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 상냥한 지성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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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위대한 시인의 말대로라면 삶 자체가 "앞이 안 보이고 어두컴컴한 감옥"37) 이야. 자네가행복하게 풀려나고 싶다면 비좁은 감옥에도, 고문에도, 죽음에도,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그 어떤 일에도 압도되지 말게.

자넨 노년을 맞았으니 삶이라는 여행을 잘해낸거야. 순풍이 불어와 거친 세파에 시달리지도 않고 이제 항구에 들어오는 거라고, 목적지가 어디건 이제는파도에 시달리던 쪽배를 해변으로 끌어당겨 끝을 잘 맺을 일만 생각하면 돼.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보처럼 울고 가장 좋은 어머니인 자연을 탓하고 푸념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그게 더 유용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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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든이 훌쩍 넘으셨고 몇 년의 폐암 투병 후라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먼저 본가에 내려간 부모님 연락으로 할머니의 시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죽어서도 할머니였다. 나에겐 죽은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고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할머니와 유대가 긴밀했지만  슬픔으로 오열하지도 않았다. 그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다가왔다. 할머니와의 이별은 시간이 지나서야 오히려 점점 더 실감이 왔고 상실감은 천천히 스며들어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도 물러날 기미를 안 보였다.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병원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명되는 죽음 대신 딸의 집에서 죽음을 맞고 자식들과 손주들의 마지막 촉감을 간직한 채 떠난 할머니의 죽음이 전적으로 좋았다고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 대목에도 확신은 없다. 죽음은 언제나 두렵고 슬프다. 죽음을 앞두고도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왠지 불경스럽고 부담스럽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과정에서 소외된다.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상조 업체가 있고 병원 장례식장과 연계된 서비스가 매뉴얼화되어 더이상 유족들이 시신을 가지고 의사 결정을 하거나 그 번거로운 절차에 직접 참여할 필요가 없다. 이제 손주가 할머니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오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기회는 많지 않다.

















솔직히 이십 대 여자 장의사가 죽음을 가볍게 흥미롭게 다룬 책이라 여겼다. 이십 대가 바라보는 죽음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지평선은 머나멀고 생의 부박함은 와닿을 리 없는 연령대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쓴 죽음에 관련한 책들 못지않게 이 젊은 여성이 실제 시신들의 화장 과정에 참여하는 이야기는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식견을 보여준다. 그녀가 경험하는 죽음은 대단히 실제적이다. 그녀는 시신을 나르고 실제 화장장에서 태워 그 유골을 수습한다. 


사업으로서 장의업은 일정 유형의 '존엄성'을 팔아서 발전했다. 가족들에게 존엄성이란 잘 조율된 마지막 순간, 잘 매만져진 시신으로 완성된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장례를 주도하는 사람은 무대 감독처럼 그날 저녁에 있을 전시 행사를 책임진다. 이 쇼의 스타는 시신이며, 감독은 제4의 벽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관객이 시신과 소통하다가 환상이 깨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이 중세역사를 전공한 유쾌한 아가씨는 성인들을 태운 잔열로 아기들을 "해치운다" 때로는 골든게이트에서 투신한 과학자와 노숙자를 화장하며 "당신의 재와 나의 재는 같고, 남는 것은 1.8~3.2킬로그램의 회색 재와 뼈뿐 임을 절실히 실감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함을 그녀 만큼 체감할 수 있는 직업이 있을까. 물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개별화하고픈 열망은 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각자의 의미와 개별화를 가진 저마다의 죽음을 가질 자격이 있음을 그녀는 꿰뚫는다. 모든 죽음을 간접적인 것으로 나쁜 것으로 은폐하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공론화하고 드러내지 않는한 물론 이러한 개별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대도 그건 결코 이른 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아프다. 나는 아무리 죽음에 관하여 읽고 의식해도 여전히 그 순간에 숨이 막힌다. 그래도 이러한 죽음이라면 견딜 만한 것이 될 것 같다.


그렇다.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사지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마지막 숨을 똑바로 내쉬었다. 그로써 넓디넓은 시골에 또 하나 더해진 입김, 마치 숨어서 동정만 살피가 점잖게 사라지는 짐승처럼 이웃을 귀찮게 하지도 않고 혼자 조용히 마무리했다. 

-에밀 졸라 <농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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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20-05-23 0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책 표지에서부터 저도 좀 가볍게 쓰인 손쉬운 책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블랑카님 리뷰를 보니 제가 오해했군요! 저는 요즘 통증과 죽음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게 좀 껄쩍지근하고 무섭기도 했고요. 정확히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천차만별인것 같아요. 저자는 죽음의 결과물을 다루었구나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고 추측해 봅니다. 저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싶어요^^

blanca 2020-05-23 19:34   좋아요 0 | URL
아, 쟌느님. 오랜만이에요. 저 사실 이것 그냥 그런 책인줄 알고 구태여 안 읽으려다 읽게 되었는데 아,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재미도 있고 후속작도 궁금해지더라고요. 잘 지내시죠?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는 파리의 1871년 코뮌으로부터 연대기적으로 출발한다. 빅토르 위고, 마네, 모네, 르누아르, 로뎅, 에펠(맞다, 그 에펠탑의), 리츠(역시, 리츠호텔의 리츠), 에밀 졸라, 공쿠르 형제, 드뷔시 등 오늘날도 여전히 빛나는 작가들, 화가들, 명사들 개개의 삶이 태피스트리처럼 정치, 사회적 격변과 얽혀 있다. 저자 메리 매콜리프는 남아 있는 기록 틈새에 자신의 추정이나 상상을 끼워넣지 않으면서 그 공백을 허하게 만들지 않는 재주가 있다. 나열되어 있는 자료들은 건조하거나 서걱거리지 않으면서 당대의 가난하고 다사다난했지만 예술사적 역사적 족적을 남긴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르누아르와 로뎅이 자전거 타기를 함께 배우는 장면, 거의 대명사처럼 굳어버린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서로의 결핍을 다독이고 메워주는 정경은 우리가 흔히 연상하듯 위대한 예술은 괴팍하고 고독한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간의 지지, 우정, 격려로 가능했음을 알게 한다.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는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불꽃 같은 삶도 흥미롭다. 열기구를 타고 올라 샴페인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햄릿'을 연기하는 여배우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이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경탄스럽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에펠탑이 완성되고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으로 싣고 가고  반유대주의로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드레퓌스의 무죄가 드디어 밝혀지던 날, 이 아름다운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마네의 동생의 아내이자 그녀 자신이 화가이기도 했던 베르트 모리조 모녀를 끝까지 의리 있게 보살핀 친구들 드가, 르누아르, 모네의 모습도 감동적이다. 그들은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단아들이었지만 결국 함께 스스로들을 하나의 역사적 존재로 만들어냈다. 때로 오해하고 반목하고 다퉈도 아픈 친구를 간병하고 서로의 그림을 응원하고 그 그림의 자리를 추천하고 남은 가족을 보살피며 끝까지 어려운 예술의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의 하나였다. 벨 에포크는 유달리 예술에 호의적이거나 경제적인 호황이었던 분위기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때로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꿈을 허무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믿어주며 사람 간의 교감과 우정, 사랑을 믿었던 그 순수한 무모함이 남아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설사 그것이 망상이고 때로 실패했을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주는 친구가 있었던 모네 또한 결국 눈부신 <수련> 연작을 완성하고 그 친구의 품에서 죽는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2020년에서 1890년 대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한 읽기였다. 죽고 나서 남을 것들을 의식하며 살았던 그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들의 최후와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이미 스포일러로 간직하고 다시 그들의 삶을 함께 하는 경험 또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외롭고 어려운 시간을 채워준 모네와 마네, 졸라, 드뷔시와 친구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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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5-13 0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임팩트 있는 후기에요. 이 책의 군더더기를 다 떨어내고 정확히 essential 부분을 정리하신 듯, 이 글이면 책 한 권이 다 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은 언제나 자서전과 글쓰기 작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그래서 왕왕 자화자찬격인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서의 자서전도 제대로 된 글쓰기 노하우에 관해서도 제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우려에서 출발한 <네 번째 원고>는 놀라운 책이었다.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하지 않으면서 저자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를 가감없이 노출하고 있었고 중언부언하지 않으면서 논픽션 글쓰기에 관한 실질적이고 결정적인 조언이 금과옥조였다. 















저자 존 맥피는 1931년생 현존 작가이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해왔다. 주로 '뉴요커'에 전속 필자로 각종 다양한 주제를 탐사하여 논픽션 기사를 써서 퓰리처상 및 각종 유수의 상을 받은 저널리스트다. 이 책은 그의 그러한 글쓰기 과정에 관련한 여덟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인 글쓰기 과정도 과정이지만 '뉴요커' 에서 기사를 게재하는 그 치열한 과정에 대한 뉴요커만의 독특한 관습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예를 들면 팩트 체커만 전문으로 하는 직원이 따로 있어서 저자들은 적확한 정보를 제시하는 데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닝'이라고 초록색 펜으로 필요 없는 부분을 삭제해도 그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해치지 않는 노하우 등 '뉴요커'의 필자가 되는 것만으로 훌륭한 작가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 누구도 나와, 아니 다른 누구와 똑같은 방식으로 쓰지 않는다. 이 사실 때문에 작가들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있을 수 없다. 경쟁처럼 보이는 건 사실 질투와 뒷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집필은 오로지 스스로를 개발하는 일이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P.149


'네 번째 원고'는 이러한 스스로와의 경쟁 관계에서 마침내 태어나 교열을 기다리는 원고 상태다. 맥피는 이 과정을 대학생들에게 강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자신이 가장 즐기는 과정이고 일물일어를 지향하며 끊임없이 사전을 참조하는 상태다. 


창의적인 작가는 장과 장 사이, 절과 절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창의적인 독자는 이 여백에 나타난 적히지 않은 생각을 침묵 속에서 명료화한다. 이 경험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라.

-p.297

이 조언을 특히 기억하고 싶다. 무언가를 과하게 설명하고 묘사하고 주장하는 순간 그 글은 분명 어그러진다. 그것은 읽을 자의 몫으로 족하다. 쓰는 자는 자신의 표현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 내면화할 읽는 이들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맥피는 여기에서 '창의적 논픽션'이 태어난다고 봤다. 창의성은 만들어진 픽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드러난 사물과 사건을 제시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없는 걸 지어내는 게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비단 글쓰기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삽입된 존 맥피의 자전적인 일화들도 감동적이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글쓰기 노장으로 강론하려는 욕심을 제어하고 그가 열아홉 살 우연히 만나게 된 아이젠하워 장군과의 일화를 덧붙인 것은 글쓰기의 완결이 어떻게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잔상을 남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증이다. 이미 거대하고 위대해진 사람 앞에 선 애송이 청년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에 위트를 넘어서는 답변으로 긴장을 다독여준 장군의 배포가 마치 맥피가 수많은 작가 지망생에게 선물한 이 책 그 자체를 연상시킨다. 여전히 글쓰기는 어렵고 그럼에도 지속된다. 가장 나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일은 계속된다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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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5-06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세상엔 읽고 싶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나 많아요. 어여어여 부지런히 읽을 밖에는 딴 도리가 없는데, 야구도 봐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고 밥벌이도 해야 하고..(한숨ㅜㅜ) 그러나 역시 행복합니다.^^ blanca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0-05-07 08:42   좋아요 0 | URL
읽고 싶고 하고 싶고 사고 싶은 게 많은 게 행복한 시절인 것 같아요. 야구 좋아하시는군요! 무관중이긴 하지만 미국 ESPN에서 중계한다니 괜시리 으쓱하더라고요.
 

신종 코로나의 유행 이후 대중에게 친숙해진 용어가 있다. '역학 조사'다.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을 참조하면 "전염병의 발생 원인과 역학적 특성을 밝히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대규모로 유행하는 전염병의 효율적인 방역 대책을 수립하자면 필수적인 과정이다. 전염 경로 조사와 확진자의 동선을 밝히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역학 조사는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1854년 역학 조사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 런던의 소호 거리의 마취 전문의 존 스노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거리를 덮친 콜레라의 발병 원인을 찾다 저도 모르게 역사적인 역학 조사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존 스노의 동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자취가 된다. 
















"자네하고 나는 그런 날을 보기 전에 죽겠지. 그런 날이 와도 내 이름은 완전히 잊혀질 걸세. 하지만 대규모 콜레라 발생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는 그런 날은 반드시 올 거라네. 그리고 질병의 전파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질병 박멸의 수단이 될 것이네."

-스티븐 존슨 <감염 도시>


자신이 죽고 난 후를 비장하게 예언한 존 스노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후손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심지어 근처 펍은 그의 이름을 따라 영업 중이고 많은 사회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그를 연구하고 그를 여전히 인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학 조사가 대규모 전염병 전파의 방역에 가지는 의미에 관한 조언만은 진실이었다. 놀랍게도 존 스노의 역학 조사의 동지는 근처 교회 부목사 화이트헤드였다. 의사와 목사는 처음에는 콜레라 발병 원인을 둘러싼 수원지에 대한 의견이 달라 반목했지만 금세 실질적 정보 앞에서 의기투합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한다. 당시 콜레라의 발병 원인은 런던의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오염되고 더러운 공기로 인한 발병이라는 '독기이론'이 주류였다. 이것에 대항한 두 열정적인 아마추어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과학적 진실과 발로 뛰는 역학 조사로 수인성 전염이라는 결론을 얻는 과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수집,분석, 발표하는 과정이 마치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면서 감동적이다. 더 나아가 최초 발병자의 배설물이 흘러들어가 오염된 것으로 보이는 브로드 가의 우물 펌프 손잡이를 제거하는 장면은 더없이 극적이다. 콜레라는 존 스노라는 통섭이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의사와 완고하고 독선적인 종교인의 자세 대신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개방성과 겸손함을 지닌 한 젊은 목사의 보조로 마침내 종식의 길을 걷게 되어 다시금 그 박테리아가 돌아왔을 때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머리말에 언급된 박테리아, 도시, 스노, 화이드헤드라는 네 주인공들이 만들어 낸 감염지도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저자 스티븐 존슨은 19세기의 이러한 역사적인 현장에서 21세기의 오늘날을 조심스레 예언한다. 도시화가 생존 전략으로 자리잡은 현상황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가장 위험한 요소로 전염병과 핵폭발을 언급한다. 전염병 부분에서 그는 지극히 낙관적이라 통제 가능할 것이라 봤다.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는 그가 이 <감염 도시>를 쓰게 한 지점이자 취지이다. 역사의 시계를 돌리면 생존해 있는 우리의 시점에서 대부분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한 셈이 된다. 여기까지 와서 이곳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후손으로 하는 선조들의 행동은 결국 우리가 여기에서 영위하는 삶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현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의 힘든 현재는 다시금 후손들의 긍정적인 오늘을 위한 과거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존 스노와 헨리 화이트헤드를 기다리는 골든스퀘어 주민들의 심정이 된다.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신종 코로나 또한 종식되어 역사의 장에 남게 되기를, 그리고 이러한 전염병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적어도 유의미한 가르침과 교훈과 진보가 함께 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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