 봐요. 예전에 나왔었는데...
블랑카님 <행복한 사전>이란 영화 보셨나요?
혹시 안 봤으면 한번 보세요.
진짜 사전 만드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워요.
줄리언 반즈도 사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다잖아요.^^

blanca 2016-06-27 18:1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안 그래도 그 영화 좋다 해서 봐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이 참에 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이 책이 개정판이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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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언어의 그물코는 듬성해서 때로 많은 것을 놓치고 현실과 유리된다.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공허해진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원하지 않게 된다면 때로 현실이 이야기보다 더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도 이어져 나가고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면서도 그 사슬 고리를 결코 끊어버리지 않는다는 엄혹한 진리를 이야기가 외면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거나 만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윌리엄 트레버는 달랐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우리 청자들의 갈급함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그의 이야기는 삶과 철저히 닮아 있으면서도 삶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유치하게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고 제 갈 길을 유유히 간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읽다가 멈춘다면 반칙 같다. 그의 이야기를 읽는 행위 자체가 삶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첫 이야기의 첫 문장은 수수께끼 같다. "바이얼릿은 피아노 조율사가 젊은 시절에 결혼했다. 벨은 그가 늙었을 때 결혼했다." 다시 돌아가 읽는다. 그러다 거의 한 대목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조율사의 아내들>의 이 첫 문장을 이해한다. 늙은 맹인 피아노 조율사는 아내 바이얼릿과 사별한 후 비로소 자신을 내도록 지켜보았던 벨과 재혼한다. 이제 이미 죽어버린 바이얼릿과 살아 있는 벨은 한 남자를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바이얼릿은 남편에게 세상을 묘사하는 눈의 역할을 맡아 세상 그 자체의 인상을 자신의 눈과 언어로 만들어 조율사에게 각인시켜 놓는다. 맹인이 보는 세상은 아내 바이얼릿이 묘사한 그것이었다. 벨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섭섭하고 괴로운 일이다. 남편은 죽은 아내의 눈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벨을 아프게 한다. 트레버의 위트는 날카롭다. "살아 있는 사람이 늘 이기는 법"이라는 그의 말은 벨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이야기는 더 젊은 더 나은 시절의 남편을 소유했던 전처 바이올렛의 이점이니 말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비로소 동등해지는 것일까.

 

트레버의 노부부들에게는 찬란한 시절, 어려운 시간들을 통과한 삶의 동지애적 유대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하나뿐인 아들이 동성애자로 나이 든 남자가 남겨준 재산으로 먹고 살며 자신의 생일날에도 건달 같은 친구를 대신 보내 부모가 아끼는 물건들을 훔쳐가더라도 <티머시의 생일>, 딸이 아버지의 늙고 무능력한 한량 친구와 사랑에 빠져도 <데이미언과 결혼하기>, 그들은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슴앓이는 해봐야 소용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기력한 체념과도 또 다르다. 교통사고처럼 벌어지는 비보들 앞에서 시간과 세월의 무게는 때로 지혜가 된다. 아등바등 안달하고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을 뒤집어 보려 억지로 삶과 겨루려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것에는 그들이 낳았지만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식이 포함된다.

 

실연하고 어린 시절 묵었던 숙소 '펜시오네 체사리나'에 홀로 체류하게 된 젊은 해리엇 <비온뒤> 도 남편의 외도를 눈치챘지만 그가 어쩌면 낳아 올지도 모를 혼외 자식이 성장하는 미래를 그려보며 저녁을 준비하는 중년의 레스웨스 부인 <하루> 도 고통스러운 상실과 결핍에 압도되는 대신 묵묵히 평범한 하루로 돌아오고 내일로 걸어들어간다. 현실의 엄혹한 진실의 핵에 가 닿을 때 비수처럼 찌르는 그 칼끝도 결국은 살아내는 일 앞에서 무뎌지는 것임을 트레버는 담담히 변주한다.

 

사는 것은 때로 비루하고 치사하고 비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결국은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윌리엄 트레버의 결곡하고 간명한 음성으로 듣는 일은 그러한 삶의 막간을 채우는 아름답게 채우는 일이다. 충분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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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6-1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을 던지시다니
읽고싶어지네요^^

blanca 2016-06-17 15:00   좋아요 0 | URL
이것은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단편의 정점은 카버,체호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트레버로 바꾸렵니다.

시이소오 2016-06-17 15:48   좋아요 0 | URL
저역시 단편의 정점은 카버,체홉이라고 여겼는데요. 우와,읽고시포라ㅎ ㅎ

단발머리 2016-06-1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트레버라는 작가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예요.
정영목 번역자님이 더 눈에 띄네요. (우리의 필립 로스^^)
진짜 별 다섯인가요?
그럼 저도..... ㅎㅎㅎㅎ

blanca 2016-06-17 15:01   좋아요 0 | URL
영미권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작가인데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로 알아요. 저도 처음 만났는데 과장 좀 해서 너무 놀라웠어요. 저도 좋아하는 번역가인데 이번 책에는 몇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직역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트레버의 문장 자체가 그런 것인지 몇 번을 되풀이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양철나무꾼 2016-06-1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추천인데다가 정영목 님의 번역이라니, 저도 당근 장바구니로 직행입니다.
정영목 님이라면 꼼꼼한 번역으로 출판가에서 소문이 자자하다죠.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출판사 사장님께서 이분이랑 작업을 해봤는데,
좀 대충 빨리 하자고 해도, 시종일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신답니다.
덕분에 제가 아는 사장님도, 그때 이분도 주머니가 아주 홀쭉하셨다는데...지금은 어떠시려나 모르겠네요~^^

이런 분들의 처우가 개선 되어야, 우리나라 출판, 번역 계의 앞날이 밝을텐데 말이죠~--;

blanca 2016-06-18 13:45   좋아요 0 | URL
아, 트레버 할아버지 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하네요. 필립 로스와 더불어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라는 전범이 되어 줄 것 같아요.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들이 좀 경제적으로 너무 시달리지 않아서 쓰고 번역하고 노래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자목련 2016-06-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곁에 둔 책인데, 더 빨리 읽게 만드는 리뷰네요.

blanca 2016-06-21 17:11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은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이런 작가라니, 정말 어디 숨어 있다 이제 나오셨는지... 그런데 이미 충분히 유명한 작가였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6-07-04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앤 타일러와 줄리언 반스라는 대가들의 신작이 나와 꼭 잔칫날 같아요. 앤 타일러는 작년 이맘때 푸른 실타래를 내고서 한동안 신작이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지난주에 한 권이 출간되어 얼른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그 필력이 마치 이런 것은 수천 번도 더 써보았다는 양 당당하게 스타일을 유지해서 역시나, 싶어요. 우디 알렌, 앤 타일러, 줄리언 반스, 필립 로스(더이상 신작을 쓰지 않지만..) 이 작가들의 글을 천천히 읽고 있어요. 이 책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생각해 봤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에 아마존과 동네 서점을 뒤적일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blanca 2016-07-04 08:25   좋아요 0 | URL
저는 앤 타일러는 못 읽어봤는데 좋은지 궁금하네요. 아, 전 우디 알렌의 영화도 너무 좋아요! 쟌느님, 혹시 <블루 자스민> 보셨어요? 필립 로스는 대중 강연도 안 한다고 선언했다는데 왜 그런지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어요. (마치 아는 사람처럼 ) 쟌느님 어디 사시는 지 궁금하네요. 어디 살아도 잔느님 계신 곳은 여기보다 한뼘 쯤 더 근사해 보인다고요.^^;;

Jeanne_Hebuterne 2016-07-07 22:00   좋아요 0 | URL
blanca님, 앤 타일러는 제게는 미국의 박완서 같은 느낌이에요. 두 사람 다 수다를 뼈대를 가진 이야기로, 옛시절의 향수와 그분들이 살았던 무섭게 추운 겨울, 숨막히게 더운 여름을 생동감 있게 살려내곤 하거든요. 박완서의 글을 읽으면 늘 창밖 어딘가에 찹쌀떡이나 군밤장수가 있을 것만 같고, 앤 타일러를 읽으면 음악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 트럭이 지나가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요.
블루 자스민, 봤지요! 기본 아이템은 좋은 걸로 살수록 좋다는 교훈(샤넬 트위드 자켓을 야무지게도 돌려 입더라고요 호호)은 둘째치고, 우디 알렌 특유의 인물을 수렁에 빠져들게 하는 개미지옥같은 솜씨라니...젊은 시절 순이와의 스캔들에 대해 물어보니, 미국인들도 난감해 하더라고요. 그래, 정말 미친짓이었지..관계도 깨어버리고 여간해서는 벌일 수 없는 짓이었잖아? 용서받아선 안될 일이었어. 그런데 그게 또, 그래도 우디 알렌이잖아? 어쩌겠어.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 양반의 세계가 얼마나 독보적인지가 보이더라고요. 스캔들과 영화라는 작업의 접점보다는, 한 개인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난꾸러기 같은 그의 영화가 정말 좋아요. 히힛

제가 사는 곳은요, 길에 사슴도 다니고 아이스크림 트럭도 다녀요. 스컹크, 너구리, 엄마 사슴, 아기 사슴, 고양이도 길에서 봤지 뭐여요. 햇빛이 타들어가고 밤은 서늘하죠. 그치만 언제나 일상은 무채색이고 반짝임은 찰나같아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그리운 블랑카님? 늘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6-07-08 16:16   좋아요 0 | URL
호옥시...텍사스 주 오스틴 아닌가요? 두근두근 ㅋㅋ 아, 쟌느님이 박완서에 비유해 주시니 앤 타일러의 색깔이 확 와닿으면서 빨리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2016-07-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히려 번역이 별로인 것 같더군요. 트레버 팬이 되셨다면 이 책보다는 현대문학 세계단편 15번째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을 추천합니다. 저는 현대문학 버전으로 트레버를 먼저 만나고 최근에 이 책을 읽었는데....<비 온 뒤>에서는 이상하게 문장이 읭? 스러운 부분이 많더라고요.

blanca 2016-07-23 19:34   좋아요 0 | URL
아, 잠자냥님, 꼭 읽어볼게요.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곧 주문해야겠습니다.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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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그곳의 참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인간이 강제한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견디어 낸 시간은 삶의 자기회복력의 세례를 받아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개별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견디어내고 살아남았다고 섣불리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 기억은 그 인간들을 마주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 자체의 의미를 뿌리부터 흔든다.

 

그러나 <운명>은 여타 다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증언의 어조와 달랐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열네 살 소년이다. 회상의 형식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한창 가족의 따뜻한 보호 아래 공부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소년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노역을 다니다 그 출근 버스에서마저 끌려 내려와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 공부하지 않고 삶을 위해 공부한다."였다.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반드시 공부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4

 

열네 살 소년은 울지 않았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아이처럼 징징대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성실히 하루 하루 수용소 생활을 해나갈 따름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주변 풍광, 그를 둘러싸고 수용소의 질서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어른들, 같은 수용소 안의 또래 소년들, 때로 항상 배고픈 그에게 대가 없이 빵을 주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격려하는 멘토 같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수용소의 풍경은 마치 우리가 가진 삶의 일상처럼 흘러간다. 소년도 때로 그 점에 놀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하루 하루를 힘들지만 엮어 나가며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쳐 있는 수용소의 의사에게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까도 생각했다.

 

그는 일년 여의 수용소 생활을 종전으로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귀가하다 대신 전차 요금을 내어 준 어른에게 고국의 부다페스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증오심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른도 아닌 아이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 수용소에서 노역을 시키고 인간이하의 대우를 일삼는 것을 방조한 자신의 고국에 대하여 아이는 증오를 느낀다. 끔찍한 기억을 다 잊으라는 동네 어른들의 조언에는 반발한다.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고.

 

소년이 돌아올 곳은 해체되고 없었다. 아버지는 죽고 새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러나 노을지는 저녁 거리에서 생모를 찾아 가며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가 이 시간대를 수용소에서도 가장 좋아했다,고 회고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장엄하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계속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를 지키기 위하여 소년은 나아간다. 어른들의 잔인한 도발로 소년의 삶은 파괴되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살아 귀환한 자의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성장에 대한 기대가 어쩐지 눈물겨웠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이야기의 회고인 이 이야기가 그가 후에 소년 시절 겪은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순탄치 않은 삶을 이어가야 했음을 알고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생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그 자신이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단지 외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타인의 존재와 그에게 주어진 생 전부를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예시가 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p.284

 

언제나 삶에는 짐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과장하지 못하겠다. 느낌도 짐작도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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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5-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혹시 영화 사울의 아들 보셨어요? 비르케나우 배경으로 한 영환데 영화 기법(잘은 몰라도)과 더불어 아우슈비츠의 삶을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어떤 방식에 대한 고민거리와 더불어... 굴라그 배경의 문학작품들도 떠올리게 되고요. 다르지만... 아직 운명 초반부밖에 읽지 못했는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blanca 2016-05-24 20:4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댓글 보고 찾아보니 아주 평이 좋네요. 아쉽게도 아직 못 봤는데 줄거리 보니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요. 이제 너무 참혹하거나 슬픈 영화는 차마 볼 수가 없어요. 홀로코스트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교롭게 여러번 접하게 되는데 결국은 절망으로 귀결되서 자꾸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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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예술 작품들이 악을 형상화한다. '선'에는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게 없다. 경로도 한정되어 있다. 기대치도 있다. 평면적이다. 그러나 악은 바닥도 경계도 없다.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에게는 끝도 없는 상승보다는 미담보다는 무한추락과 비극과 범죄 이야기가 더 가깝다. 그게 엄혹한 현실이다. 사람을 믿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이야기에는 그렇게 태어난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화자가 되어 자신을 설명하지만 그의 악행은 설득력도 이해도 얻기 힘들다. 단지 그렇게 타고 난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이 근거일 따름이다. 정신병,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면죄부라기보다는 그의 범죄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양육 과정이 아들의 삶을 통제하고 아들의 꿈을 파기하여 결국 아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실패로 결론이 난 어머니는 그리고 그들과 같은 여자들은 이 청년의 잔인하고 무감각한 악행의 조준점이 된다.

 

이 불편한 이야기의 경로에는 가파른 호흡을 물고 적확한 언어를 찾아 분투했을 작가의 지난한 시도와 그 시도의 궤적이 있다. 그가 이야기가는 인물들의 개연성, 관계, 매력을 떠나 그들의 어떤 행동도 정유정의 손끝에서 나온다면 살아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소설적 언어의 지루함도 종이의 그 생래적 한계도 그녀 앞에서는 밀려나간다. 읽는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이 남자의 범죄 현장에 동행하며 어느덧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바로 손 닿을 만한 거리에서 느끼며 멈칫하게 된다. 그 현장에서 말 없이 그의 행동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덧 공범이 된 듯한 죄책감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악행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개입할 자신이 없는 비겁함이 들킨 때문일까. 그를 끝까지 말리려 하다 결국 죽게 되는 형을 대신하는 존재였던 친구의 모습에는 우리가 용감한 시민이 되지 못하게 되는 어떤 참조점이 말라붙어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미 한계와 거리를 가지고 시작하는 관계, 형제에 대한 묘한 경쟁심, 그리고 죽음, 일을 저지르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양가적 감정, 이미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묘한 긴장 관계에서 시작하는 통제권을 가지고 싸우는 과정 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닫힌 가정 안에서 일어나다 마침내 밖으로 비어져 나와 애꿎은 희생양을 만드는 비극.

 

이러한 이야기는 이제 이야기에서도 현실에서도 낯익은 것이 되어버렸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으로 그들을 한정하는 것은 그러한 악행을 감치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동어반복적으로 완성시키고 끝내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어쩔 수 없어. 이미 그랬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당분간 나이가 들 때까지 격리시켜 버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거야. 그럼 그런 애가 나의 아이가 된다면? 우리 가족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의 결론은 또 다른 물음표와 말줄임표로 가고 만다. 인간의 악은 그렇게 동어반복적이고 자기복제적으로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야기는 남의 것으로 소비되고 나의 것이 되어버리면  추방된다.

 

어두운 이야기의 슬픈 결말은 출구가 없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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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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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베네수엘라가 3년 새에 열악한 공중보건으로 신생아 사망률이 백프로 증가했다는 외신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주장했던 정부의 붕괴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예측 변수가 '높은 유아 사망률'이라는 지적의 예증 같다. 이는 저자의 말처럼 높은 유아 사망률이 정부가 허약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얘기라는 것과 통한다. 지금 베네수엘라는 국가의 역할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이라고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유독 이 책에서 열대국가들의 문제를 공중 보건 정책의 관점에서 조명한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얘기인 셈이다.

 

<총,균.쇠>의 저자로 각광받은 저자는 언뜻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어려운 얘기를 하는 석학으로 비쳤다.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이 그러한 선입견을 깨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지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대단히 광활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노교수의 육성이 들리는 듯할 정도로 생생하고 쉽고 지루하지도 않다.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테러와 환경 오염이 심화되는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저자의 식견에 근거한 해법은 사변적이지 않으면서 진지하고 통찰적이다. 저자가 지리학 교수인 만큼 지리학적 위치가 어떻게 그 나라의 경제와 제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결론적으로 부의 불균형을 낳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중국과 유럽의 원정대를 비교하며 결국 중국이 세계의 선두적 위치를 차지했을 수도 있었을 과거의 기회를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에 역사적 분석도 인상적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오히려 여기에서 '사공이 많아 배는 계속 나갈 수 있었다'로 치환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정화의 원정대는 황제가 함대의 파견을 중단하는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반면에 유럽의 원정대는 여러 통치권자들의 지원을 선택적으로 받을 수 있어 계속 이어져서 세계 정복의 동인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편 현대의 중국의 영향력과 미래 전망에 대한 모호하고 상대적으로 짧은 언급이 아쉬웠다.

 

'건설적 편집증'이라는 저자의 용어는 꼭 국가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개인의 삶에 적용할 만한 지침이 된다. 현대인들은 테러, 전쟁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은 과대평가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음주, 흡연, 낙상 같은-은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은 개인 생활에서의 위기 관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조언이 된다.

 

현대의 각종 테러, 난민 문제를 세계적인 경제적 불평등 문제로만 단순화하여 선진국의 경제 원조와 지원의 해법을 제시한 것은 문제를 평면적으로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당연히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다 보니 다른 안전하고 풍족한 국가를 공격하거나 그곳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에 난민이 되고 테러를 가한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의 국민들을 잠재적 난민과 테러분자로 낙인 찍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개인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들보다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반드시 무겁고 어렵게 이야기되지 않아도 된다,는 전범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위기 문제의 해결이 개인의 삶에서의 위기 상황 타개에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부분을 여러 예시와 접목시켜 보여주는 대목은 개인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문제 해결과 역사의 과정이 분리될 수 없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방식에 어떤 노력과 시도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지점은 결국 닮아 있다,고 느끼게 한다.

 

'일인당 평균 인간영향'이라는 용어는 한 사람이 소비하는 평균 자원량과 생산하는 평균 폐기물량을 뜻한다고 한다. 이것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화석연료 소비와 비례하므로 결국 지구온난화를 부추기게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살면서 소비하고 쏟아내는 모든 것이 지구를 황폐화하는 데에 일조를 담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매주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한 가족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지 놀라게 된다. 내가 지구를 차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적게 소비하고 적게 오염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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