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상태로 팟캐스트를 들으며 잠드는 일이 반복되곤 해서 그런지 귀가 거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뜬금없이 오른쪽 귀뒤편에서 진물이 나고 염증이 생겨버렸다. 아무는 데에 꼬박 2주는 걸린 것 같다. 듣고 보고 냄새 맡는 사소한 일의 무게감이 묵직하다. 아직 노안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감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기관의 예민함이 떨어지는 일은 한편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만 섭리인 것도 같다. 이제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세상을 대면하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일에서는 서서히 거기를 두기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와버린 것 같아 헛헛하다. 부정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이러한 젊음의 예민한 손끝에 대한 때늦은 자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때는 몰랐던 그 감각 기관들의 명민하고 섬세한 조응이 노건축가의 머릿속 구상들을 성공적으로 실제로 형상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자각이 뭉클하다. 이십 대에 동료들과 만든 정밀한 건축 모형을 중년이 되어 지켜보는 시선은 "틀림없는 젊음"에 대한 회한만은 아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인식은 항상 뒤늦게 오고야 만다. 이 정도 되면 '젊음'은 하나의 형상이 되어 돌아온다. '늙음'과는 다른 종류의 성취가 가능했던 영역에 대한 관조는 담담하다. 그때는 그랬었지.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이런 느낌. 잔잔하고 평화롭다. '여름'은 청춘의 빛나던 그 열심이던 시절에 대한 아름답고 싱싱한 은유 같아 잔상이 길다. 왜 유독 그때는 여름에 많은 일이 있었는지... 가을에 겨울에 사랑하고 헤어져도 되는데 그 모든 것이 그 짧은 강렬한 여름이라는 계절 하나에 유독 우겨 넣어져 있었던 건지 모를 일이다. 마치 인생 전체의 모습과도 닮았다. 진하고 짧고 강렬한 것이 농축되어 있는 청춘의 경험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엉뚱한 소비욕과 만난다.
이북을 읽기 위해 나는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나 보다. 눈 건강을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는 합리화를 열심히 하는 중. 나는 참으로 얄팍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