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은 언제나 자서전과 글쓰기 작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그래서 왕왕 자화자찬격인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서의 자서전도 제대로 된 글쓰기 노하우에 관해서도 제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우려에서 출발한 <네 번째 원고>는 놀라운 책이었다.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하지 않으면서 저자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를 가감없이 노출하고 있었고 중언부언하지 않으면서 논픽션 글쓰기에 관한 실질적이고 결정적인 조언이 금과옥조였다. 















저자 존 맥피는 1931년생 현존 작가이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해왔다. 주로 '뉴요커'에 전속 필자로 각종 다양한 주제를 탐사하여 논픽션 기사를 써서 퓰리처상 및 각종 유수의 상을 받은 저널리스트다. 이 책은 그의 그러한 글쓰기 과정에 관련한 여덟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인 글쓰기 과정도 과정이지만 '뉴요커' 에서 기사를 게재하는 그 치열한 과정에 대한 뉴요커만의 독특한 관습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예를 들면 팩트 체커만 전문으로 하는 직원이 따로 있어서 저자들은 적확한 정보를 제시하는 데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닝'이라고 초록색 펜으로 필요 없는 부분을 삭제해도 그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해치지 않는 노하우 등 '뉴요커'의 필자가 되는 것만으로 훌륭한 작가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 누구도 나와, 아니 다른 누구와 똑같은 방식으로 쓰지 않는다. 이 사실 때문에 작가들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있을 수 없다. 경쟁처럼 보이는 건 사실 질투와 뒷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집필은 오로지 스스로를 개발하는 일이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P.149


'네 번째 원고'는 이러한 스스로와의 경쟁 관계에서 마침내 태어나 교열을 기다리는 원고 상태다. 맥피는 이 과정을 대학생들에게 강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자신이 가장 즐기는 과정이고 일물일어를 지향하며 끊임없이 사전을 참조하는 상태다. 


창의적인 작가는 장과 장 사이, 절과 절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창의적인 독자는 이 여백에 나타난 적히지 않은 생각을 침묵 속에서 명료화한다. 이 경험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라.

-p.297

이 조언을 특히 기억하고 싶다. 무언가를 과하게 설명하고 묘사하고 주장하는 순간 그 글은 분명 어그러진다. 그것은 읽을 자의 몫으로 족하다. 쓰는 자는 자신의 표현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 내면화할 읽는 이들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맥피는 여기에서 '창의적 논픽션'이 태어난다고 봤다. 창의성은 만들어진 픽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드러난 사물과 사건을 제시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없는 걸 지어내는 게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비단 글쓰기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삽입된 존 맥피의 자전적인 일화들도 감동적이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글쓰기 노장으로 강론하려는 욕심을 제어하고 그가 열아홉 살 우연히 만나게 된 아이젠하워 장군과의 일화를 덧붙인 것은 글쓰기의 완결이 어떻게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잔상을 남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증이다. 이미 거대하고 위대해진 사람 앞에 선 애송이 청년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에 위트를 넘어서는 답변으로 긴장을 다독여준 장군의 배포가 마치 맥피가 수많은 작가 지망생에게 선물한 이 책 그 자체를 연상시킨다. 여전히 글쓰기는 어렵고 그럼에도 지속된다. 가장 나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일은 계속된다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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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5-06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세상엔 읽고 싶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나 많아요. 어여어여 부지런히 읽을 밖에는 딴 도리가 없는데, 야구도 봐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고 밥벌이도 해야 하고..(한숨ㅜㅜ) 그러나 역시 행복합니다.^^ blanca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0-05-07 08:42   좋아요 0 | URL
읽고 싶고 하고 싶고 사고 싶은 게 많은 게 행복한 시절인 것 같아요. 야구 좋아하시는군요! 무관중이긴 하지만 미국 ESPN에서 중계한다니 괜시리 으쓱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