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사전을 다 씹어 먹으면 그 단어들을 다 외울 수 있어. 그 사람은 정말 다 씹어먹었다니까.

 

정말 한번 한 장만 먹어볼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가 종이를 장난으로 가끔 먹어보기도 했지만 사전의 그 얇은 지질의 종이를 몇 백장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으니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친구와 맞바꾼 영어 사전을 부지런히 찾았다. 그러면서 사전은 내 손에 길이 들어 모르는 단어를 어느날 한번에 펼쳐 찾는 그 사소한 행운에 놀라기도 했다. 이제 모르는 영어 단어가 나오면 대신 인터넷 검색을 한다. 편리하기도 하지만 그 손으로 내가 찾던 단어를 지목하며 그 주변부의 숱한 단어들을 우연히 맞닥뜨리는 그런 묘한 경험은 과거가 되었다. 딱 내가 궁금한 그 단어만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세계는 점점 더 내 본위로 좁아져 간다.

 

사전을 만든 사람들. 듣기만 해도 설명하기 힘든 묘한 친근감, 경외감이 든다.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과는 또 다른 지점에서 끌어당긴다.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모든 어휘를 다 설명하려 했던 그 지난한 시도와 여정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하나 하나 정복해 나가며 가능한 최대치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과정이었다. 19세기 중반 시작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은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보낸 작가들이 문학 작품에서 사용한 어휘의 인용문 수집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돈을 받거나 어떤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닌데도 수많은 지원자들이 속출했고 물론 중간에 그만둬 버리거나 책임감 없이 행동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그 지난한 편찬 과정에 무보수로 동행한 많은 이들이 있었고 언어학자보다 더 심도 있고 적확하게 그 어휘가 최초로 쓰인 문학 작품을 찾아 인용하여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완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원봉사자 닥터 마이너와 사전의 편찬 작업을 전두 지휘했던 편집인 제임스 머리의 우정이 있었다. 그 둘은 닮은 외모, 비슷한 연배였지만 국적도 성격도 삶의 여정도 천양지차여서 사전 편찬이라는 공통된 화두가 없었다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전의 자원봉사자와 편집인으로 만난 둘은 서신 교환으로만 접촉하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나서야 서로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의날실과 씨실에 파고든 공적인 역사보다 더 끈질기고 드라마틱하고 비참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적인 연대기가 얽혀 있다.

 

충실하게 사전의 편찬 역사에 동행했던 자원 봉사자 닥터 사이먼에게는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다. 그는 상류층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 북군의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후에 정신병이 발병하여 전역한 후 건너간  런던에서 망상에 사로잡혀 가난한 한 집안의 가장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로 그는 사회와 격리되어 정신 병원의 수용소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여기에서 그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로 얻은 독특한 자유와 장서로 영국의 영어 사전 편찬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장서를 동원하여 성실하게 본인이 직접 만든 작은 어휘집에 제임스 머리가 요청한 어휘들의 용례를 충실히 수집해 주옥 같은 자료를 정기적으로 꾸준히 보내게 된다. 끊임없이 성적 망상에 사로잡히면서도 그의 성실함, 언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천착의 깊이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완성하는 데에 혁혁한 역할을 하게 된다. 편집인 제임스 머리는 이 성실하고 명민한 자원 봉사자에 대한 깊은 경탄과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되고 그가 정신병자에 살인까지 저질러 감금되다시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면회와 서신 교환을 중단하지 않고 심지어 노년기에 접어든 닥터 사이먼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충실한 친구의 역할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70년도 넘는 세월에 걸쳐 50만 개가 넘는 어휘의 정의와 역사, 용례를 담아 내어 '영어'의 위상을 재정립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이런 두 사내의 우정과 상호존중, 신뢰가 있었기게 가능한 것이었다. 저자는 더불어 닥터 마이어가 죽인 젊은 아버지 조지 메리트의 잊혀진 삶을 추적하고 이 책의 제사를 그에게 바침으로써 이 익명의 희생자가 될 뻔한 사전 편찬의 사연에 숨어 든 한 남자를 살려낸다.

 

일어났던 모든 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일들. 윌리엄이 런던에 건너가 살인을 저지르고 수용소에 감금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우리 앞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편지를 제임스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사전 작업에 활용하지 않았다면, 혹은 후에 그의 무서운 배경을 알아차리고 그와의 접촉을 끊었더라면, 그 작은 하나의 가정들이 모여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슬 고리마다 저자의 사려 깊고 세심한 시선은 가 닿아 그 모든 퍼즐 조각들이 맞춤하게 맞아 떨어져 그려 낸 그림을 그려낸다. 한 가여운 남자의 죽음, 그리고 두 남자의 편견과 계급을 뛰어 넘은 우정을 가로질러 마침내 그 모든 언어들의 태어나 자라 살고 죽은 그 유장한 역사가 남게 된 것이다.

 

사전을 다 먹어버리고 마침내 그 모든 언어를 다 머릿속에 넣어버렸다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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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6-2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다시 새로 나왔나 봐요. 예전에 나왔었는데...
블랑카님 <행복한 사전>이란 영화 보셨나요?
혹시 안 봤으면 한번 보세요.
진짜 사전 만드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워요.
줄리언 반즈도 사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다잖아요.^^

blanca 2016-06-27 18:1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안 그래도 그 영화 좋다 해서 봐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이 참에 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이 책이 개정판이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