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으면 또 산이다."

친정 엄마 얘기가 귓가에 맴돈다. 솔직히 수긍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힘들게 산을 탔는데 또 넘어야 할 산이 내 앞에 나온다면, 게다가 그게 삶의 은유라면 생각만 해도 지친다. 그런데 정말이지 요즘은 엄마의 얘기가 당신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높이와 굴곡은 저마다 또 시간마다 다르지만 결국 숙제는 어렵고 어떻게든 마쳐서 제출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아무리 열과 성을 다 해도 결국 일의 완성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작용한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운명론적 체념이 나날이 한뼘씩은 늘어간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주명리학으로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한치의 오차없이 읽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주명리학이 점이나 미신, 헛소리로 폄하될 것도 아니다. 음과 양의 기본 개념에서 출발한 간지의 순환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살이를 풀이하는 일은 내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리듬에 내 시선과 자세를 맞추는 일이다. 일확천금이나 운수대통의 지점을 적시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일들이 결국 지나갈 것이며 그 지나간 자리에 앎이 남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가 사주명리학을 비교적 쉽게 설명한 입문서라고 하는데 정작 학문적 접근은 쉽지 않았다. 만세력을 보고 나의 출생연월일시를 넣어봤지만 대충이라도 읽어낼 수 없었다. 사주에 불이 많구나, 이 정도. 사주명리학 그 자체보다는 삶의 본질적 흐름과 외부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자본주의적 가치와 이분법적 잣대를 분리하여 나의 운명 그 자체를, '나'라는 인간 그 자체를 어떻게 포용하고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철학적 인문학적 시선이 와닿았다. 


특히 무기징역을 받고 추운 독방에 내몰린 신영복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 죽었어요."라고 이야기한 대목의 인용은 뭉클했다. 단지 두 시간, 그것도 고작해야 무릎크기의 햇빛을 기다리며 그래도 태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외부적 사건,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마음 속에 바로 파고드는 이야기.


나의 운명과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들의 삶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혹은 해석하거나 인과 관계로 정렬해 보려는 오만은 버려야겠다. 내가 이 땅에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데 내가 또 언제, 어떤 식으로 갈지 짐작할 수 없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견딜 수 있다. 견디고 버티면 어떻게든 시간이 가겠지.


















"엄마, 조보다 더 큰 수는 뭐야?"

요새 꼬맹이의 최대 관심사는 무지 무지 큰 수다. 아마 나도 고맘때쯤 아빠한테 비슷한 질문을 했고 아버지의 대답은 

"무량대수니라."해서 "에잇, 거짓말"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로 찾아보니 무려 "무량대수"가 있었다. 제대로 앉아 찾아보니 이 큰 수의 용어가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다. 칼 세이건의 마지막 책은 이러한 이야기로 출발한다. 정말 큰 수. 무지 무지 무지 큰 수. 칼 세이건이 사람들에게 "billions and billions"로 불렸던 건 아무래도 그가 우주의 역사와 그 언어로 충분히 묘사하기 힘든 광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언뜻 스치며 이야기한 단위가 부풀려진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의 생전 마지막 이야기를 이 큰 숫자들로 시작한다. 아이한테 큰 수를 설명하기에는 10의 지수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보너스로 알게 되었다. 숫자에도 과학에도 직관적인 이해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칼 세이건의 이야기의 태반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우주의 역사와 광대함을 듣는 것만으로 나날의 범속한 일들, 치사함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위안이 된다. 더 고차원적이고 거시적인 지대로 발을 딛는 것만으로 조금은 덜 작아진다. 착시일지라도.


사주팔자도 우주의 비의도 구체적인 일상의 지엽적 문제들의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 이 자리에 발을 딛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설명하기 힘든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 준다. 그래서 읽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도 앞으로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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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와 류노스케의 생몰 연월일을 보니 세상에 나와 삼십오년을 살고 갔다. 그의 <귤>을 읽고 나니 이 짧은 생애에 다시 눈길이 간다. 열차 이등실에 앉아 우연히 보게 된 행색이 초라한 소녀에 대한 짧은 단상은 절창이다. 소녀의 남루한 행색에 대해 솔직히 느꼈던 반감과 혐오감이 어떻게 반전되는지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결고운 호소력 짙은 명문이다. 

















그때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그 애가 예의 부르튼 손을 쭉 뻗어 힘차게 좌우로 흔드는데, 맘이 들뜰 만큼 따스한 햇살에 물든 귤 대여섯 개가 배웅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이리저리 흩어져 내렸다. 나는 엉겁결에 숨이 멎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이해됐다. 이 아이는, 아마도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러 떠나는 이 아이는, 품속에 넣어온 몇 개의 귤을 창밖으로 던져 애써 건널목까지 배웅하러 나온 남동생들의 노고에 보답한 것이구나.

- 아쿠타와 류노스케 <귤>


터널 속에서 묵직한 차창을 어떻게든 들어올려 열려고 했던 시도를 거슬리게 느꼈던 아쿠타와 류노스케는 그 후에 나올 자기 집 개구쟁이 남동생들에게 귤을 던지는 소녀의 몸짓으로 인해 뜻밖의 경탄으로 숨이 멎는다.. 무겁고 둔하게 느껴졌던 소녀의 모습에는 이런 생기가 숨어 있었다.. 어떻게든 남동생들에게 품안의 귤을 던져주고 지나가고 싶었던 누이의 우애는 햇살 같은 귤로 몽글몽글 피어난다. 차갑고 무심했던 청년의 시선은 잠시 반짝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로 가 닿는다. 절망했던 그는 잠시 움찔한다. 대단한 교조적인 연설 없이도 생의 비의는 이렇게 순간의 찰나 같은 이야기로 드러나고 빛난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중심에 있있다 일본 정부의 검거로 투옥 생활을 하게 된 소설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이야기는 정작 그 자신의 이야기보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이름 모를 조선인 동료의 이야기가 뼈아프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외부에서 사식을 받지 못하는 감방수였다고 한다. 바깥의 소식도 감방에서의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 줄 그 어떤 물질적 지원도 받지 못하는 조선인 동료에 대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백 년 가까이 지나 같은 땅의 후손이 듣기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다. 


1902년 영국 유학 생활 중 하숙집 아주머니의 권고로 억지로 배우다시피 한 자전거로 인한 각종 사고와 해프닝을 유쾌하게 그 린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거 이야기>부터 일본의 근대 이후의 작가들의 수필들을 모든 이 책은 역자가 직접 동경의 국립 도서관이 문을 열 시간부터 닫을 시간까지 상주하다시피 하며 발굴해 낸 이야기들이라 한다. 번역이라는 체를 통과했다는 의식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려하면서도 일본 작가들 특유의 문체적 성격까지 충실히 살려 낸 이야기들이 잔잔하니 읽기에 보기에 듣기에 좋다. 유달리 요절한 작가들이 많고 그들의 시선은 청춘의 경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듯한데 시대의 질곡과 삶의 신산한 부침에 시달려 한 생애를 살아 낸 노인의 그것과 견주어 깊이에 부족함이 없어 보여 역설적으로 더 안타깝다. 구체적인 생활의 고난으로 한없이 절망할 듣도 한데 일상의 비일상성과 눈물 속의 해학을 길어 올리는 재주가 천상 작가들의 그것이다.


<슬픈 인간>은 슬프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자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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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인 판단이나 상황에 대한 순발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러니 새로운, 낯선 환경에 노출되면 당황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좌뇌형 우뇌형 인간의 경직된 편가르기에 별로 편승하고 싶진 않지만 직관적이고 창의적인 것과 거리가 먼 나의 우뇌는 상당히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좌뇌형 인간인가? 좌뇌형 인간은 수학을 잘 해야 하는데.. 흠, 이도 저도 아닌 것도 같고. 
















실제 뇌신경과학자인 저자가 서른 일곱 살에 좌뇌쪽 뇌출혈을 겪으며 완벽히 회복하기까지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실제 대상 환자가 되어 뇌출혈이 있던 그 날부터 개두술, 재활의 과정이 환자와 연구 학자의 시선이 어우러져 생생하게 묘사된다. 저자는 한동안 좌뇌 기능의 상실로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제대로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일종의 니르바나, 평정감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좌뇌가 가지고 오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경계감, 서열 의식 같은 우가 이 전장 같은 세계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 체득하고 나온 기능들이 상실되면서 오히려 여기, 지금 이 순강에서 커다른 섭리와 접촉함으로써 느끼는 편안한 희열감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 숱한 불안감들은 참으로 쓰잘데기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뇌가 이 세계에서 우리를 지탱하기 위해 부여하는 고차원적인 의식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 왔다는 깨달음은 놀라운 것이다. 바깥에서 볼 때는 장애가 있어 불행해 보이는 저자의 모습이 사실 내면에서 충족된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 상태였다는 고백이 이채롭다. 심지어  좌뇌 기능을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가벼운 저항감마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미래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 등이 돌아올 경우 지금 이 상태보 더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한 반문. 그녀의 회복의 여정은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감동적인 서사다.


내가 느끼는 것들이 뇌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는 앎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다. 스위치를 끄는 것처럼 이제 그만 비교하자, 그만 불안하자,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뇌형 인간이 못 되는 것은 불행의 단초 같기도 하다. 나와 이 세계가 접촉하는 지점을 의식하는 건 나의 자의식은 절대적인 것 같지만 사실 대단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의식하는 지점이 사실 명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의식하는 건 앎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사실 과잉이다. 그리고 거기에 '좌뇌'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영역도 여기에 있다는 점이다. 말을 잃어버리면 말로 경계지어지는 사물에 대한 감각도 둔해진다. 그렇게 되면 '나'는 유형의 생명이 아니라 일종의 무형질의 액체처럼 이 세계와 섞여 버리는 느낌이 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좌뇌형 인간에 우뇌형 감각을 적당량 덜어 잘 버무리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은데 이것은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나'를 인식하면서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니 말이다. '나'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니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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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10-05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개정판) 읽고 있는데요. 한 번 프레임에 사로잡히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하죠. 이성적 판단도 감정적인 판단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말씀처럼 좌뇌/우뇌로 따질 건 아닌 거 같습니다.

blanca 2018-10-05 03:1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해요.
 

저녁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상태로 팟캐스트를 들으며 잠드는 일이 반복되곤 해서 그런지 귀가 거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뜬금없이 오른쪽 귀뒤편에서 진물이 나고 염증이 생겨버렸다. 아무는 데에 꼬박 2주는 걸린 것 같다. 듣고 보고 냄새 맡는 사소한 일의 무게감이 묵직하다. 아직 노안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감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기관의 예민함이 떨어지는 일은 한편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만 섭리인 것도 같다. 이제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세상을 대면하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일에서는 서서히 거기를 두기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와버린 것 같아 헛헛하다. 부정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이러한 젊음의 예민한 손끝에 대한 때늦은 자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때는 몰랐던 그 감각 기관들의 명민하고 섬세한 조응이 노건축가의 머릿속 구상들을 성공적으로 실제로 형상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자각이 뭉클하다. 이십 대에 동료들과 만든 정밀한 건축 모형을 중년이 되어 지켜보는 시선은 "틀림없는 젊음"에 대한 회한만은 아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인식은 항상 뒤늦게 오고야 만다. 이 정도 되면 '젊음'은 하나의 형상이 되어 돌아온다. '늙음'과는 다른 종류의 성취가 가능했던 영역에 대한 관조는 담담하다. 그때는 그랬었지.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이런 느낌. 잔잔하고 평화롭다. '여름'은 청춘의 빛나던 그 열심이던 시절에 대한 아름답고 싱싱한 은유 같아 잔상이 길다. 왜 유독 그때는 여름에 많은 일이 있었는지... 가을에 겨울에 사랑하고 헤어져도 되는데 그 모든 것이 그 짧은 강렬한 여름이라는 계절 하나에 유독 우겨 넣어져 있었던 건지 모를 일이다. 마치 인생 전체의 모습과도 닮았다. 진하고 짧고 강렬한 것이 농축되어 있는 청춘의 경험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엉뚱한 소비욕과 만난다. 

이북을 읽기 위해 나는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나 보다. 눈 건강을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는 합리화를 열심히 하는 중. 나는 참으로 얄팍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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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0-03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오래 고민하고 크레마 구입했는데요. 구입의 결정적인 이유가 결국, 나중에 구입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구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요한 이유는, 커피 옆의 크레마 사진이 너무 근사해서요.
아주 자주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이북(예를 들면 잭 리처) 여러 권 넣을 수 있어 좋구요 글자 크기도 조정할 수 있어 좋구요.
눈도 편하고요. 그리고 이쁘고요~~~~~^^

blanca 2018-10-03 08:22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거지요. 이 고민하고 검색하는 시간을 좀더 즐기다 확 질러버릴까 생각중입니다. 내 눈은 소중하니까요. ^^;;다락방님도 단발머리님도 좋다 하시니 기대가 커지네요.

psyche 2018-10-0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도서관에서 책 빌릴때도 먼저 이북이 있나부터 봐요. 전에는 도서관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랬다면 지금은 글자 사이즈 때문에... 미국 책 특히 페이퍼백은 글씨가 너무 작아요.ㅜㅜ

blanca 2018-10-03 11:07   좋아요 0 | URL
페이퍼백은 그냥 펼쳐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요. 킨들로도 한국책을 볼 수 있음 좋을텐데... 구글샵에서 사서 변환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그래도 종이책이 사실 좋은데 보관 문제도 있고 특히 한번 읽고 말 것 같은 책들은 되도록 이북으로 보려고 해요. 여하튼 이렇게 또 지름신이... 마음으로는 킨들 오아시스도 사고파요. 욕망만 높아져 갑니다. ^^
 

핑크 공주라 불리우며 깜찍한  공주 행세를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라는 진부한 표현은 뒤로 하고라도 벌써 아니 이제 딸은 사춘기 초입에 들어섰다.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아침에 머리를 빗으며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안풀릴 때마다 혼자 신경질을 내고 엄마에게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 불평을 늘어놓거나 여섯 살 아래 남동생과 승산 없는 말싸움을 시작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흑, 정말이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때로 감정 절제가 안 된다. 아놔, 이런 풍경이 내 인생 속에 들어 있었을 줄이야. 사춘기 딸과 유치하게 말싸움 하는 엄마. 제3자가 본다면 저 엄마는 참으로 유치하고 옹졸하구나, 싶을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속을 삭이며 집을 나서는데 어떤 분이 북플에 기억도 가물가물한 나의 옛글에 '좋아요'를 해 주신 덕에 도저히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낯선 글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마치 지금 내가 읽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 것 같은 글의 기시감에 움찔했다. 



http://blog.aladin.co.kr/blanca98/7579867

















'시간'에 대한 이야기.  그것을 '삶' 속에서 어떻게 녹여내고 인식하고 쓸 것인가,에 대한 담론. 인생이 유한하다는 자각, 특히 아이의 양육, 아이와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구나, 싶게 만드는 깨달음. 당연한데 항상 잊어버리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수시로 상기시켜줘야 말들이 아름답게 단상처럼 담겨 있던 이 책이 내게 적시에 다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아직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열두 살이 이 아이를 상대하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나에게 여전히 남은 상처들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루하루는 8만 6천 초가 넘는 작은 영원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유념하고 난 여전히 질척거리겠지만 다시 마음을 되잡으려 한다. 넘어져도 또 다시 뒤도 돌아보고 삶의 지평선도 유념하며 걸어가야겠지. 결코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매몰되어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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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8-09-2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반 여자 애들도 대부분 사춘기에 돌입해서 정말 외모 가꾸기에 온정신을 쏟아 붓더군요. 남학생은 아직 사춘기 돌입한 애들이 몇 안 되는데... 여학생이 빨라요.

blanca 2018-10-03 06:49   좋아요 0 | URL
아침에 외모 치장하느라 늦는 모습 보면 귀엽기도 하고 ㅋ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요. 그렇죠. 아직 또래 남자애들은 천진난만하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