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종단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체념하고 절망하고 희희낙락한다. 어떤 계기나 시간이 주어지면 꼬마 시절의 나, 소녀 시절의 모습, 지금은 떠나고 없는 사람들이 때로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여기 이렇게 두 아이를 키우는 중년의 아줌마가 지금 전부인 것 같은 시간은 어김없이 또 돌아온다.
뒤돌아 보면 또 앞질러 보면 대체 어느 지점의 내가 가장 나다운 것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책가방을 메고 언덕을 타박 타박 올라가는 자그만한 체구의 중학생이 정말 나같기도 하고 그냥 긴 생머리가 하고 싶어 무작정 곱슬머리를 안 예쁘게 기르고 한껏 그 모습을 의식했던 아가씨가 나 같기도 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일들 앞에서 이리저리 질문해대는 신입사원의 모습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남산만한 배를 하고 아기옷을 사러다니던 예비 엄마의 모습도 그렇고.
책이 출간된 1965년에서 오십 년이나 흘러서야 더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책이라 했다. 작가 존 윌리엄스가 평생 쓴 책은 이 책을 포함해서 총 네권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이 전부.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 정교수가 아닌 조교수로 예정보다 일찍 퇴임하게 되고 죽음을 맞게 된 한 사내의 삶을 따라가게 된다. 농삿군 아버지 아래에서 일손을 돕다 우연하게 농과대학에 입학하기 된 그는 2학년 영문학 개론 시간, 마치 그의 삶 전체를 예언하는 듯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듣고 영문학자이자 가르치는 이로서의 삶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성실하고 내면에 열정을 간직한 사내의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의 여정에 이끌리듯이 따라가게 된다. 소통하지 않는 외로운 결혼 생활, 갑작스럽게 찾아 온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상실, 교활하고 영악하지 못한 처신들이 마치 무능처럼 매도되는 바깥 세상과의 불화... 이다지도 평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가 가지는 흡인력은 그와 이러한 그의 삶을 그려내는 그 언어들의 진실성과 영롱함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작가의 눈은 스토너의 눈을 ,스토너의 심장 박동을 따라 유려하게 미끄러져 간다. 거기에서 나온 문장들은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마음결로 스며든다. 작가의 무리하지 않는 통제는 역설적으로 읽는 이들이 스토너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스토너가 마침내 중년을 넘고 노년으로 가며 죽음의 전조가 흘러들어올 때에는 마치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나갈 때처럼 가슴이 스산해져 옴을 느끼게 된다. 그 모습은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로 나의 것이 될 것임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핍진성 있는 묘사들.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의 죽음조차 천천히 관조하며 그 느낌과 그 시선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작가가 정말 죽음으로 가는 경험을 해본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그 문장들은 놀랍도록 설득력을 가진다. 맞아, 죽음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은 여기에서 멀지 않은 바로 이런 것일 거야, 하는.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책을 뽑아 들고 맞이하는 죽음은 청년 시절 그가 도서관을 자신의 장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의 현현이다. 언어가 그려낸 지도 속에서 반생을 거닐었던 남자는 그 언어들이 가장 그다운 곳을 보존한 그것을 의식하며 죽는다.
'소설의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듣거나 그 어떤 것일지라도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 때 이 책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넘어선 이야기. 태어나 살고 늙고 죽어가는 그 지리멸렬한 명제가 어떻게 구체화되는 것인지에 대한 그 단순명료한 예시가 스토너라는 이 도저히 미워하거나 멸시할 수 없는 사내를 통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