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책과 함께 주문한 나가사키면을 밤 열한 시경 내리 끓여먹는 기염을 토하고, 주말밤마다 EBS에서 상영하는 명화들로 주를 항상 두통과 께적지근한 컨디션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어젯밤에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봤다. 1960년의 흑백 영화로 화질도 성우들의 더빙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중간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여공들의 음악교사. 배우 김진아의 아버지 김진규가 연기한 적당히 느끼하고 매력적이고 결단력 없어 보이는 중산층의 가장이 임신한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할 하녀를 들임으로써 전개되는 일종의 스릴러 치정극이다.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고 쥐를 생포하는 엽기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한 배우 이은심의 연기가 놀라웠다. 당시 신인이었다는데 이 역할을 한 이후로 역할이 한정되어 결혼하여 은퇴하는 수순을 밟아 후기작이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피아노를 배우러 집안을 드나들고 결정적으로 이 하녀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 배우 엄앵란의 통통 튀는 연기도 볼 수 있다. 짓궂은 아역으로 등장해 장애가 있는 누나를 괴롭히는 안성기의 소싯적 모습도 엿볼 수 있는 즐거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그 밖의 타인들에게 직간접으로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되는 남자의 욕망과 위선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긴박한 전개, 계단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적절히 활용한 모습,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투영되는 과장된 표정 들이 언뜻 히치콕 감독을 연상케 한다. 결말의 반전도 기대이상이었다. 관객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 인간의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다양한 욕망들의 변주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 버전은 상대적으로 호평을 못 받고 있는 것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새벽 한 시 반. 그 욕망을 연기했던 배우들은 이미 죽거나 은퇴하고 늙어가고 있다. 하지만 욕망은 더 진화하고 더 젊어져서 삶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순간 <빨간 머리 앤> 전권 주문이 후회됐다. 그냥 왠지 그랬다. 왼쪽으로 돌아누우면 이 고민. 하늘을 보고 누우면 또다른 고민.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됐나, 또 한 살을 먹게 되는구나, 하면서 한숨 한 줌.  

침대에 누울 때마다 삶이 조금씩 더 줄어드는 것같다. 그리고 얼마간은 진실이다. 시간의 바로미터는 지척에서 요 바깥에 나가 배를 다 드러내고 쌕쌕대며 꿈나라게 가 있다. 자식을 키우는 것도 결국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하는 행동들이 결국은 자신의 욕망의 분출 이상이 아닐 때도 많다.  

 

이런 류의 책에 대한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 있는데 이 책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한다는 말은 진부해서 더 많은 의미를 가진 얘기이다. 성장통은 사춘기만큼 아프고 뒤돌아 보면 훌쩍 커있다. 오른손에는 내 아이, 왼손에는 어릴 적 작고 아픈 나의 손을 잡고 아주 무거운 도움닫기를 하는 일이다. 한꺼번에 두 아이를 데리고 저만치 걸어가야 하는 일. 힘들지만 어느덧 셋이 이만큼이나 와 있다.  

나가사키면, 꼬꼬면은 쟁여두지 않으면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밤마다 어쩌다 보게 되어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들은 어찌 끊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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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것들... 그래도 [빨간 머리 앤] 전권 주문은 잘 하신 선택 같은데요? 저는 1권만 하나 책장에 꽂아놓았답니다 ㅎㅎ 이 책이 미래의 조카들 혹은 내 아이들에게 갈 생각을 하면 흐뭇해요. 밤 늦게 영화 보는 것도 좋지만, 다음 날을 생각하면 좀 주저하게 되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영화 보기에는... 뭔가 기분이 안 나고! 저도 [하녀] 흥미로웠어요. 기대 이상은 아니었지만 ㅠ ㅠ

blanca 2011-10-17 22:55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하여튼 밤늦게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음 날 아침 처절한 후회를 불러오더라고요--;; <하녀> 보셨군요! 저는 흑백영화고 성우 더빙이라 아예 기대 없이 봐서 재미있게 봤어요. 리메이크 버전은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stella.K 2011-10-1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가사키면 괜찮죠? 그런데 그것을 11시에 끊여 잡수시다닛!
아, 브랑카님 왜 그러셨어요?ㅠㅠ
그래도 신라면이 강해서 그것도 그렇고 꼬꼬면도 그렇고 신라면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되요.
점심엔 저도 라면을 끊여 먹어보고 싶군요.ㅎ
하녀를 다시 방영해줬군요.
저도 작년에 봤는데.
옛날 배우가 나오고 소품이 옛날거라 그렇지 디테일은 정말 뛰어나요.
진짜 히치콕을 연상시키기도 하구.
전, <료마가 간다> 반값에 나왔던데 사고 싶은 충동이 마구 생겨요.ㅠㅠ

blanca 2011-10-17 22:5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나가사키면 저는 기대이상이었어요. 그래서 한 팩을 일주일 안에 다 소화해버리고 말았어요. 신라면, 외국에 나갔던 친구가 외국인이 훔쳐가서 깜놀했다고 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신라면의 명성이 그 정도였다고요 ㅋㅋ아, 반값으로 나오면 저는 망설이다 결국 지르게 되더라고요. 저는 라면이 있으면 자꾸 밤에 끓여 먹고 싶어져서 아예 안 사다 놓아야 해요--

2011-10-17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7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10-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상수 감독의 하녀도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하더라구요. 보면서 이전 작품도 봤으면..생각했더랬어요. 엄앵란 씨가 나오는군요.

아..자식을 키우는 것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에 심히 공감합니다. 아직 아가씨지만 저희 언니를 보면서, 그리고 조카를 보면서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요. 그게 무엇이든지 욕망을 갈구하고 갈등하는 그런 일은 평생 내 곁을 떠나지 않겠구나, 싶기도 했구요.

빨간머리앤 전권은 욕심내도 될 부류 같애요. 히히. 저도 조카 보라고 질렀는데요. 아직 조카는 보지 않고 제가 여러 번 봤답니다. 다음에 조카가 더 크면 보겠지, 생각하면서 이번에 조카 방으로 옮겨놨습니다. ^^

blanca 2011-10-17 23:01   좋아요 0 | URL
아, 임상수 감독의 <하녀>도 했었어요? 케이블이겠지요? 아쉽네요. 비교하며 볼 기회를 놓쳐서요. 저도 청소년도 볼 수 있겠다 싶은 책들은 아이 명분으로 지른답니다. 멀고 멀었지만요. 달사르님의 아가씨라는 어감이 참 이쁘네요.

icaru 2011-10-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그제(금요일밤) 11시 나가사키면을 끓여 먹었는데... (그래서?) 그렇다구요~ ㅎ
전도연이 나오던 하녀는 봤었는데..호평을 못 받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blanca 2011-10-17 23:02   좋아요 0 | URL
찌찌뿡! 저는 주로 그 시간 언저리에 꼭 라면 생각이 나서. 십 분 갈등하다 끓여먹은 직후 땅을 치며 후회하고 다음날 아침에 쓰린 속과 부은 얼굴로 일어난답니다.^^;; 아, 안 그래도 리메이크 버전 평들을 읽어보니 칭찬이 없더라고요.

잘잘라 2011-10-17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밀가루 끊었는데 라면,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날씨 쌀쌀해지니까 후후 불며 먹는 라면,이 생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너무나 그리워서..
아.. 그리움이 욕망으로 변하는 순간,이 가까이 아주 가까이, 거의 다 왔습니다.
라면 사러 휘릭~

blanca 2011-10-17 23:10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정말 밀가루 끊으셨어요? 사실 저야말로 끊어야 하는데. 라면은 정말 못 참겠어요. 저번 주 일욜날도 책상에 앉아 있으니 아랫층에서 어찌나 격렬하게 라면 냄새가 올라오던지. 당장 한 젓가락 거들고 싶더라고요^^;;

2011-10-17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7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10-1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빨강머리앤]이 도착해서 [토지] 때처럼 블랑카님이 또 안 나타나시고 숨으실까봐(그렇게 겨울 나실까봐) 완전 걱정이예요. 히히히히히. 그럼 너무 보고싶잖아요.^^

blanca 2011-10-17 23:1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이리시스님, 저의 성향을 어찌나 그렇게 잘 파악하셨어요. 단권 아니면 푹 파묻혀서 겨울잠 자는 수준으로 가는 성향을 들켜버렸네요. 청소년대상 도서이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 보고 싶다,는 말이 참 좋아요.

2011-10-17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7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가방 2011-10-1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이나 니코틴처럼 밀가루도 중독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저도 야행성이라 한동안 야밤에 라면, 과자, 빵 이런 것들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먹었던 적이 있었지요.
아침이면 어김없이 속이 불편했구요.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그런 습관이 사라졌어요.
나이를 먹어서 그럴까요...????
한참 그런 게 땡길 나이가 있는걸까요..????
요즘은 오히려 속이 비어야 맘도 편해요.
그런데도 살은 안빠지고.. (다행히 더 찌지도 않아요..^^)

문득.. 뜨끈뜨끈하게 잘 끓인 멸치국수가 먹고 싶어졌어요... 어쩔...

blanca 2011-10-18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카페인이랑 밀가루 중독이에요. 위가 정말 안 좋아요. 빨리 고쳐야 할 습관인데 쉽지가 않네요. 뜨끈뜨끈하게 잘 끓인 멸치국수,라는 책가방님의 말씀에 또 그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해 봅니다. 게다가 저희 집 주변에 또 유명한 멸치국수집이 있어서요.

책가방 2011-10-19 11:41   좋아요 0 | URL
결국... 어제 애들이랑 멸치국수 먹고 왔어요..^^
항상 붐비는 집인데.. 곱배기랑 보통이랑 가격이 같아서 너무 좋아요.ㅋ
짜장면 곱배기는 느끼해서 다 못 먹어도 국수 곱배기는 먹어지더라구요.
집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 거리라.. 걸어가면서 속을 비우고 먹고 걸어오면서 소화시켜요..^^
또 먹고 싶어요~~~~

감은빛 2011-10-1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가사키면 좀 매운 느낌이던데, 물론 저는 매운라면을 좋아해서 잘 먹었지만,
아내와 큰애는 매운 걸 못먹어서 혼자 몰래 먹을 때에만 가능한 메뉴가 되겠네요.
장안의 화제라는 꼬꼬면은 아직 구경도 못해봤어요.
어디 파는 가게나 있기나 한지 궁금하네요.

저도 밤 늦게 라면 먹고, 영화보는거 좋아하는데,
아침이면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죠. ^^

blanca 2011-10-20 09:43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정말 먹는 순간만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차라리 그래서 라면을 안 보면 나을 것 같아 보관함을 비워두었답니다.ㅋㅋ 하여튼 저녁 여섯 시 이후에는 주전부리 안 먹고 열두 시 전에는 취침하는 것이 다음 날을 위해 제일 건전한 행동인 것 같아요.

yamoo 2011-10-22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녀의 감상을 블랑카님의 페이퍼에서 다 보네요^^ 이거 시나리오 쓰는 친구가 <하녀>의 시나리오에 대해 엄청난 상찬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이런 쓰릴러를 쓸 수 있다는 것에 정말 놀라웠다는군요. 저는 이 흑백 영화를 아직 못 보았지만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블랑카님의 짧은 글을 보니 마구 보고 싶어 지는데요^^

빨강머리 앤...이건 명작이라 후회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blanca 2011-10-23 22:11   좋아요 0 | URL
야무님, 저도 시나리오 좋다는 얘기만 듣고 정말 우연찮게 보았는데 물론 설정이나 대사 같은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면들은 있지만 히치콕 못지 않더라고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서 중간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답니다.빨간머리 앤 지금 읽는 중인데 3권부터 좀 지루하네요.-..-